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로 전락한 인간의 이성
1940년대는 제국주의와 전체주의가 전 세계를 집어삼키며 6,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시대였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그리고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의 군국주의 지도자들은 각자의 이념과 권력 욕망으로 세상을 피로 물들였다. 이러한 비극을 단순히 몇몇 악인의 광기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이는 자본주의와 권위주의가 결합해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의 산물이자,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모순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는 물질적 풍요와 동시에 계급 분리와 인간 소외를 심화시켰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성을 인간다운 삶의 창조적 기반으로 보았지만, 현실 속 이성은 생산력과 효율성의 도구로 전락했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를 "도구적 이성"이라 칭하며,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위한 이성이 효율성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했다. 나치즘은 바로 이러한 도구적 이성이 극단으로 치닫았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가치를 도외시할 때, 이성은 폭력과 억압의 정당화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비판을 한국의 역사에 대입해보자.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대한민국의 독재정권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박정희 정권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통해 독일 경제를 회복하려 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성장의 배경에는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독재정권은 경제 성장을 핑계로 국민의 권리를 억압했고, 많은 이들이 억울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 우리는 경제 성장을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을 희생의 이름으로 묻었는가? 과연 그들의 독재가 우리에게 필요했던 선택이었는가?
현대 한국 재벌의 탄생을 돌아보면 친일파, 독재정권의 협력자, 그리고 IMF라는 세 가지 흐름 속에서 형성된 구조가 보인다. 그들이 쌓아올린 부와 권력은 경제 발전의 상징으로 미화되곤 하지만, 그 배경에는 누군가의 피와 눈물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효율성과 성장을 내세우며 인간성을 도외시하는 태도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특정한 목소리나 권위에 휩쓸려 그들이 원하는 대중으로 전락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주체성을 잃게 된다. 호르크하이머가 말한 도구적 이성의 경고가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의 사고가 도구화되는 순간, 우리는 체제의 부품으로 전락하며 진정한 자유를 잃는다. 경제 발전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희생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야 한다.
공부와 자기 성찰은 단순히 개인의 성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 진실을 직시하고,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우리가 비판적 사고를 통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중심에 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은 귀찮고 재미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희생을 잊지 않고, 그것을 통해 배운 교훈을 미래로 이어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철학적 사고를 기르는 이유이며, 인간답게 사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