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을지도 모르는 빈말들

여전히 익숙지 않지만, 그럼에도

by 권권우

“시간 날 때 얼굴 한 번 보자, 언제 밥 한 번 먹자” 따위의 인사치레를 절대 입에 담지 않았던 때가 있다. 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빈말에 병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을 가식적인 사람이라고 낙인찍으며 마음속에서 거리를 두기도 했다.


지금도 빈말 내지는 인사치레를 좋아하진 않는다. 여전히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보다는 진솔한 사람이 좋다. 하지만 뱀 같은 세치 혀로 내뱉는 거짓말이라고 여겼던 그 빈말에도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겼음을 알게 됐다. 나도 사는 게 바쁘고 너 역시 여유가 넘치지 않을 테니 지금 당장 약속을 정하고 만나자는 확답을 받아내지는 않겠다는 배려 말이다. 진짜로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 인사보다는 질문을 던지겠지만 사실 각자의 사정이라는 무수한 변수가 그것을 꽤나 어렵게 하지 않나.

상대에게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배려가 그 빈말의 출처가 되었다고 생각할 줄 알게 됐다. 나는 널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낼 의향이 언제든 있으니 혹시 서로 시간이 맞는다면 언제든 조율해 보자는 마음이 소위 말하는 ‘빈말’을 만든 것이겠지.


물론 요만큼의 진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빈말을 던지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기꺼이 가까이하지는 못하겠지만 굳이 날을 세우고 싶지는 않다.

‘진심’이라는 가치에 평생 매달려 왔다. 내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고, 동시에 말의 무게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것이니 뭐든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으며,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장난질하는 건 절대 안된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멋진 이야기들이다. 진리에 가까운 말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근데 보통 사람들이 저것들을 다 지키고 사나? 나는 어땠지?

나는 그런 것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은 기억이 수없이 많은데 왜 나는 저것들에 매달려야 하는 건지 생각하다가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아,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나도 그 가치들을 지키지 못하고 형편없는 인간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준 적 수없이 많았구나. 억울해할 것이 하나도 없구나. 새삼 깨달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다 그냥 나약한 인간밖에는 안되는 것인데 왜 그렇게 나는 사람을 가리고 나누려고만 했을까. 어차피 하나하나 전부 다르고 또 같은데 말이지.

생각의 무게를 덜고 싶어졌다.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나에 대한 것도. 언젠가는 꼭 행복해지고 싶다는 원대한 꿈도 힘겹게 짊어지기보단 슬슬 굴려가고 싶다. 최근에 읽은 산문집에서 ‘형체가 있는 것은 결국 언젠가,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나를 떠날 것이다’라는 말을 봤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것에도 어느 정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결국 모든 것은 다 지나갈 테니까. 기쁨, 소속감, 안정, 사랑, 우정, 고독, 고통, 절망 이런 것들도 전부 다. 결국 모두 나를 떠나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매몰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으니 딱 그 명제만을 간직해 둬야지.


덜어낸 생각의 무게만큼 건네는 말도 가볍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빈말들을 섞어 말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 안에는 당신이 늘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아주 비어있지는 않은, 그러나 적정히 가벼운 빈말들을 말이다.

우리 조만간 만나서 밥 한 번 먹자. 너라면 언제든 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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