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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수 Jan 24. 2024

나도 효자였다!

월간에세에 12월호 수록본

“너 엄마한테 왜 고함을 치니? 엄마가 얼마나 속상해하시는 줄 알아?”

오십 대 중반인 막내 누나의 서슬 퍼런 추궁에 두 살 아래 막냇동생은 억울하면서도 속만 태운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누나는 어머니를 평생 곁에서 모셔온 사람처럼 속사포를 날린다. 일 년에 서너 번 고향에 내려와 하룻밤 자고 가는 게 고작이면서…….

“육 남매 중에 단 한 달이라도 엄마 모시겠다는 사람 있어? 난 아버지 치매 때부터 십 년 넘게 이러고 있잖아! 내가 원래부터 이런 줄 알아? 나도 효자였다고!”

억울함은 절규로 터져 나왔다. 부모에게 무례한 건 잘못이지만,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는 사람에게는 나름의 고충이 있다. 외지에 사는 사람에게 부모 봉양은 추억 어린 낭만이자 서사일 수 있지만,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엄중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찾아온 형제가 속사정도 모른 채 이러쿵저러쿵하다가 갈등이 빚어지곤 한다. 저쪽은 이쪽더러 ‘유세 떤다’고 하고, 이쪽에서는 ‘그럴 거면 모시고 올라가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나는 글과 책이 좋아 조금 늦은 나이에 번역가의 길을 선택하여 지금껏 내 나이만큼의 책을 냈다. 도시 생활이 갑갑하여 흙이 있는 거처를 물색하다 아예 고향으로 내려온 지도 스무 해가 넘었다. 고향 집에서 가까운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처음에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치매가 심해지는 아버지를 어머니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하시던 차에 막내아들이 등장한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귀향을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신이 감당 못 할 일들을 척척 처리하고 예쁜 손녀까지 보여 주니 새 세상을 사는 것 같다며 동네방네 자랑하셨다. 매주 아버지를 씻기는 일도 힘들지만 보람 있었다. 공중목욕탕 안에서 큰일을 보거나, 다 씻고 새 옷을 입히자마자 작은 일을 보는 정도는 금방 익숙해졌다. 오히려 우리 세대의 부자 관계란 게 그렇듯, 아버지와의 서먹했던 일생을 지금에라도 녹여낼 기회로 여겼다. 훗날의 미련을 지우기 위해 나는 참 열심히 씻기며 대화도 많이 나눴다.

그런데 아버지의 치매가 심해지며 어머니에게 힘을 쓰고 새벽에 집을 나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의 인내심은 급속도로 바닥났다. 답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언성은 높아지고 가슴에는 화가 차올랐다. 부모는 저세상으로 떠나기 전에 정을 뗀다더니, 착하기만 하던 아들의 그릇은 바닥을 드러냈고 말로만 듣던 공황까지 경험했다. 숨이 가빠질 때는 밤이든 낮이든 밖으로 뛰어나가 걸어야만 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미리 알아봐 둔 시설 좋은 곳이지만 아버지는 왜 당신을 여기 버렸냐고, 어서 집에 데려다 달라고 호통치는 바람에 나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는지, 이렇게 떠나시면 당신의 기억 속에 막내아들이 무엇으로 남을는지…….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떠나시고 어머니도 지금껏 걷지 않았던 길로 접어들었다. 자식들은 집 안부터 화사하게 손보며 어머니의 수고로운 인생이 편안해지도록 배려했다. 그렇게 한동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연세가 들면서 어머니의 치매와 강박증이 점점 심해졌고, 사소한 일을 망상으로 확대하여 수시로 전화를 해대니 나로서도 온전한 생활이 어려워졌다. 인내심은 또다시 바닥났고, 과거의 아버지처럼 이젠 내가 어머니를 향해 고함을 치고 있었다. 막내 누나와의 언쟁이 벌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지고 막내들까지 티격태격하자 손위 형제들도 바짝 긴장했다. 누나들과 형님네 사이에 더러 오해의 말도 오갔지만, 다행히 한 걸음씩 양보하며 합의점을 찾아 나갔다. 몇몇은 번갈아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약사 누나는 시의적절한 약으로 지원하니 어머니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세상일은 돈에 크게 좌우되기 마련인데 다행히 우리에겐 미리 모아 둔 비상금도 있었다. 

그렇게 부산한 두 달여가 지난 오늘, 어머니는 주간 보호시설에 입소하여 첫날을 보내고 오셨다. 어머니의 정신과 체력이 버텨줄지, 딸아이를 처음 어린이집 보낸 날처럼 조마조마했지만 의외로 씩씩하게 돌아오셔서 우리를 안도케 하셨다. 이 불안한 평화가 얼마나 지속할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여생에 단 얼마간이라도 화사한 꽃밭 같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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