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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지현 Jul 14. 2020

그때 우린 눈꽃 같았다

여름에 추억하는 뜬금없는 겨울에세이

주말 아침, 나는 느긋하게 눈을 뜨고도 할 일이 없어,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제 막 방학을 시작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고, 밀린 학자금 대출과 다음 학기 학자금을 위해 곧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야겠지만, 하루 이틀 정도는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 시절의 나는 스무 살의 자유와 들뜬 기분을 온전히 누릴 권리보다 등록금의 의무와 생활의 책임이 더욱 무겁게 책정된, 20대의 첫 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내게 그는 이틀 전 이별을 통보해왔다. 3개월의 짧은 연애기간 끝에 이유 없이 연락을 끊은 지 2주 만이었다. 2주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그 사이 다른 얼굴로 변해있었다. 나를 보며 반갑게 웃던 그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의 시린 공기는 낯 설은 그의 얼굴과 함께 더욱 서늘하게 느껴졌다. 추운 바깥공기를 피해 어디라도 좀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럴 필요까지 있겠냐고, 잠깐이면 된다며 그는 나의 말을 뭉갰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뒤에 "미안하다" 그 한 마디로 우리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정말 한 마디였다. 함께 나눈 시간과 깊은 감정의 끝이 그 한마디로 끝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사랑을 잃은 것보다 더 허무했고 배신감이 들었다. 너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같을 순 없겠지만, 우리의 사랑이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가벼운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사랑의 감정이라는 게 세상에 쌓일 땐 너무도 아름다운 눈송이처럼 세상의 온갖 추한 것까지 하얗게 뒤덮지만, 막상 그 속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밖으로 내딛는 순간 푹 꺼지고, 손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처럼 그렇게 허무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그 사람의 변한 마음이 아닌 사랑의 속성이라는 것에 더 배신감이 들었다.


아름다운 사랑의 시작은 있어도 사랑의 아름다운 끝은 없는 거구나. 사랑의 모든 끝은 참담하구나. 그렇게 또 하나의 사랑을 배웠다. 다만, 스무 살의 찬란한 사랑의 끝이라는 게 이리도 아무렇게나 취급당해도 되는 것일까, 좀 더 친절하고 배려 있는 이별은 없었을까, 아쉬움이 분노로, 분노가 허탈함으로, 허탈함이 허무함으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멈출 줄을 모르고 작동되고 있었다.


그렇게 이틀의 밤을 온갖 어지러운 생각으로 앓고 난 아침이었다. 사랑은 한 마디로 끝이 날 수 있어도 감정을 끊어내는 건 시간이었다. 그리고 사건 속에서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이틀이 지났지만, 마음은 다시 생생하게 아픈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친구였다. 학번이 같은 친구는 재수를 해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래도 우린 친구였다. 다만, 나의 마음을 잘 들어주고 감싸주는 친구였다. 그 일 년의 차이가 친구에게 준 마음의 크기였을까.


방학인데, 뭐하냐고, 아르바이트는 구했냐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그냥"이란 대답만 하고 있었다. 그 "그냥"이란 대답을 듣던 친구는 그냥 만나자며 그냥 자기가 우리 집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집 앞 카페에서 만난 친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오가던 이야기와 침묵 끝에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난 끝장나버린 나의 사랑에 대해, 친구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랑에 대해. 그리고 이야기를 마쳤을 때, 우린 같이 한 숨을 쉬었다. 난 아파서, 친구는 서글퍼서.


친구의 사랑은 여느 사랑과는 시작이 달랐다. 친구가 사랑하기로 한 사람에겐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차마 고백조차 할 수 없는 마음을 주저앉혀보려 했지만, 세상 가장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 마음이라고, 멈추는 마음이 혼자 좋아하는 마음보다 더 힘들어 숨이라도 좀 제대로 쉬어보기 위해 그냥 혼자 좋아하기로 해 버렸다고 했다. 희망 없이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는 건, 사랑이 아니어도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린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친구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우리는 누군가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스무 살의 사랑이란 너무 서툴러서 불씨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겨우 어떻게 붙였다고 해도 요령 있게 힘 조절을 하지 못하면 빨리 타버려 재처럼 가볍고 허무해진다는 걸, 우린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멈춰 선 것만 같은 하얀 세상에서 우린 자유롭게 걸었다.


- 너 저거 보여?


친구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곳으로 나도 고개를 돌렸다.


- 어? 눈 온다.


하늘에서 하늘하늘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쌓이지 않았고, 이리저리 날리며 내리는 걸 보니,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무얼 하기에도 헤어지기에도 어정쩡한 겨울 평일 한낮의  오후 4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 있기에도 우리 마음은 복잡했으니까. 위안도 위로도 필요하지 않았다. 우린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걸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았기 때문이다. 하늘하늘 내리던 눈은 어느새 솜뭉치가 돼 내리고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 포근하게 내리는 눈은 오래 많이 온대. 눈이 제법 쌓일 것 같아.

- 그럼 집에 빨리 가야 하는 거 아냐?

-......

-......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가기 싫은 마음과 잡고 싶은 마음이 한 마음으로 엮였다. 그리고 친구와 나는 뒤의 일은 생각지 않은 채 오래도록 창밖의 세상을 온 눈으로 훑었다. 낮에 만나 커피 한 잔으로 오후를 보내고 저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친구의 말대로 오래도록 내리며 새 하얗게 쌓이던 눈은 결국 버스를 멈춰 세웠고, 택시를 도로에 가뒀으며, 세상을 멈추게 했다. 눈길에 일찍 귀가를 서둘렀던 사람들 때문인지 길에도 사람의 자취가 사라졌다. 세상이 멈췄다.


우린 돌연 즐거워졌다. 늘 모든 세상이 나보다 먼저, 나만 빼고 빨리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만 같았는데, 그런 세상이 멈춘 거다. 모든 것이 멈춰 선 것만 같은 하얀 세상에서 우린 자유롭게 걸었다. 한 참을 걷다가 익숙하던 추위가 이제 한기로 바뀔 때쯤, 나는 눈이 녹고 눈 속에 감춰졌던 일상이 모습을 드러내면 다시 서글픈 사랑의 현실을 마주하게 될 친구가 걱정돼 물었다.  


-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 뭘 어떻게 해.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그냥 혼자 좋아하는 거지.

  그러는 넌 내일부터 뭐 할 거야?


난 피식 웃었다. 사랑이 끝장났는데, 할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싶어서.


- 뭐하긴, 등록금 벌려면 아르바이트 알아봐야지.


그리고 같이 웃었다. 우린 아팠지만, 따뜻했고,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그때도 했던 것 같다. 세상의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날려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 채 내리는 연약한 눈송이지만, 그래도 결국엔 쌓이고 쌓이면 눈꽃이 되는 것처럼, 그 시절 20대의 우린 흔들리는 눈꽃 같았다.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 없고, 무엇하나 이룰 수 없는,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연약한 눈송이처럼 불안했다. 하지만, 같이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 사랑이란 감정의 폭풍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인지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 시절 힘든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지금도 문득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면 나는 문득 그날을 기억한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멀어져, 이제는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친구.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 어떤 아이의 엄마, 혹은 자신의 이름 석 자로 잘 살아가고 있겠지만, 그 날의 기억이 내 마음속의 눈꽃같은 추억인 것 처럼 너에게도 그날의 기억이 살아가다 문득 생각나는 눈꽃 같은 기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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