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것은 사라진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기록해 놓았다 해도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메모해 둔 종이가 불타 없어지거나, 파일을 저장해 둔 디스크가 고장이 나거나, 사용하던 플랫폼이 문을 닫을 수도 있으니까. 보장되지도 않는 이 기록이라는 수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하는 이유는 무얼까.
결국은 머릿속에 남기기 위함이다. 기록이 영원하지 않다 해도 기록해 놓은 것을 간간이 들여다보면 기억은 선명해지고, 그게 반복되면 어떤 것은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기억 속에 남는다. 잊고 싶은 기억이 계속 머리에 남아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어떤 기억은 흉터처럼 혹은 문신처럼 오래도록 남아 있으므로.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글들을 풀어놓고 있나 생각해 봤다. 예전에 블로그에, 혹은 노트북이나 핸드폰 메모장에 남겨둔 글들을 둘러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남겨둔 것을 통해 지나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약 1년 9개월 전에 메모장에 최악의 하루에 대한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마치 짜놓은 것처럼 완벽하게 엉망진창인 날이 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더라. 내용을 읽어보니 지금 와서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건들로만 가득했다. 물론 그 당시엔 정말 심각한 일이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형체 있는 것도 형체 없는 것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남는
기억뿐이라고 했다. 물론 기억조차도 사라질 수 있지만 그가 그것을 몰라서 남는 것이 기억뿐이라고 얘기한 것 같지는 않다. 머릿속에 있는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기록하여 형체를 남기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결국 가장 오래, 확실하게 남는 것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기억이라는 정보가 사라지면 감정만이 남는다. 감정조차도 언젠가 희석되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나간 것과 사라진 것은 다르니까. 이제는
지나갔기에 더 이상 나의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도, 분명 있었던 일이고 느꼈던 감정이다. 그리고 어쩌면, 자각하지 못하지만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모른다. 경험이 주는 자양분은 보이지 않아도 남아있지 않겠나. 그러니, 나는 계속 무언가를 쓰겠다. 써내려 가지 않아도 마음이 아프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 지금 이 순간이 분명 지나간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마음에 새길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