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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하는가?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 나에게 하는 질문

by 권사부

나는 왜 공부하는가?

지난 5년 동안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했다. 단순히 학위를 위한 공부는 아니지만, 학위라는 목표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하는 연구가 과연 나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에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자문하게 되었다. 과연 이 연구가 세상에 작게나마 긍정적인 영향은 미칠 수 있을까?

최근 디지털 자아와 현실 자아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내가 왜 이 연구를 시작했는지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일어나는 다양한 부정적인 사건, 사고들은 디지털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윤리적 문제들이 현실 자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SNS를 포함한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벌어지는 비윤리적인 문제들은 아직 수면위로 올라오지 않았을 뿐, 현재도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나는 디지털 자아의 비윤리적 행위가 특별한 악의 성향이나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요인과 시스템적인 맥락에서 비윤리적 행위가 자연스럽게 발현 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유대인 600만명을 잔인하고 무심하게 죽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관료적 체제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행한 것처럼, 디지털 자아 역시 익명성과 자율성이라는 환경적 요소로 인해 윤리적 판단이 결여된 상태로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표면악(superficial evil)이라 하고, 이러한 행위는 '무능력함'으로 일어난다고 하였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유는 나쁜 의미에서 극도로 단순했다. 1차원적이었고, 피상적이었고, 깊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타인의 현실적인 입장을 생각할 수 없는 '무능력함' 그 자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세상에서 만행하는 비윤리적 행위들도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무능력함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디지털 세상의 문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현실 세상에서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연구를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벅차게 만들었다. 그 순간, 오랜 고민 끝에 실마리를 찾은듯한 느낌이 들었고, 내가 하는 연구가 세상에 작은 빛이라도 비출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지도 교수님께서는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런 가슴이 벅찬 느낌은 아무나 느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감정을 간직한 채 앞으로도 나아가며 연구를 이어가라고, 이 벅참이야말로 내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감사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디지털과 현실이 혼재된 다중 세상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나의 연구가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작은 힘이 결국 인류에게도 작은 기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의미가 될 것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찾은 기분이다. 앞으로도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가려 한다. 흔들릴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 인류의 행복과 희망을 전하는 기업인이자 철학자의 삶을 위해서.

끝으로, 최근 읽은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마지막 구절을 곱씹으며 글을 마무리 해본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그 나날을, 수십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이 구절이 마치 나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타인을 위한, 세상을 위한, 인류를 위한 삶을 고민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다면, 그 삶이 과연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일 수 있을까?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한 번쯤은 꼭 던져봐야 할, 그리고 반드시 답해야 할 질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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