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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지현 May 19. 2020

아버지의 안동식혜와 나의 콜라, 그 간격에 대한 이야기

니들이 식혜 맛을 알어?


아이고 속 쓰리다. 여, 식혜 한 그릇 떠 온나~

엄마, 아빠가 빨간 식혜 달래.


약주를 거하게 하신 다음 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식혜를 찾으셨다. 그러면 으레 우리는 엄마에게 빨간 식혜를 받아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다.


빨간 식혜.

우리 집엔 두 종류의 식혜가 있었다. 온 식구용 하얀 식혜와 아버지용 빨간 식혜다. 일반적으로 식혜라고 하면 엿기름을 우린 물에 쌀밥을 말아 따뜻한 곳 두어 삭힌 뒤, 설탕을 넣고 끓여낸 뽀오얀 식혜를 말하지만, 아버지의 식혜는 색깔부터도 뽀오얀 하얀색이 아닌 빨간색이었고, 그 속에 들어간 재료도 일반 식혜와는 달리 별의 별것이 다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아버지의 식혜는 이름은 같은 식혜여도 맛은 완전히 달랐다.


엄마도 시집와서 할머니에게 배웠다는 그 식혜는 재료도 만드는 방법도 독특했다. 아버지의 식혜에는 우선 고춧가루가 들어갔고, 생고구마와 당근, 무 그리고 배를 채 썰어 넣고, 거기에 생강도 채를 썰어 넣었다. 그리고 한소끔 끓여서 식히는 일반 식혜와는 달리 끓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삭혀서 먹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식혜는 맛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고구마와 당근과 무와 배와 생강을 한꺼번에 넣은 음식은 이전에도 먹어본 적이 없었고, 때문에 먹어본들 어차피 모르는 맛이었다.


아버지의 식혜 사랑은 대단했다.

식혜를 드실 때마다 "니들이 진정한 식혜 맛을 알아?"로 시작하는 일장 연설을 곁들였는데, 그건 대략 이런 것이었다.


"이거는 말이다. 안동식혜라 카는 기라. 이기 을마나 귀한거냐 카믄, 옛날에는 양반 아니면 몬 묵었다꼬. 이래 귀한 거를, 너거는 하낫도 모르고, 먹어 보라 캐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쯧쯧쯧. 헛똑똑이들."


아버지에게 안동식혜는 설움이자 위안이었을까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없고, 기대고 싶으나 의지할 곳 없던 치기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경북 의성 작은 마을의 청상과부집 막내아들이었다. '아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만으로도 엇나갈 이유가 충분했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크나던 시절 크고 작은 말썽을 달고 다녀 늘 할머니의 속을 태웠다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없는 집 아이는 일찍 철이 들게 마련인건지, 어찌어찌 고등학교 졸업장을 겨우 받아 든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무작정 대구로 와 버스회사에 운전기사 보조로 취직을 했다. 일만 시켜주면 뭐든 열심히 하겠다는 말보증과 함께.


돈 십원도 없이 사회에 던져진 아버지는 어쨌든 일을 해야 했고, 고향에 혼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허랑방탕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버스회사에서 새벽 첫차 출발할 때부터 막차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들어오고 나가는 차량 관리와 청소, 정비를 했고, 집도 절도 없이 사무실 한켠에서 숙식하며 잠자는 시간만 빼고 모든 시간을 노동에 쏟아부었다. 당시 그런 아버지에게는 철칙이 하나 있었다. 모든 수입의 90%는 저축하고 나머지 10%로 생활하되 세끼 밥상의 찬은 2가지를 넘기지 않는 것. 그 찬이라 함은 풋고추와 된장, 혹은 풋고추와 고추장이었다. 혈기왕성한 장정이 어떻게 쌀과 풋고추와 된장과 고추장으로 그 오랜 시간 고된 노동을 이겨냈는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잘 살아보겠다는 그 악착같은 마음이 쌀과 풋고추 만으로도 그 고된 노동을 이겨내게 했을 것이다.


짜도 짜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마른행주 같은 구두쇠 남편을 만나 결혼한 엄마는 덩달아 1식 2찬의 생활을 몸에 익혀야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익혀야 했던 건, 할머니의 안동식혜였다. 아버지는 밥은 풋고추와 먹어도 후식으로는 꼭 안동식혜를 찾았기 때문이다. 요기가 되는 음식도 아니고, 끼니가 되는 음식도 아닌데, 아버지가 안동식혜에 집착을 했던 건, 왜였을까. 고향을 떠나와 고된 생활 하면서 위안 삼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음식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어머니의 사랑 그 대신이었을까. 하루의 노동 끝에 고단함을 달래는 소주 한잔, 그리고 다음날 숙취로 쓰린 속을 달래주던 안동식혜.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에겐 안동식혜가 인생 음식이 될 만한 이유가 충분했을지 모른다.


아버지의 안동식혜, 그리고 나의 콜라


아버지가 안동식혜라면, 나는 어려서부터 콜라였다. 나의 콜라 사랑은 이유가 있다. 엄마가 첫 아이, 그러니까 나를 뱃속에 품었을 때 하루는 콜라가 너무 먹고 싶더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한 병에 50원 하는 콜라를 한 번만 사달라고 했는데, 그걸 아버지가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임신하면 참외 꼭지도 먹고 싶을 만큼 입맛이 변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질 때라는데, 1식 2찬을 고집하던 아버지에게 그런 건 하지 않고 먹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는 사치였던 것이다. 엄마는 결국 열 달 동안 콜라라고는 한 방울도 구경하지 못한 채 나를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엄마에게 두고두고 "독한 양반, 그거를 한 병 안 사주드라. 진짜 지독하제. 내 얼마나 속상하든지 그거는 평생 안 잊어뿐다."라는 원망과 평생의 험담 거리로 남았고, 나에게는 '선천성 콜라 집착형'이라는 DNA로 남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자연스럽게 대결구도가 됐다. 아버지는 콜라만 마셔대는 나를 맛도 모르는 요즘 것들이라며 마뜩잖아했고, 나는 안동식혜만 식혜라며 우겨대는 아버지의 고집못마땅했다.

그러던 중 내가 아버지의 안동식혜를 더욱 멀리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언젠가 안동식혜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가 식겁한 일이었다. 방심하고 식혜를 호로록 목구멍으로 넘기던 순간 고춧가루와 생강의 매콤한 기운에 기침이 났고, 컥컥 대는 가운데 입 속에 있던 모든 채소들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혓바닥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씹히던 그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닌데, 도대체 이걸 뭔 맛으로 먹는 거지? 그저 양반 음식이라고 하니 좋다고 먹는 허세인가? 그렇잖아도 아버지를 향한 사춘기의 마뜩잖은 마음은 그때 조소가 되어 삐죽 흘러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나는 아버지가 빨간 식혜 찬양을 하며 나에게 "느그들 입은 입도 아니"라고 아버지가 퉁박을 줄 때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탓이다, 아버지가 엄마한테 콜라를 안 사준 한(恨) 나에게 들러붙은 것이므로 나를 탓하지 마시고 당신의 근본적인 잘못부터 인정하시라, 며 아버지 앞에서 보란 듯이 콜라를 마셔댔다. 그렇게 아버지는 빨간 안동식혜를, 나는 시커먼 콜라를 마셨고, 같이 트림을 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안동식혜 사랑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평소 뽀오얀 식혜는 '감주'요, 식혜라는 이름을 쓸 수 있는 건 안동식혜 밖에 없다고 주장해 온 아버지 앞에 대기업의 뽀오얀 '식혜'가 상품으로 등장한 것이다. 음료식품회사에서 출시한 '식혜'는 전국적으로 히트를 쳤고, 뽀오얀 쌀뜨물 색깔의 식혜만이 '식혜'를 의미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빨간 식혜만 식혜다'라는 주장은 씨알도 먹히지 않게 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혼자서 "저건 식혜가 아이다. 저거는 '감주'라 카는 기고, 식혜는 안동식혜 밖에 읎어!"라며 고집을 세웠다. 그러면 난 조용히 속으로 '웃기시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동식혜를 마시며 아버지의 삶을 헤아린다


안동식혜는 경상도 안동 지방에서 전해오던 향토 음식이다. 고춧가루가 들어가 시뻘건 국물에 생강과 고구마, 무와 당근 등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가 국도 아니고 동치미도 아닌 것이 깔끔하게 보이진 않아도 맛은 아주 일품이다.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느낌에 소화에 도움을 주고 감기와 기침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안동식혜가 우리의 좋은 음식이며, 전통이 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물론 지금까지도 나는 빨간 식혜보다는 콜라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런 안동식혜의 맛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됐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서른도 훌쩍 넘어서 다시 먹어본 안동식혜는 어렸을 때 먹었던 그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안동식혜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매콤하면서도 끝 맛이 달고, 뭔가 묵직하면서도 시원했으며, 처음엔 쓴 것 같지만, 아작아작 씹히는 채소는 싱그러운 달콤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속이 편했다. 아버지도 지금의 내 나이 일 때, 이런 맛으로 안동식혜를 찾았던 것일까.


어쩌면 그때의 내가 그토록 아버지의 빨간 식혜가 싫었던 건, 무작정 아버지에게 대들고 싶었던 사춘기 반항심이 만들어 낸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좋다면 무조건 싫고 봐야 했던 삐딱했던 마음. 그 마음이 커서 이제 나이가 들고,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지나고 있는 나는 다는 아니지만 식혜라는 음식을 통해 부모의 마음을,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을 헤아려 보게 된다. 고된 생활 속에서 당신의 마음을 붙잡아 준 음식, 힘든 삶 가운데 어머니의 위로 같았던 음식, 후루룩 들이키고 나면 쓰린 속을 편하게 달래주던 인생의 약과도 같았던 음식, 아버지에겐 안동식혜가 그런 음식이었으리라.


물론, 지금도 나는 콜라를 좋아하고, 아버지는 일편단심 안동식혜를 좋아하신다. 안동식혜와 콜라의 간극만큼이나 나는 아버지 시대의 없이 산 고생과 설움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안동식혜를 통해 아버지의 인생을 헤아려 볼 수 있게 됐다. 아직도 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날이 되면, 엄마에게 식혜 한 번 만들어 보라는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 그때마다 "하여간 아버지 식성은 유별나서 엄마 힘들게 한다"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 이번 겨울에는 아버지의 식혜에 들어갈 고구마라도 같이 썰어 봐야겠다. 그리고 맛이 들면 같이 마주 앉아 이제는 먹을만하다고, 이 맛에 드셨구나, 맞장구쳐 드려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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