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없는 민주주의 이후, '악의 평범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3.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최장집 교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2013)에서 현장을 탐사하며 외국인노동자들이 왜 범죄로 내몰리는지 고발하고 한국 사회를 비판했다. 그들은 ‘불법노동자’이지만 고용자는 ‘합법 한국인’이다. 불법으로 들어온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한국 고용주들은 그 상황을 신나게 악용해왔다. 따라서 한국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정치권이나 공무원들에게 골칫덩이에 불과하다. '한민족' 정서가 강한 우리나라 국민들 앞에 이런 문제를 대령해보았자 좋은 소리는 얼마 못 듣는다. 당장에 노인실업이나 청년실업, 정규직-비정규직 갈등 등, 우리 국민끼리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태산처럼 쌓여있다. 어디 그뿐인가, 이 문제는 외교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아주 복잡해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해결할 수 있다. 때문에 누구도 쉽사리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보겠다는 마음을 안고 달려왔겠지만, 무관심 속에 서서히 골칫덩이로 전락한다. 고용주나 한국인 노동자들로부터 임금체불, 가혹행위가 발생해도 ‘불법적 신분'이라 구제받을 길은 없다. 달동네나 판잣촌 정도의 열악한 환경에서 겨우 연명해갈 수밖에 없다. 현실에 불만이 생기니 서로 치고받는 일도 잦아진다. 다툼은 왕왕 폭행이나 살인으로 비화한다. 결국 불법이 불법을 낳는 악순환이 연출된다. 이들의 방황은 우리나라 사회취약계층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골칫덩이 외국인'이 아니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특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취약계층'일 뿐이다.
최장집 교수는 우리나라가 유럽의 계급정당 모델을 도입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주의나 노동조합이 크게 발달한 만큼, 유럽에서는 노동자 계급만을 별도로 대변하는 정당이 무수히 많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보수당(Conservative Party)과 노동당(Labour Party) 양당이 경합을 펼친다. 독일은 당의 수가 훨씬 많지만 그만큼 의제나 이념의 스펙트럼도 광범위해 다양한 계층과 계급을 포괄한다. 대표적으로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약칭 SPD)은 영국 노동당과 함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주도하고 있다. 최 교수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정당들은 유럽 정당들에 비해 취약계층을 지나치게 간과한다. 선거철만 되면 각 당이 '중원'을 장악해 더 많은 표를 끌어들이려 하다보니, 유럽 정당들처럼 우직하게 한 의제에 몰두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 이론적, 현실적 이유로 그의 제도적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의식 자체에는 격렬히 공감한다. 우리는 ‘괜히 골 아파진다’고 불평하며 문제를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방치해두거나 악화시킨 편견이나 차별은 그대로 소비한다. 그리고 다시, 서구 문화권에서 자행하는 편견이나 차별에는 격분한다. '선택적 분노'라는 말은 이럴 때 가장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정치권에서도, 사회 전체에서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한국 전체는 ‘악의 평범성’에 빠져있다. '우리 안'의 문제는 맞지만 '우리에게' 가해지지는 않으니 모르는 척하자는 편집에 취해있다. 독일에서 이 행태가 거대하게 폭발했을 때,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했다.
4. "한국인에게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는 독일의 반공주의자이자 반나치 목사였다. 공산주의를 타도하겠다고 일어선 히틀러와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을 처음에는 지지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국가와 민족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시민의 자유를 억압해가자 소련 공산주의와 다를 바 없어졌다며 반나치 운동가로 전향했다. 그는 반나치운동을 하며 수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 <처음 그들이 왔을 때First they came> 혹은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이름의 시로 각색된 아래의 발언이 가장 유명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진실로 한국에는 인종주의가 만연해있다. 수많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살아간다. 동남아, 중동 계열의 사람들은 특히 노동자로서 일한다. 그들은 인종차별을 일상적으로 겪는다. 흑인들도 마찬가지다. 인종차별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간다. 그들의 모습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눈 찢어진’ ‘칭챙총’이라고 놀림을 당하거나 외국인들 사이에서 괜스레 위축되는 한국인의 모습과 똑 닮아있다. 우리는 우리가 극도로 경멸하는 행동을 그들에게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는 격이다.
이대로는 우리가 겪은 고통도 치유받을 수 없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며 강제징용 피해자나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외친다. 나아가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전 세계에 퍼져있는 동북아시아인의 인권을 보호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내부의 문제도 똑바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호소를 누가 귀담아 들어주랴.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에게 우리는 도리어 돌팔매질을 했다. 그래도 우리를 위해 말해줄 이가 남아있을까? 우리는 씁쓸한 뒷맛을 다시며 스스로 이렇게 조소할지 모른다.
“한국인에게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5.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
닐 맥그리거가 쓴 <독일사 산책>(2016)에는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라는 판화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한다.
콜비츠는 기독교 전통의 고통 이미지를 이용하여 구조적으로 불공평한 사회가 빚어낸 결과를 탐구한다. ... 콜비츠는 함께 어울려 살던 노동자 계층의 삶과 고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여성의 역할과 책임에 몰두했다. 콜비츠는 1941년 이런 글을 남겼다.
“남편에게 몇 차례 도움을 받으며 자연스레 알게 된 여자들이 있다. 나는 노동자들의 운명과 삶의 방식에 관련된 모든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처음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일에 마음이 끌렸을 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동정과 위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 주된 동기였다.”
반추해보면 나도 그동안 한국이라는 좁은 우물에 갇혀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재생산해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적지 않은 수의 외국인을 만나며 관점도 많이 변했다. 그들의 삶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고귀하고 아름다워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모든 한국인이 여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한다. 특히 더 열린 마음을 갖고, 더 많은 사람을 우리 공동체로 감싸안아주면 좋겠다. 모두 함께 거창한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구호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단지 다수가 문제를 '인지'하기만 해도 세상을 진보시킬 동력이 충분해진다고 믿을 뿐이다.
그러나 그 '진보'가 결코 ‘하급자’에 대한 동정과 위로를 연료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온정주의와 압제는 한끗 차이다. '위계'에 기대기 때문이다. 상급자가 선심 쓰듯 하급자를 잘 대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평상시에는 따뜻하게 잘 해주는 아버지도 어느 순간에는 가정폭력의 원흉이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선행을 하듯 우리 사회 취약계층을 돌보려 들면 곤란하다. 우리는 위계의 상급자로서가 아니라 대등한 인격체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를 '악의 평범성'으로부터 깨어나도록 해줄 것이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