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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eways May 22. 2019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 (상)

대한민국의 인종주의와 '악의 평범성'


1. 한국의 인종주의(Racism)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한 대학도시 더니든에서 두 달 간 생활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2019년 2월 5일 화요일, 동남아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평소보다 말도 적게 하며 오직 밥에 집중한 편이었는데, 혼자 상념에 빠져있다가 사고가 문득 자기반성으로 흘렀다. 인종차별에 관한 생각이었다. 이곳에는 동남아나 태평양 섬나라 친구들이 많이 있다. 태국, 필리핀, 홍콩, 그리고 우리가 이름도 잘 모르는 OO제도 등지에서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이 되면서 뉴질랜드로 건너오는 학생들이 많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국어는 물론 영어, 나아가 제2외국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특히 필리핀은 모국어가 애초에 영어다. 친구들의 외양은 흔히 우리가 ‘동남아인’이라 분류하는 사람들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 생각과는 달리 전 세계 문화에 무척 개방적이고, 특히 영미권의 문화에는 정통하기까지 하다. 오타고 대학교는 의학과나 법의학과, 생물학과 등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그 분야를 공부한다. 한마디로 '똑똑한 영어권 고급 인재'들이다.

문득 생각했다. 이 친구들이 양복이 아닌 평범한 차림으로 한국을 방문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한국인의 십중팔구는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눈을 흘길 테고 누군가는 경멸 섞인 눈빛으로 째려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까무잡잡하고'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가난하고 무식한 외국인 불법 노동자라 막연히 여기기 십상이다. 그들 '개인'이 어떤 사람인가는 우리의 관심 밖에 있다.

이런 고정관념을 우리는 흔히 ‘인종주의’내지 ‘인종차별’이라 부른다. 1700년대 중반 미국 건국 시기 이주민이 인디언을 학살할 때도, 나치가 순수 아리아 민족 혈통을 지향한답시고 유대인을 학살할 때도,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남부 백인이 흑인을 경멸하며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을 통과시켜 인종 간 생활공간을 분리할 때도 그 기저에는 인종주의가 자리했다. 지금은 미치지 않고서야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 않는 그 인종주의 말이다.

우리나라는 제국주의의 주체가 아니라 피해자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인종주의는 극도로 배격당한다. 한국사람 대다수는 스스로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믿는다. 인종주의를 내포한 언행을 목격하면 집단적으로 비분강개한다. 국제스포츠대회에서 한국인 선수를 보며 손가락으로 눈을 찢는다거나,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버드맨)에서 주인공이 “Fxxxing Kimchi(씨X, 김치!)”를 외치면 다함께 몰려가 규탄하고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여러 실험결과는 한국인이 무의식적으로 인종주의를 답습한다고 보고한다. '흑인과 백인에게 길 알려주기' 실험이 유명하다. 길을 가다가 백인과 흑인이 다가와 길을 묻는다. 한국인 대다수는 백인에게는 기꺼이 길을 알려주려 노력하는 반면, 흑인에게는 잘 모른다고 둘러대며 바쁘게 떠난다. 동남아 사람에게 우리는 더 냉담하게 굴며, 중동이나 남아시아(인도, 파키스탄) 계열 사람이 옆자리에 앉으면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이는 명백한 인종주의 풍토다.

친구들과 인종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종종 우리나라의 경우를 소개해야 할 때가 있었다. 선뜻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려웠다. “It's funny to say, but there is Racism in Korea(말하기 우습지만 한국엔 인종주의가 존재한다).” 내 대답이었다. 우리 그룹은 인종주의와는 거리가 먼 백인이 대다수를 이룬다. 친구들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대강 설명해주니 안타깝다는 듯 눈과 입을 찌푸렸다.


2.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과 인종차별
현대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라는 저서에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 나치 부역자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 아르헨티나에 도피해있다 발각되어 유대인의 성지 이스라엘로 끌려왔다. 유대인 학살의 죄를 묻기 위해 예루살렘 법정 앞에 그를 세웠을 때, 그는 평범하게 생긴 쭈글쭈글한 노인이었다. 말하는 방식도, 내용도 평범했다. 그저 한 사람의 공무원으로서 위에서 하달한 명령을 수행하는 중에 아우슈비츠 독가스실로 유대인을 이송했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지점에서 악의 본질을 포착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렇게 썼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따라서 현실 자체로부터 격리시키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제3장)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제15장)


나는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해 말한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악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후기)



결국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태도를 갖추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악을 확산시킨다고 한나 아렌트는 주장한다. 물론 아이히만이 소극적 관료가 아니라 적극적 부역자였다는 점을 아렌트는 놓쳤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역사나 법률이 아니라 정치사상적 의미에 초점을 두는 만큼, 우리도 그에 맞는 교훈을 찾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며 다른 세계를 외면하는 평범한 사람들, 아렌트는  우리를 묘사하는  아닌가 싶다.


나는 대한민국의 무의식적 인종차별이 ‘악의 평범성’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동남아나 중동, 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저임금 블루칼라 직종에 종사하며 범죄를 수도 없이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토종 한국인’도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거나 제도의 빈틈을 찾아 들어오는 불법외국인노동자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감싸안기 위해 별다른 조치를 취한 적이 없다. 어떤 정치인도, 어떤 사회운동도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저 ‘옥에 티’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차별과 범죄의 온상으로 방치해둘 뿐이다.


그들의 삶은 실제로 어떠할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 (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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