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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용진 Oct 07. 2016

뉴욕 직장 생활 - 4. 첫 프로젝트

첫 단추는 앞으로의 커리어를 결정한다

 


어느덧 첫 출근을 한 지 2주가 되었다. 인턴이니까 조금 빨리 출근하려고 일찍 나오지만 도착할 때 즈음 너무 졸려서 스타벅스에 나도 모르게 들어간다. 뉴요커들이 커피와 베이글을 들고 시크하게 걷는 것이 멋 때문이라 생각하였는데, 살아보니 커피 없는 아침은 상상하기 힘들었고 베이글은 바쁜 아침에 가장 빨리 나오는 메뉴였다. 커피와 베이글을 키보드 앞에 두고서 로그인을 하면 하루가 시작된다.


적응이 되어서 능숙하게 서버에 접속해서 거래와 뉴스 데이터를 정리하여서 상사와 트레이더들에게 메일로 보냈다. 하루 동안 얼마를 벌었는지 수수료는 얼마인지 계산하는 작업은 단순하였지만 처음에는 데이터베이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서 한참을 헤매었다. 데이터베이스 명령어들도 하나도 몰라서 업무시간의 80%는 구글과 함께 하였다. 구글이 없던 시절에는 과연 어떻게 일을 하였을까? 데이터 정리가 끝나면 시간이 많이 남아서 상사가 추천해주었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 장 마감 후에 전체 회의가 있겠습니다



 우리 팀은 2주마다 팀 회의라는 것을 한다고 한다. 각자 맡은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논의하는 시간이다. 회의 게시판에 자신이 2주간 한 일을 업로드해놓으면 인쇄해서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나는 보고서 이외에는 딱히 한 일이 없어서 고민 끝에 '적응'이라고만 적어뒀다. 나의 상사 마이클은 그저 편하게 듣기만 하라고 하며 씩 웃었지만 모든 팀원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 행여나 실수할까 봐 긴장되었다.



5시가 다되어가자 서로 맛집이나 최신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나둘씩 회의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모이자 매니징 디렉터(부장)인 사로지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자 오랜만에 모였군요, 먼저 최근 실적에 대한 리뷰를 해볼까요? 야오씨 부탁합니다."



사로지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은 25살 어쏘(대리)급 중국계 트레이더인 야오에게 쏠렸다. 프린스턴 수학과를 졸업한 그는 팀의 활력 담당이었다. 그는 언제나 유쾌한 농담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티비 뉴스를 크게 틀어서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였다. 캐주얼한 정장 차림에도 항상 머리 위에 뉴욕 양키스 스냅백을 써서 악동 같은 이미지를 주기도 했다. 트렌드에도 민감하여서 팀원들이 강남 스타일이나 할렘 쉐이크 같은 최신 유행 문화에 대해 모르면 아재라고 놀리면서 가르쳐주었다. 팀원들, 특히 사로지가 그의 말을 굉장히 신뢰하고 경청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의 농담기가 가득 찬 얼굴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2 페이지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번 달은 지난 3년간 트레이딩 실적 중에 가장 최악이에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거래량 감소가 가장 눈에 띄네요. 그리고 거래 성사 비율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저희 정도의 속도를 가진 소규모 경쟁사들이 증가했다는 의미겠죠. 이제 옵션 업계도 불모지가 아닙니다. 이대로 가다간 팀 장사 접는 건 시간문제예요!"


화기애애하였던 회의실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투자 은행 조직은 실적에 굉장히 민감하다. 조금만 실적이 떨어져도 팀이 사라지거나 재조정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사한 지 하루 만에 직장을 잃는 울프 오브 월스트릿 영화와 같은 일이 실제로도 꽤 벌어진다. 심지어 사로지도 평점심을 잃고 표정이 좋지 않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분, 이렇게 침울해있는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여러분은 베테랑들 아닙니까? 이 바닥은 원래 업다운이 있는 곳입니다. 중요한 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냐는 것이죠. 게다가 5월은 원래부터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되면서 거래량이 급감하는 때입니다. 힘들 내시죠."

이내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둘씩 박수를 쳤고 활기를 되찾았다. 나에겐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만약 한국 회사라면 나랑 또래인 사람이 감히 하늘 같은 선배들 앞에서 저런 호통을 칠 수 있을까? 야오는 나와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의 리더십에 대한 내공의 차이가 느껴졌다.

"제 생각엔 기존의 시스템에 비효율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그동안 회의 때마다 언급되었지만 현재 거래에 급급하여서 추후로 미루고 해결하지 못하였죠. 이제는 그런 부분에 대한 장기적 해결책을 강구해 나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사로지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맞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거래 품목을 늘리며 성장을 거듭했지요. 처음 팀을 결성한 뒤로 독자적인 인프라를 구축했고, 인덱스*, 구글, 애플 옵션 등등으로 시작해서 점점 많은 주식에 대한 파생상품을 거래하였죠. 이제 거의 모든 종류의 주식 옵션을 거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옵션 종류를 확대하는 것만 가지고는 성장 원동력이 없어요. 아직 인프라에 부족한 부분도 많고 리서치도 걸음마 단계이니 다양한 프로젝트로 이러한 부분을 성장시키는 것에 대해 논의해봅시다. 먼저 올라프, 프로젝트 경과보고 부탁드립니다."

(*인덱스 : 시장 전체에 대한 지표를 수치화시킨 것)



러시아계 시니어 인프라 프로그래머인 올라프가 프로젝트 논의의 스타트를 끊었다.


"기존 방식은 데이터를 옮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효율적이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데이터베이스와 가격 계산 시스템을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기존 방식은 XX 회선을 이용하여 두 시스템 간의 시간 차이를 최소화하려 했으나 YY 상태에 대한..... 블라블라"


여러 가지 전문 용어와 축약어들이 난무하여서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생의 장그래가 된 것처럼 열심히 축약어들을 받아 적어서 나중에 검색해야겠다 생각하였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그런 식으로 하면 어느 정도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나요?"


"대략 20-30% 정도의 속도 향상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가격 계산 시스템이 예전과 동일하게 작동되는지 확인하려면 두 결과를 비교해야 합니다. 이 작업이 대략 한 달 정도 소모될 것 같습니다. 올레그와 굽타와 함께 진행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다음은 알프레드 씨."


"저는 저번 달부터 시작한 한국 옵션 시장인 KRX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 옵션 시장은 거래량이 세계 1위라서 굉장히 쏠쏠한 수익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모델로는 적용이 안 되는 점이 많아서 조정이 꽤나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략 한 시간 반 정도 이어진 회의 시간 내내 전문 용어들을 받아적느라 여념이 없었다. 회의 내용의 70%는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대략적으로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 감이 오기 시작하였다. 회의가 끝나고 녹초가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프로젝트에 대한 의욕이 불타올랐는지 더욱 열심히 타자를 두들겼다. 가만히 그들의 의욕 넘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나도 어서 저 사람들처럼 열정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친 상태로 의자 등받이에 파묻혀 회의시간을 되새기고 있었는데 나의 상사 마이클이 갑자기 내 옆자리 의자를 끌어당기며 앉더니 말을 걸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정자세로 고쳐 잡고 인사하였다.


"YJ, 첫 회의는 어땠어?"


"아, 안녕하세요! 전문 용어가 너무 많아서 정신없었지만 신기했어요. 지금 열심히 검색해보는 중이에요."


"아아, 그건 나중에 이메일로 보내주면 정리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나저나 내가 슬슬 첫 프로젝트를 줄까 하는데.."


"물론이죠! 말씀만 하세요."


"델타 헤징이라고 들어봤니?"


"아... 네! 금융 수학 시간에 배웠어요. 파생 상품을 살 때 기초 상품을 일정 비율 사서 위험을 줄이는 것이죠?"


조금은 가물가물한 수업시간의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을 하였다.


"맞아. 이 델타 헤징을 우리가 주기적으로 하는데 이 주기를 몇 배로 더 자주 하게 바꿔볼 생각이야. 요즘 시장의 움직임이 심해서 조금의 리스크로도 큰 손해를 보거든. 이 주기를 2배 3배 바꿔가면서 거래 비용을 측정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볼 수 있겠어?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주기를 결정하는 리서치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처음으로 간단한 보고서가 아닌 프로젝트 일을 한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었다. 학교나 책에서 듣기만 한 것들이 내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머리 속에 드는 걱정도 있었다. 혹시나 마이클이 컴퓨터 공학을 공부한 나의 배경 때문에 거래 분석 일보다는 프로그램 개발 일만 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사실 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퀀트가 되어서 큰돈을 벌려면 자신이 직접 만든 나만의 알고리즘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브랜드를, 개발자가 자신의 애플리케이션을, 셰프는 자신의 식당을 꿈꾸는 것과 비슷하다. 나만의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직접 거래 알고리즘을 만들려면 굉장한 스펙이 있거나 풍부한 리서치 경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돈을 운용하는 것은 민감한 사안인 만큼 아무에게나 그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선배들의 이야기나 게시판을 보면 많은 회사들이 직원에게 리서치 기회를 줄 것처럼 이야기하고 개발이나 데이터 관리 보조만 시키다가 시간이 흘러서 보조 전문가로 안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인턴일 뿐이니까 정규직으로 전환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맞다. 들어온 지 고작 2주 된 인턴이 무슨 자기 알고리즘 타령이라니 얼마나 우스울까.


"아아, 음... 물론이죠! 제가 한번 해볼게요."


그러나 나의 미묘한 대답에서 마이클은 무언가를 읽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뭔가 궁금한 점이 있구나?"


아.... 어떻게 할까? 사실 한국적인 생각으로는 박사도 아닌 내가 리서치 관련 일도 하고 싶다고 하면 우스워질 수도 있다. 마치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라고 뽑아놨는데 요리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하는 꼴인 것이다. 괜히 욕심만 많은 사람으로 찍혀서 정규직 입사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말은 꺼내보기로 결심했다.


"마이클, 면접 때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언젠가 알고리즘을 직접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리서치 관련 일을 많이 하고 싶은데 제가 그런 쪽 배경이 모자라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프로그램 개발 후에 분석 프로젝트에도 저를 참여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이야기를 마치자 5초 정도 정적이 있었다. 어찌 보면 작은 부탁일 수도 있는데도 일탈을 고백하는 사춘기 소년 마냥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윽고 마이클이 입을 열었다.


"아.. 난 네가 개발 경험만 있어서 거래 분석에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이야기 안 해줬으면 계속 몰랐을 거야. 당연히 리서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이 생기면 더 좋지. 짜오가 원래 분석을 하기로 했는데 함께 하면 좋을 거 같아. 앞으로도 원하는 프로젝트나 아이디어가 있으면 이렇게 이야기해줘!"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열심히 하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은 굉장한 모티베이션을 주었다. 확실히 미국 생활에서 느낀 것은, 식당이든 학교든 여행사든 내가 필요한 것을 직접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게시판에 있는 사람들처럼 계속 보조만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마이클은 옆에 앉아서 기본적인 코드의 구조를 설명해주었다. 코드 파일 수가 수백 개가 되었고 수십만 줄이 넘어서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이클은 '너는 뭐 프로그래밍 잘 하니까 금방 이해할 거야!' 이러고 어깨를 툭툭 치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은 6시가 되었지만 흥분과 설렘 때문에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패기 있게 먼저 코드를 컴파일* 해보았다. (컴파일 : 코드를 실행 가능 상태로 바꿔주는 명령). 에러가 280개가 떴다. 코드에 오류가 있을 리는 없으니 내 설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요리조리 설정을 바꿔본 다음에 다시 컴파일을 하였다. 에러가 570개가 되었다. 괜스레 화가 났다.


학교 다닐 때 쓰는 간단한 코드들은 조금씩 손 봐서 고치면 되었지만 이 거대한 코드 덩어리에서 어느 부분이 오류가 나는지 도저히 알아내기 힘들었다. 몇 시간 만에 특정 라이브러리가 내 리눅스 계정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라이브러리를 설치 한 다음에 설정을 하고서 다시 컴파일을 하였다. 원래 오류는 사라졌으나 다른 종류의 에러가 120개 새로 생겼다. 한참을 컴파일러와 씨름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실행 가능상태로 만들었다.


시계를 보았더니 벌써 밤 10시다. 주변을 돌아보니 창문 바깥은 새까맣고 텅 빈 사무실에는 프린터가 사각사각대는 소리 외에는 남지 않았다. 가방을 챙겨서 밖을 나오니 타임스퀘어에는 약간 취한 사람들이 왁자지껄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야근을 했지만 기분은 오히려 상쾌하다. 처음 입사했을 때 보다 뭔가 더 진정한 금융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일 빨리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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