예쁘다, 는 것은 단지 보이는 것, 그러니까 시각적으로만 판단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본연의 외양 말고도 그것을 둘러싼 주변 환경, 그러니까 그것이 장소일 경우에는 꽃 밭이냐, 흙길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또 그것이 어떤 물건일 경우 그것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도 예쁘다는 판단을 다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예쁠 수밖에 없다.
그 애의 빨간 구두는 참으로 예뻤다. 처음 본 순간부터 반짝반짝 빛이 나는 구두코가 아이의 눈길을 하염없이 잡아끌었다. 그 애가 엄마 손을 잡고 타닥타닥 계단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아이는 그 빨간 구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1층 수돗가에서 빨래 하는 엄마 옆에서 물장난을 하던 아이는 마침 외출하고 돌아오던 2층 집 모녀와 마주쳤고, 그렇게 2층으로 올라가던 아이의 새 구두를 보게 된 것이다.
그 구두는 단박에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새 신발답게 바닥까지 깨끗한 그것은 어린아이가 신기에 부담스럽지 않도록 적당히 높인 굽이 맵시가 나 보였고, 발등 부분에는 리본 모양의 장식이 있었으며, 그 리본 중앙에 박힌 큐빅은 햇빛을 받아 걸음마다 반짝반짝 빛났다. 그 구두를 바라 보던 아이는 2층 애가 계단을 다 올라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슬며시 집 안으로 들어가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버렸다. 운동화는 오래 신어 이미 빨아도 씻어지지 않는 때가 묻어 있었고, 비 오는 날 빗물을 막아주지 못할 만큼 해져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는 이번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이 돼야 새 운동화를 사줄터였다. 날씨가 더워지는 초여름부터 아직 여름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초가을까지는 운동화보다 슬리퍼나 샌들을 신을 일이 많은데, 미리 운동화를 사 두면 그 사이 발이 자라 여름 동안 운동화를 얼마 신지도 못하고, 겨울에 또 새 운동화를 장만해야 하는 낭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운동화는 늘 늦가을에 사곤 했다.
아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고, 그건 처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법칙이었기에 그것을 벗어난 요구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알았더라도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엄마에게 요구를 하거나 고집을 부릴 수 있는 성정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느니 단념을 택하는 편이 아이의 성정에 더 맞았다.
1층 아이는 또래보다 몸집이 작고 왜소했다. 태어나 돌이 되기도 전에 병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겼고, 늘 잔병치레가 많은 아이 때문에 엄마는 철 철마다 없는 살림에도 한약만큼은 한 재씩 지어다 먹였지만, 여전히 아이는 작았다. 몸집도 작고 목소리도 작고, 그래서 또래와 쉽게 어울리지 못하던 아이는 마음까지 오그라 들었는지 어깨마저도 늘 움츠러들어 있었다.
빨간 구두 여자애는 2층에 살았다. 그 여자애는 매일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 소리가 1층에까지 전해져 오면 어깨 작은 아이는 밥을 먹다가도, 숙제를 하다가도, 그냥 놀다가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알 수 없이 고요해지는 마음, 그럴 때마다 한숨보다는 작은 숨이 코로 조용히 새어 나가곤 했다.
1층과 2층은 많이 달랐다. 다르다기보다 차이가 컸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동네 하나밖에 없는 2층 양옥집은 그 존재만으로 돋보였다. 그 양옥집의 1층과 2층은 요즘 아파트의 1층 2층과는 구분의 기준이 달랐다. 똑같은 집에 단순한 층의 차이, 집 호수의 차이가 아니라 주인집과 세 들어 사는 집의 차이, 피아노가 있고 없고의 차이, 1층에는 없는 많은 것들이 2층에는 있는 것의 차이, 그리고 그 모든 것에는 계층과 신분상의 차이가 스며들어 있었다. 2층 사람들은 늘 아래를 보며 편안하게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내려왔고, 1층 사람들은 2층을 거쳐 3층 옥상에 빨래를 널기 위해 갈 때조차 침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소리를 죽여야 했다.
2층 여자애는 빨간 구두를 그냥 신는 법은 없었다. 항상 하얀 타이즈에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었는데, 그 치맛단에는 늘 레이스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치마가 있었고, 1층 작은 아이도 치마가 있었지만, 레이스 달린 치마는 2층 여자 애만 입었다. 2층 애의 모든 것이 자석처럼 1층 아이의 눈을 잡아당겼다. 그걸 엄마도 눈치챘던 걸까. 아이가 2층 애의 레이스 치마를 뚫어져라 쳐다봤던 어느 날 엄마는 자신의 레이스 달린 긴치마를 두 동강 냈다. 그리고 레이스가 달린 아랫부분에 고무줄을 넣어 아이의 치마를 만들어 주었다.
약간의 보푸라기가 일긴 했지만, 기성품처럼 세련되진 않았어도 엄마의 보라색 치마는 예뻤다.
옷매무새가 단정하다는 것, 그냥 치마가 아니라 나풀거리는 레이스가 하나 더 있는 치마를 입었다는 것, 사계절 운동화 한 켤레가 아닌 구두도 있다는 것, 그건 다름 아닌 사랑의 표시였다. 부모의 사랑이 넘치는 아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표가 난다. 쓰다듬고 보듬어 주는 부모의 손길이 아이를 반짝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날 1층 작은 아이가 유달리 2층 여자애의 반짝이는 구두코가 부러웠던 것도 어쩌면 사랑에 대한 고픈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아이처럼 되고 싶은 마음, 넘치도록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은 아이에게 고요한 부러움과 질투를 불러왔고, 그런 생각의 흐름들은 1층 아이게도 얼마간의 욕망을 갖게 했다. 갖고 싶다는 욕망. 예쁘고 부럽고 빛나고 싶은 욕심, 그리고 그것은 절제나 인내보다 아홉 살 아이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었다.
2층 여자애는 한참 동안 빨간 구두를 신었다. 학교를 갈 때도 엄마와 외출을 할 때도, 빨간 구두는 그 아이를 발에 꼭 맞게 신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아이가 가는 곳은 다 좋은 곳일 것만 같았다. 어디든 좋은 곳으로만 데려다준다는 요술 구두처럼. 그렇게 두 계절이 쯤이 지났다. 그 사이 빨간 구두는 색이 바래지고, 봉긋하게 솟아 있던 구두코도 어느새 주저앉아 예전의 모습을 잃은 듯했지만, 1층 아이의 부러운 마음만큼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 부러움이 결국은 사달을 내고 말았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물건을 갖고 와 버린 것이다.
* 두 편으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다음 편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