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비 오는 봄, 빗소리에 행복한 엄마
초등학교 때부터 빗소리가 좋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동네를 걸어 다녔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경쾌한 리듬감이 좋았다. 맑은 공기의 냄새도 좋았다. 마당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아침이면 늦잠꾸러기였던 나도 일찍 눈이 떠졌다. 한참 동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용히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에는 기분이 차분해졌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에는 속이 후련했다. 그 나이에 뭘 그리 답답한 게 많았을까.
중학생이 되어 집에 자전거가 하나 생겼다. 내가 타기엔 좀 큰 어른 자전거였는데 그 자전거를 끌고 온 동네를 다녔다. 그때 동네 오빠들 사이에서 별명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막 쏟아지는 비가 아니면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그때의 기분이란, 한 마디로... 째진다.
직장인이 되니 비 오는 날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침에 내리는 비는 그 어릴 적 보슬보슬 내리는, 반가운 비가 아니었다. 출근하고 싶지 않아서 이불속에서 더 뒹굴거리게 만드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였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내 우산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느라, 다른 사람의 우산이 내 옷을 젖지 않게 하느라 이마에 삼지창을 그려 놓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출근해서는 젖은 옷과 신발의 꿉꿉함을 오전 내내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여전히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좋았다.
비 오는 날 빗방울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은 한강이다. 한강 위로 흐르듯이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고 있자면 복잡한 세상과 단절된 듯한 단순함의 행복 속에 빠져 들었다. 그때 차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먹는 컵라면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환상의 조합이다.
오늘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딸은 비가 오니 장화를 신어야 한다면서 챙겨 신고, 둘이서 각자의 우산을 챙겨 들고 등원 길에 올랐다. 아이들은 비 오는 날은 첨벙거리고 비를 맞으며 마냥 신난다. 나는 조금이라도 젖은 옷으로 유치원에서 지내는 것이 걱정이라 마냥 좋지만은 않다.
"엄마, 나도 이제 빗소리가 좋아."
등원 버스에 오른 아들이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등원 버스가 떠나기 전에 나를 보며 나직이 말한다. 손으로 하트를 하고 손을 흔든다. 그리고 버스는 떠났다.
"엄마는 빗소리가 참 좋아. 어릴 때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빗소리가 정말 잘 들렸어."
언젠가 아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엄마가 되면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과 생각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잘한 것이 아이를 낳은 것이 되고, 자식을 위해 뭘 해주어도 아깝지 않게 되고, 낳는 것보다 키우는 정이라는 말을 알게 된다. 아이를 낳기 전에 그 어떤 것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가치 있는 날들을 보내는 이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듯한 육아와 집안일에도 매일 힘을 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순간들 때문이다. 감동이라는 말보다 더 큰 그 무엇.
아이들이 어릴 때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층간소음에 아이들의 뜀박질을 잡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오감으로 자연을 느끼는 순간을 더 많이 경험하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살면 비가 세차게 내리지 않는 이상 집안에서 빗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비가 오는 날은 습하고 어둑한 공기의 느낌으로 예측만 할 뿐이다. 그런 아쉬움도, 비 오는 등원 길의 번거로움도 무색하게 만드는 아들의 한 마디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다. 봄바다가 좋고, 봄비가 좋다. 부드러워서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봄에, 봄비가 내리는 날에, 선물 같은 한 마디를 남겨준 아들에게 참으로 고맙다.
아들에게 지금 느끼는 빗소리에 대한 기억이 오래도록 남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어 비 오는 날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빗소리에서 기분 좋은 리듬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