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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별바라기 Mar 22. 2024

작은 호의가 준 큰 선물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만큼의 일들을 짧은 기간에 순서대로 처리해 나간다. 그리고 더욱이 뉴욕의 레이스를 위한 연습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몸이 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욕심을 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뛴 네가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달릴 수 없애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 무라카미 하루키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살 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 책장에 이 책을 꽂을 공간이 있는지 생각하고, 분명 꽂을 공간이 없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사야 하는지, 그리고 이 책을 얼마나 오랫동안 책장에 보관해 놓을지.

나는 이미 빼곡한 책장을 보면서 '책을 빌려보자', '밀리의 서재에서 보자'라며 다짐하지만 결국 꼭 사서 내 책장에 꽂아 놓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런 책들은 이후로도 수십 년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이 책도 그런 책이다. 앞으로 이사를 몇 번을 해도 절대 처분되지 않고 함께 할 책이다. 

책을 사면 한 번에 끝까지 다 봐버리는 책이 있고, 아까워서 조금씩 아껴가며 보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아껴가며 보는 책 중 하나이다. 


아무리 아껴가며 읽는 책이라 할지라도 극한의 무기력 상태에서는 꺼내서 펼치고, 읽고, 잠깐 필사를 하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쉽지 않다.  

오늘 아침도 여전히 아무것도 하기 싫은, 아니 싫은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귀찮은, 극한의 무기력과 함께 시작되었다. 바닥까지 꺼져 있는 에너지를 끌어 모아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한껏 웃어주고 나니, 순식간에 온몸의 기운이 땅속으로 스며들려고 했다. 그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빨리 주차장에 내려가봐. 지갑을 주웠다고 연락이 왔어."

또 지갑을 잃어버렸고, 나는 그걸 몰랐다.


주차장에 가니 오며 가며 가끔 뵈었던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아파트 관리나 청소하시는 분이었다. 

"혹시 지갑...?"이라고 물으니 조심스레 내 지갑을 건네주셨다.

"혹시 그 안에 없어진 건 없는지 잘 보세요."라고 말씀하셨다.

없어진 건 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열 번도 넘게 하고 돌아섰는데 뭔가 아쉬워서 다시 그분에게 다가갔다.

따뜻한 커피라도 사 드시라고 5000원(그 지갑에 든 가장 큰 단위의 지폐)을 건넸으나 거절하셨다. 마음만 받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지갑을 찾아줄 때는 혹시라도 없어진 게 있어서 서로 곤란한 상황이 될까 봐 걱정이 많이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잘 안다. 무슨 말씀인지.

그래서 그분의 호의가 더 감사하다. 그래서 더 감사하다는 대답도 해 드렸다.


오늘은 그분의 호의가 나의 하루가 살아갈 힘이 되어 준다. 5000원을 거절하며 결국 환하게 웃으시던 그 미소가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준다. 그분은 나에게 단지 지갑을 찾아주어서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분이 준 작은 호의는 나에게 '하루'를 선물한 것인데 말이다. 

남편이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 낯선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하는 일이다. 남편은 어떤 분이 비타민을 2병 주셨다, 음료수를 주셨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하루하루가 쉽지 않은 남편에게 그분들의 작은 호의는 큰 힘이 되어 준다. 음료수를 건넨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그냥 베푼 작은 호의가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되어준 적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내가 멈춰야 할 이유, 내가 무기력과 손잡을 이유는 대형 트럭에 가득할 만큼이지만, 잠깐 에너지가 생길 때 그 잠깐이라도 부지런히 단련하는 것. 오늘 하루를 필사로 시작하는 것. 참 다행이다. 참 감사하다. 


이제, 어제 미루어두고 밤새 머리를 아프게 했던,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을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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