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점심시간 이야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열한 직장 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면 역시 점심시간 아닐까? 월스트리트라고 딱히 다른 것은 아니다. 출근과 동시에 커피를 들고서 아침 내내 '오늘은 뭘 먹을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 팀의 점심 문화는 여느 미국 직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 대부분의 직장은 한국과 다르게 '12시부터 1시' 이런 식으로 점심시간을 정해두지 않는다. 적당한 시간에 나가서 음식을 사 오거나 배달을 시켜서 회의실이나 데스크에서 혼자 먹는 분위기이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에 항상 단체로 가서 식당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던 나는 처음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11시쯤 되면 자신이 싸온 도시락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고 3시가 되서야 점심을 사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트레이딩 업무 특성상 모든 사람이 동시에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에 비슷한 업무를 하는 사람끼리 번갈아가며 점심을 사러 갔다. 다른 팀은 요즘에도 인턴이 쉑쉑버거 10개를 사와서 상사들에게 배달해주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그런 문화는 없었다. 점심을 사러 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중요한 시간이다. 평소에 하루 종일 컴퓨터, 전화와 씨름하다 바로 퇴근을 하기 때문에 팀 동료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점심을 사러 갔다 오는 길에 업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나 질문을 할 수 있고 친해질 수 있는 기회이다.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단연코 '할랄'이다. 얼마전에 한국에도 오픈했다는 할랄 푸드는 뉴욕 곳곳에 있는 푸드 카트에서 파는 중동식 음식을 말한다. 바쁜 업무 때문에 사무실 근처의 카트에서 빠르고 저렴한 치킨 덮밥을 사 오는 게 아무래도 편리하였다. 높은 인도인 비율 때문에 할랄을 더욱 즐기는 것 같았다.
재밌게도 이 할랄은 매콤한 소스에 치킨, 그리고 쌀밥이 어우러져서 한국인 입맛에 굉장히 잘 맞았다. 마치 한솥 도시락의 '치킨 마요'에 핫소스를 뿌린 맛이랄까? 몇 명이 사 오면 맛있는 냄새 때문에 다른 사람도 덩달아 사 오게 된다.
물론 푸드 카트가 할랄만 있던 것은 아니다. 45번가 락펠러 거리에는 점심시간이 되면 각종 푸드 카트들이 줄을 지어 영업을 하여서 필리 치즈 스테이크라던가 타코 같은 것도 사 먹었다. 그중에는 한국 음식을 파는 카트인 '밥차'나 '코릴라'도 있었다.
데이터 베이스 총책임자인 리치는 이름처럼 몸집이 거대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닌 미국계 백인이자 미식가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한 달 안에는 절대로 같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미드타운 뉴욕 푸드 카트'라는 트위터를 팔로우하여서 스케쥴표를 인쇄한 뒤에 어떤 카트가 회사 주변에서 영업하는지 체크하고 시도해본다고 한다. 리치를 따라서 '소꼬리 튀김' 같은 특이한 카트 음식을 먹으러 나갔는데 맛있는 것도 많았지만 대부분 느끼하고 양이 너무 많아 반 정도만 먹고 버린 적도 많다.
함께 밥을 자주 먹은 사람은 유쾌한 시니어 트레이더인 시앙이었다. 그가 맡은 리테일이나 IT 쪽에서 돈을 잃으면 '제기랄 마이클 코어스!'라고 욕을 한마디 한 뒤에 나를 쳐다보며 '기분도 꿀꿀한데 오늘은 뭐 먹을까? 수요일(Wednesday)이니까 웬디스(Wendy's) 버거?'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는 한식, 특히 고기 마니아여서 약간 거리가 있는 한인 타운까지 가서 제육볶음이나 갈비 도시락 같은 것을 사 온 적도 많다. 순두부찌개를 워낙 좋아하길래 내가 좋아하는 초당골의 김치 비지를 소개해줬더니 고기 맛이 별로 안 느껴진다며 하루 종일 나에게 툴툴댄 적도 있다.
미국에서 가장 흔한 배달 음식인 중국 음식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이 고른 메뉴 번호를 단체 대화창에 써놓으면 중국인 팀원 한 명이 대표로 유창하게 주문을 하였다. 저렴하고 빨라서 좋긴 하였지만 나는 느끼하고 반찬도 없어서 자주 먹기는 별로였다. 모든 재료에 기름진 소스가 부어져 있어서 너무 달거나 짜고, 날아다니는 밥풀을 보면 그냥 백반이 훨씬 낫다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김치 하나라도 주면 훨씬 좋았을 텐데..
건강을 챙기는 뉴요커들은 샐러드도 굉장히 많이 먹는다. 처음에 사람들과 샐러드를 사러 갈 때는 묘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자주 간 곳은 Chop't 라는 뉴욕 곳곳에 있는 샐러드 체인이었는데 풀과 계란, 치킨 그리고 아보카도 정도를 넣은 샐러드가 12달러 씩이나 하였다. 아무리 신선한 재료를 눈 앞에서 섞어 준다 하여도 만 오천 원 돈을 주고 고작 풀 조각 들을 먹는다니... 밥과 국을 먹어야 든든하게 느끼는 천상 한국적 입맛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줄이 얼마나 긴지 브로드웨이 한복판에서 눈에 띄게 줄을 설 정도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의외로 뉴욕에서 건강하게 먹으려면 돈도 많이 들고 선택권도 별로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한식이라고 해도 맵고 짠 찌개류가 대부분이고 일식도 돈가스나 라멘이 많으니 튀기지 않고 탄수화물이 적은 음식을 먹으려면 샐러드 말곤 딱히 대안이 없는 것이다. 햄버거 세트는 8 달러면 먹지만 생강과 과일을 넣은 건강식 주스는 10달러까지 하는 재밌는 도시다.
이삼주에 한두 번은 협력사에서 맛있는 점심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초단타매매 팀은 필연적으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 저장 공간과 네트워크 비용을 낼 수밖에 없다. 데이터 베이스 저장 공간으로 우리 팀만 어림잡아 1년에 2억 정도 사용했다. 또한 매매량이 엄청나기 때문에 거래소 수수료도 엄청나게 많이 지출하였다. 그래서 협력사들은 종종 MLB 티켓, 와인 같은 선물이나 스시 점심 도시락을 같은 것을 줬다. 이런 날이면 브라이언이 아침 일찍 장을 열면서 '여러분, 오늘은 밥값 굳는 날!'이라고 외쳤다.
미국에 처음 온 2008년 즈음에 뉴스로 한류를 열심히 외칠 때만 해도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심지어 강남스타일로 난리였을 때에도 한류라기보다 강남 스타일 곡 자체가 뜬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느낀 한류는 생각보다 강하였다. 음악, 영화, 드라마와 같은 엔터테인먼트도 있지만 역시나 한식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비빔밥, 불고기 정도만 알거라 생각한 한식에 대한 인지도는 생각보다 높았다. 퇴근하고 친구들과 '치맥'하였다는 동료도 있었고 고깃집에서 생갈비를 먹는 건 매달 가는 필수 코스라고 한다. 심지어 맛있는 곱창이나 감자탕 집을 추천해달라는 상사도 있었다. 한 러시아 개발자는 부인과 기념일에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서 차를 몰고 40분 정도 가서 횟집에서 산낙지를 먹고 왔다고 한다. 매번 맛있는 한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어찌 보면 나보다 더 자주 먹는 것 같았다.
물론 점심시간에는 회사에서 아주 멀리 갈 수는 없어서 주로 타임스퀘어 주변에 있는 한식집에 가서 부대찌개나 김치볶음밥, 떡만둣국 등을 먹었다. 심지어 신라면에 고기와 양파 등을 넣은 것도 정말 잘 팔렸다.
하루는 여느 날처럼 중국 배달 음식을 먹거나 할랄을 먹자는 채팅이 대화창에 올라왔다.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또 중국 음식을 먹을 자신이 없어서 배달 사이트에 다른 메뉴가 없을까 뒤적거리고 있었다. 마침 한국식 중화요리 전문점이 눈에 띄었다. 자장면과 짬뽕을 팔고 있었다.
빅맥이 8달러 정도 하니 이 정도 가격이면 합격선이다 싶어서 시키려고 주문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한 그릇은 시킬 수 없다고 나왔다. 그냥 포기할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옆자리에 있는 러시아인 개발자 올레그에게 물어봤다.
"혹시 메뉴 아직 안 정했으면 자장면 먹어볼래?"
"오 그거 맛있어?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환영이지."
그러자 그 옆자리에 있던 러시아인 안드레와 불가리아인 에브게니도 동참하였다.
"어이, 니들만 맛있는 거 먹냐? 우리도 같이 먹자!"
이번엔 뒷자리에서 듣던 중국인 동료 무리들이 외쳤다.
"어이 YJ! 5그릇 추가야!"
졸지에 우리 팀 전체가 만장일치로 자장면 20그릇을 시키게 되었다. 시키고 나서 팀원들이 어떤 음식이냐고 묻길래 고민 끝에 '코리안 스타일 차이니즈 누들'이라고 말은 하였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보였다. 특히나 자장면을 못 들어본 중국인들은 멘붕이...
아쉽게도 철가방에 오지 않았지만 종이 가방에 온 것 치고는 굉장히 따뜻하고 맛있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먹는 시간이 제각각이라 시끌벅적한데 이 날은 조용히 후루룩하는 소리만 오피스를 채웠다. 특히 외국인들이 포크를 들고 비비며 맛있다고 열심히 먹는 모습에 괜스레 뿌듯했다. 사람들이 와서 단무지와 양파, 춘장을 어떻게 먹느냐길래 알려주고서 함께 먹었다.
나중에 다 먹고 나서 중국인들이 몰려와서 '이게 한국식 중국 음식이라고? 진짜 맛있는데? 왜 중국 음식점엔 이런 게 없지?' 하는데 뭔가 재밌었다. 그 이후로 탕수육, 짬뽕 등 한국식 중화요리도 항상 점심 메뉴 셀렉션에 포함되었다.
호기롭게 첫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지만 번번이 어떤 코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내는데 시간이 걸렸고 오류가 나면 고치는데 하루 종일 걸려서 진전이 더뎠다. 사수인 마이클에게 장 중에 질문을 하러 가면 바쁘게 시스템을 모니터링하고 실시간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나중에 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질문이 있을 때는 주로 사수와 점심을 같이 사러 갔다. 그래도 점심을 사러 가는 길은 이런 질문을 모아서 물어보거나 피드백을 여유롭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점심시간은 업무의 연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데스크에 앉아서는 실무를 처리하지만 점심시간에는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서 여러 가지 정보나 토론이 이루어진다. 우리 팀은 전체 회의 이외에는 따로 회의를 많이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점심시간 동안 많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계획하거나 트레이딩 아이디어를 토론하는 일도 많았다.
"YJ, 이번에 첫 프로젝트를 맡았다면서? 어떤 일을 하게 된 거야?"
"아 시드 씨, 델타 헤징을 할 때 주기를 바꿔가면서 수익률이 어떤 주기 일 때 제일 좋은지 찾는 리서치를 하게 되었어요!"
"오호 그래? 수익률을 계산하는 것 자체는 시뮬레이터를 통해야 하니 C++로 작성해야 하지만 비교 분석은 파이썬 스크립트로 쉽게 작성하는 게 편할 것 같네?"
"아 그런가요? 지금은 그냥 엑셀에 수동으로 입력해서 계산하고 있어요. 파이썬을 잘 몰라서.."
"그래? 지금은 구글, 애플 같은 몇 가지 증권만 하니 그게 가능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커버하는 몇 천 개 주식을 전부 하려면 미리 자동화된 모듈로 만드는 게 좋을 거야. 아 저는 치킨 덮밥에 핫소스 추가로 주세요."
"아, 한번 공부해볼게요. 저는 반반에 화이트소스 많이요."
"만약 자동화가 된다면 IT 회사랑 에너지 회사랑 최적 주기 차이가 있는지도 분석해줄 수 있겠어? 요즘 내가 그것 때문에 맨날 돈을 날려서 말이야."
오히려 사무실에서 질문을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면 다들 바쁜 업무 때문에 장이 끝나기 전까진 몇 마디 하기도 힘들었다. 때문에 인턴이었던 나는 점심시간을 최대한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실적이 최우선이라는 트레이딩팀이었지만 사내 정치나 가십 또한 중요한 이슈다. 정치적 이유로 한순간에 팀이 사라지거나 좌천될 수도 있다. 점심시간에 무리에 끼여서 주문을 하고 있으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을 수 있었다. 새로 온 헤드가 실적에 굉장히 민감하다던가 다른 부서와의 통합을 추진한다는 둥, 이번 성과급을 개발자를 포함하여 기여도에 따라 나누는데 기여도 기준이 굉장히 주관적이라는 둥. 옆 팀에 새로 온 디렉터가 다른 은행에서 가차 없이 자르기로 유명한 사람이라던가.
물론 그 당시 아직 인턴인 나는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그다지 영향이 적어서 대부분 재미로 흘려 들었다. 먼 훗날에 커다란 정치 싸움에 휘말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지만 말이다.
그저 매일 점심을 먹는 것인데도 치열하게 네트워킹하려는 모습이 어찌 보면 삭막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따로 점심시간을 할당하지 않는 미국식 회사의 문화는 아마도 점심시간도 업무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는 암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뭘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