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지붕에 대한 추억
빗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다
중학생 시절 팔달로
양철 지붕 집 대청마루에서
어둠 속의 빗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선잠 들었다가 어스름이
내 몸 위로 한 장 담요처럼 덮여와
눈감은 채
그냥 빗소리를 보고만 있었다
듣는 것이 아니라 빗소리를 처음 보던 날
귀가 뚫려 눈 감은 채 바라본
빗소리는 젖지 않는
마음속으로 얇고 가볍게 흘러들어
대청마루를 지붕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 같은데
한 장 담요 밑에 누운 나는
잿빛 문을 비스듬히 열고
들어가는 빗소리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최동호 시집 『제왕나비』)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원래 “우주의 문법에는 시간이 들어있지 않다”고 한다. 인간적인 의미를 갖는 한에서 시간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 추억 등으로 되찾았을 때 일정한 형상으로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최동호 시집 『제왕나비』속에는 “등교 첫날 아침/곱은 손으로(「중학생」)”금단추를 달아주던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머리 흰 중학생”이 있다.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가상과 같은 그 인상은 「양철지붕에 대한 추억」에서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며 시적 품새를 갖춘 소년의 자화상으로 시간화되어 나타난다. 설사 우리가 보지 못했더라도 일찍이 화자가 경험한 감동적인 시적감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일 뿐인 모든 대상에 의미와 가능성을 찾아내 시로 승화시키는 머리 흰 중학생의 실재함을 암시하게 된다.
“중학생 시절 팔달로/양철 지붕 집 대청마루에서/어둠 속의 빗소리를 듣”는 감수성이 예민한 화자, 대청마루에 누워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붙들린다. 그리고 “선잠 들었다가” 신비한 체험을 한다. “내 몸 위로 한 장 담요처럼 덮여”오는 어스름에서 빗소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빗소리는 젖지 않는/마음속으로 얇고 가볍게 흘러들어” 그의 마음은 점점 밝아지는 빗소리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어둠이 어스름이 되고 또 잿빛이 되어 시간을 역행하며 시적공간을 창조하는데 이런 영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침내 “대청마루를 지붕 위로 떠오르게 하는” 기분, 그러다 “문을 비스듬히 열고/들어가는 빗소리의 뒷모습”을 본다. 홀연히 나타난 빗소리는 구체적이지 않으나 이미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는 이전과 다른 화자가 되어 있다. “듣는 것이 아니라 빗소리를 처음 보던 날”이 내면화 된 주체다. 청각적 이미지임에도 시각적 이미지를 획득하여 빗소리가 상징화되고 기호처럼 다가오는 찰나 빗소리는 이미 빗소리가 아니게 된다. “귀가 뚫려 눈 감은 채 바라본” 이상화된 대상으로 승화된 존재다. 그러나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빗소리는 우리가 닿고 싶은 이데아의 세계, 아니면 불가능한, 먼 초월적인 대상일지 모른다. 어쩌면 양철지붕을 노크하던 비가 바람의 힘으로 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공상이거나 감정의 기복이 심한 소년기 체험일수도 있으나, 이후 빗소리의 뒷모습은 그 너머로 계속해서 운동하고 이동하여 시적주체로서 머리 흰 중학생의 이미지로 시간화된다. 빗소리가 잿빛 문을 열고 들어간 곳, 그곳은 공기, 햇살, 바람, 나무와 더불어 우리가 지향하는 예술로 승화된 세계이나, 그 또한 미화된 곳이 아닌 현실의 다른 모습이다.
시집 『제왕나비』가 편편이 감각적 비의를 품고 숭고한 빛을 발하는 가운데,「양철지붕에 대한 추억」을 통해 명징한 이미지로 발현된 시간을 보았다. 특히 “시의 매혹과 마력에 붙들려 그것에 제 일생을 걸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헌신적인 실존의 내력 전체를 응축”(이찬의 해설) 하는 「시」에서 절정을 보여준다. “터지는 순간 사라지는 빛//가장 열렬한//첫사랑”이다. 중학생 시절에 본 빗소리의 뒷모습 아닌가. 사라지는 빛-시간-은 숭고해 늘 연모의 대상이 된다. 사라질지언정, 빛을 통해 시간의 이미지를 창조해야 하는 시인의 운명과 존재론 또한 이 시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