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취준생에게
미국에서 입시와 취업,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국과의 차이를 꼽으라면 굉장히 많지만, 요즘 느끼는 큰 차이 중 하나는 경험에 대한 인식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그 사람이 가진 경험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디를 여행했다.
어떤 봉사를 하였다.
어떤 실패를 하였다.
어떤 병이 있었다.
어떤 사람과 연애하였다.
이런 객관화된 경험들은 데이터화 될 수 있고 절대 비교가 가능해지면서 '스펙'이란 이름이 된다. 더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더 많은 봉사를 하고, 더 적은 실패가 있고, 더 건강한 사람이 비교 우위가 되는 것이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같은 사람이 된다. 그런 상황이니 자소서보다는 자소설이 난무하고 더 많은 스펙을 위해 경쟁하고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뭐든지 수치화하는 아시아 문화권의 특징 때문일지도 모른다. 학교마다 너무나 특징이 다른 미국 학교에서도 전적으로 순위에 의해 선택하고 게시판에서 항상 순위 싸움을 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 같다. 같은 학교라도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경험은 천차만별인데 말이다.
헛 산 것 같다
얼마 전 나의 절친 중 하나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 친구는 항상 특이하였다. 고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쓰는 란에다 '해적왕'이라 쓴 뒤에 자신은 세계 정복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사람들이 비웃을 때 직접 보여줄 것이라며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장학금을 받고서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이 연구원이나 대기업 취업을 준비할 때에도 자신은 해적왕이 되겠다고 외쳤다.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본에 돈도 없이 배낭만 메고 가서는 몇 개월 뒤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평범하게 진학을 해서 연구자가 되면 병역도 연구소에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세계를 돌아봐야 한다면서 해군으로 들어가서 일부러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았다. 졸업하고서도 크루즈 회사에 들어가 세계를 돌면서 모험을 즐겼다. 크루즈 회사에서는 4개 국어와 학벌도 좋은 인재가 왜 지원을 하냐며 되물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그는 회사 생활을 고사하고 세계를 잇는다는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였다. 그의 인터넷 아이디는 여전히 '모험왕'이었다. 이 친구의 모험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전부터 도전을 중요시하던 아버지의 모습과 실패해도 경험으로 삼으라던 어머니, 그리고 이 친구의 실천이 나를 미국으로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던 그가 취업준비생이 된 뒤에 여러 가지 기업 입사에 실패하고서 저런 놀라운 말을 한 것이다. 제대로 된 기술도 없고 스펙도 없다면서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었다며 후회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미국적인 생각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최고의 공대를 나와 외국어 능력도 출증하고 해외 경험도 많으며 도전정신이 있고 창업 경험까지 있는 인재가 수많은 낙방을 거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말은 더더욱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와 오랫동안 대화를 하고 나서야 왜 그런 말을 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그의 말은 결국 자신의 경험을 나열했을 때는 아무런 성공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고 전문성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창업에 실패하고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움직이며 도전한 사람이 기술조차 없으면 어느 회사가 좋아할 것 같냐고 반문하였다. 맞다,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하면 그렇다. 그러나 그 보다 중요한 건 그 경험을 통해서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스펙과 실력 모두 중요시한다. 내가 월스트리트에 처음 입사할 때 신입사원의 반이 아이비리그나 최상급 명문대 출신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스펙 만큼이나 경험에 의해서 이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도 굉장히 중요시한다. 단적인 예로, 실패한 창업 경험으로 배운 것이 많다면 굉장한 스펙이 되며 한국에서 평생 차별한다는 편입생도 미국에서는 도전한 사람으로 동등한 대우를 한다.
어디 학교를 다니면서 어땠는가?
어디를 여행할 때 무엇이 좋았는가?
어떤 봉사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어떤 실패가 인생에 무슨 변화를 주었나?
어떤 병을 겪으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왔는가?
어떤 사람과 연애하며 자신에 대해 어떤 점을 알았는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
모든 것을 종합하면 너는 어떤 성향의 사람이냐?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그 사람의 가치관과 목표, 성향 등을 알 수 있게 된다. 한국에서 면접이 대부분 문제를 주고나서 풀게 하는 시험형 면접이 많은 반면 미국에서는 그저 방 안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면접이 많은 이유도 비슷한 이유일 것 같다. 내가 면접관이 되어 면접을 진행하면서 항상 했던 첫 질문이자 미국 회사 면접에서 항상 나오는 첫 질문이 '자기소개를 해보세요'인데, 많은 수의 한국인 학생들은 자신의 객관적 경험(스펙)을 나열하였다.
저는 AA학교의 BB과를 나왔습니다. CC봉사활동과 DD인턴쉽을 통해 금융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그러나 외국 학생들이나 일부 한국 학생들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학교 생활에서, 교우 관계에서, 여행하면서, 자신이 어떤 실패와 성공을 하고 어떤 성장을 하며 이 면접까지 오게 됐는지 알려주게 된다. 물론 전자의 사람이 무조건 불합격하고 후자의 사람이 합격한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회사나 학교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야 하는 단체이고 더 부합하는 사람을 뽑는다. 그러나 다양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성숙함과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중요시하지 않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온 유학생은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다른 아시아계 유학생에 비해 현지 취업에 실패하는 비율이 많다. 사람들은 주로 네트워킹 부족이 가장 큰 이유라지만 나는 위와 같은 인식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 해서 발생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려 하기보다 성적과 스펙을 최대한 쌓으려고 한다. 실패는 최대한 숨기고 성공을 부각하는 완벽한 이력서를 만든다. 덕분에 한인 취업 게시판을 가보면 스펙 부족을 원인으로 생각하며 한국에서처럼 자격증을 더 추천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내 친구도 이러한 '스펙'을 나열하다 보면 전문성이 없고 짧게 일하는 철새와 같은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도전정신과 모험은 쏙 빠진 채 말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똑같은 학교 똑같은 경험을 했어도 다른 사람이며, 매일매일 겪는 일들로 인해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어 간다. 여러가지 실패와 결함이 있었던 기계는 하자가 많은 기계겠지만, 수많은 경험들과 그것들의 연결고리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표현할 것이다.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실패한 것이라도, 시간 낭비해서 돌아간 것이라도 상관없다.
내가 믿는 것이 하나 있다면, 값지지 않은 경험은 없다.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경험들이 한 부분이 되어 '나'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은 조각이 될지 나쁜 조각이 될지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성찰이 결정해 주는 것 같다.
게임에 빠져있던 나의 학창 시절 덕분에 나는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게임을 더 잘 하기 위해 크래킹 해서 만든 자동 매크로로 자동화에 대해 무의식 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천재들 사이에서 좌절했던 경시 시절은 겸손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질문의 수치스러움을 잊게 해주었다. 한국 입시에서의 불만족은 나를 미국으로 이끌었다. 처음 정착한 미국 시카고에서 한 학기 동안 아저씨 아줌마와 컴퓨터 수리공 수업을 들으며 미국인들의 문화를 배웠다. 그때 한국에서 함께 온 형 누나들과 밤을 새 가며 여행하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당시 여행 다니며 온 동네의 역사를 배운 후에 나는 평범한 프로그래머 대신 금융권 직업을 가지기로 마음먹게 된다. 다시 대학 입시를 준비했고 나는 남들보다 2년이 늦어지게 된다. 이 중에 단 하나의 실패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같은 곳에 있었을까? 면접을 볼 때의 내 객관적인 사실만 나열하면 그저 매번 실패하고 나이만 더 많은 평범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재밌게도 이렇게 경험과 느낌을 나열하는 것 만으로 훌륭한 자기소개서 초안이 된다.
물론 이 글 또한 진부한 자기소개서나 면접 잘 하는 따위의 글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면접이나 취업을 떠나서, 당신이 지금까지 겪은 모든 것들은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비록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당신의 모험, 실패, 좌절이 분명히 언젠가 다른 사람과 다른 '나'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남들보다 느리다고, 뒤쳐졌다고, 돌아간다고 걱정하지 말자. 물론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배웠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그것을 통해 생각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모험왕의 도전정신을 존경하고 그렇게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좀 더 용기를 내어 믿고 나아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