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마 Nov 16. 2019

프랑스인 한국 모델이 말을 걸었다

영국여행 . 작품을 통해서 내 부족함을 알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시죠? 제가 사진 찍어드릴까요?"


분홍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외국인이 정확한 발음의 한국말로 우리에게 말했다. "어머,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어떻게 한국말 배웠어요?"로 시작해서 대화는 무르익어 갔다. 프랑스인이며 한국에서 모델 일을 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드라마에도 출연을 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연예인을 영국에서 만나니 신기했다.


그녀는 친절했고 바로 화연이 페이스북 아이디를 묻고 친구 맺기를 하였다. 화연은 영국에 올 때마다 외국인 친구를 한 명씩 사귀게 되었다며 즐거워하였다. 계속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모델의 어머니가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와서 이전에 몰랐던 사람을 만났고 예술 작품도 새로 만났다.  


테이트 모던에서 명하거나 그렇지 않은 여러 작품 사진을 찍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하여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부터 자꾸 생각나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 작품의 작가와 제목을 모른다. 이렇게 마음에 오래 남을 줄 알았다면 더 자세히 보고 작가와 작품의 이름을 알아올 걸 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는 그냥 '좋구나, 이렇구나!' 하였다.  


며칠 전에는 마치 사춘기 때 몰래 짝사랑했던 사람을 알려고 하는 심리와 흡사하게 행동하였다. 작품에 대해 아무것도 정보가 없으니 더욱 아쉬웠다. 마음이 쓰여 정보를 알아보려고 밤새 테이트 모던 사이트를 뒤졌다. 열심히 검색하면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등과 어깨, 팔다리가 저려올 때까지 컴퓨터를 잡고 있게 되었다. 정말 조금만 더 하면 찾을 것 같았기 때문에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찾기를 포기하였다.    


"어제 바보짓을 했어요."


다음날. 피곤에 절고 감기 기운까지 있어 눈이 쾡해진 얼굴로 친한 옆 동료에게 말했다. 더 서글펐던 건 어젯밤의 무모한 행동이 마치 현재 나와 같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는, 하지만 노력하면 능히 해낼 것 같은 느낌에 몸을 혹사하고 있는 지금의 내 상황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작가와 제목을 모르는 작품 찾기는 나에 대해 또 한 가지를 알게 했다. 나의 행동 패턴을 다시 일깨워 준 것이다. 나는 어떤 일이 생긴 그 순간에 나의 마음 상태를 알지 못한 적이 많다. 그 상황에서 '그렇구나.' 생각하고 지나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지나간 사물이나 사람이 계속 생각나는 것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 그 일과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졌는데 말이다.


이제껏 그런 일이 있을 때 나의 행동은 이렇다. 타이밍을 놓친 일과 사람에 대한 감정을 가슴속으로 삭히고 결국 포기하거나 묻어버리곤 했다. 이번 작품 찾기는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이런 나의 행동 패턴을 또다시 깨닫는 느낌이었다.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는 좌절감이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여기에 쓰기로 하였다. 그때 작품에서 보았던 나의 감정을 잡지 못하고 흘려보냈다면 지금 나의 커진 감정 글로 써서 표현하고 싶었다. 이제 나의 느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라도 하는 것일까. 놓치고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작은 몸부림일까. 상대(작품)어떠하든 그냥 들이대 보련다. 나중에 보면 부끄러워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왜 이 작품이 마음에 오래 남았을까?


화두처럼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나무나 풀, 꽃 등 자연물을 좋아하고 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면 산이나 주변의 공원에 간다. 시간이 없으면 주말에 아파트 안에 있는 벤치에서 바람을 쐬거나 햇볕을 쬐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러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고 활력이 생겼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그것이 만들어내는 무늬까지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여 편한 사람과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떠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는 시간이고 힐링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책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배울 점이 있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살아가는 방식들이 근사하다. 각자 처해진 환경에서 살아내는 것이 눈물겹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사람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었다. 작품이 여러 개의 칸으로 구성되었는데 나뭇가지에 색을 칠하고 붙여 놓았다. 한 칸에 나뭇가지 한 개에서 여러 개까지 붙여 놓았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아주 짧은 가지가 사람의 팔로 보였다. 긴팔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어서 여러 가지를 아우르고 있는 것도 있었고 팔이 아예 없는 것도 있었다. 가지의 휘어져 있는 방향이 관심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사는 모습으로 보였다.  


한 칸에 붙어 있는 나뭇가지의 개수는 모두 달랐다. 어떤 칸은 한 개가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8개가 있기도 하였다. 칸은 집이나 생활영역을 말하고 나뭇가지의 수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나 가족의 수를 나타낸 것 같았다. 1인 가구도 있고 여러 명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구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양한 가족형태나 생활방식을 말하는 것 같았다. 비정상인 생활방식이나 가족형태는 없으며 모두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뭇가지의 가운데 부분을 중심으로 띠처럼 주황, 빨강, 파란색 칠이 되어있었다. 마치 옷을 입혀 놓은 것 같았다. 색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무엇을 뜻할까. 사람들의 성을 말할까. 아니면 사람의 온도를 말할까. 체온이 아니라 정서적인 온도 말이다. 사람들은 파랑의 차가운 도시적 정서를 가지기도 하고 주황, 빨강과 같은 뜨거운 정서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영향을 받기 쉽거나 영향을 주기 쉬운 본래의 나무색을 가지고 있기도 다.


작품 맨 아래에 숫자를 써놓았다. 색을 칠하지 않은 가지 1, 주황색 가지 5, 빨간색 가지 10개, 파란색 가지 25라는 숫자가 있었다. 이 숫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숫자를 계산한 식과 그래프도 있었다. 색칠한 나뭇가지의 숫자를 이 만큼 했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았다.   


아직 이 작품에 대해 더 생각해 볼 것이 많고 숫자와 그래프의 의미 등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에 대해 아는 것도 있고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 어느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듯이 이 작품에 대해서도 다음에 볼 때는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의 감정에 더욱 충실하고 알아채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투명하고 진정한 감정에 대해 알고 행동하면 나중에 설사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더라도 아쉬움이나 후회스러움이 조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내 감정을 알았고 솔직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지나간 것에 대해 후회나 아쉬움이 없다. 이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테이트 모던'  사이트 사진 캡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