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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Jan 19. 2018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수레바퀴

영화 <원더 휠>

모든 장치가 노골적이다. 영리하고 작위적이지만 숨길 생각도 없다.

코니 아일랜드는 미국인들에게 특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스위치 같은 로케이션인 듯하다. <레퀴엠>, <데몰리션>, <브루클린>처럼 적극적인 메타포로 사용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최근 개봉한 <원더>에서도 짧지만 '비아'의 정서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치로 활용되었고 심지어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도 마지막 전투가 펼쳐지고 주인공이 진짜 영웅으로 거듭나는 곳이 된다. 나쁜 놈이랑 싸우는 장소야 어딘들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쇠락한 유원지가 배경이 되면 단순한 액션신에도 미묘한 정서가 더해진다.

그래, 쇠락한 유원지. 한 때는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한 환상의 공간이었지만 세월 속에 바래어 화석 같은 영광의 기묘한 흔적만 남은 공간. 로케이션 한 방으로 이보다 더 복잡다단한 기분을 선사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요즈음 인적이 뚝 끊긴 압구정 일대를 걷다 보면 느끼는 감정이 비슷할 듯도 하다. 이미 사람들은 떠났고 거리는 적막하지만 여전히 불을 밝힌 명품샵과 고가 브랜드의 간판들. 그 괴리에서 느껴지는 엇박의 기묘함이 코니 아일랜드로부터 미국인들이 느끼는 것과 닮았을까.

그러니 아예 영화의 배경을 코니 아일랜드로 정했을 때부터 감독은 이미 메타포를 전면에 드러낼 작정이었던 거다. 물론 영화의 배경인 1950년 대의 코니 아일랜드는 쇠락한 유원지가 아닌 전성기의 가장 화려한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끝을 알고 있다. 눈부시게 화려한 색감의 유원지로 시작해도 그저 달콤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코니 아일랜드에서 일하고, 아예 그 안에서 사는 인물들. 밤이면 창 너머로 유원지의 화려한 조명이 그대로 들이친다. 동화처럼 예쁘지만 생활하라면 미치기 딱 좋다. 사람들이 현실을 떠나 유흥을 즐기는 코니 아일랜드가 고스란히 일상의 고단함인 지니와 험프티는 도망갈 환상조차 없다.

그런 그들의 일상에 비일상이 찾아온다. 캐롤라이나와 믹키. 험프티와 전처의 딸인 캐롤라이나는 그 존재 자체로 비일상이다. 매력이 한참 꽃을 피운 몸과 그걸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옷차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갱스터와의 사랑을 찾아 도망갔다가, 그 갱스터로부터 도망쳐 이제는 킬러에게 쫓기는 신세까지. 그 시기 유행했던 멜로드라마와 느와르를 몸에 휘감은 채 현신한 비일상 그 자체다. 영화 속 인물들마저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입을 모아 말할 만큼. 험프티의 비일상 캐롤라이나는 험프티로 하여금 지긋지긋한 일상으로부터 새로운 리듬과 활력을 찾게 만든다.

지니에게는 해양구조대 믹키가 찾아온다. 여름날 해변가에 앉아있는 몸 좋은 구조대원 역시 그 자체로 판타지다. 섹시한 몸과 빛나는 미소를 가진 믹키는 대학에서 극작을 공부하는 로맨티시스트이자 해군으로 자원입대해 세상을 둘러보고 온 사나이이기도 하다. 늘 무대에 서 있던 자신을 돌아보던 지니였다. 작은 역 아니면 대역이나 맡던 변변치 못한 배우였지만 화려한 의상과 조명 속에 서있던 '진짜 나'는 멍청한 실수만 아니었다면 분명 더 활짝 피어났을 거였다. 코니 아일랜드의 화려한 조명은 꾀죄죄한 식당 유니폼에 갇혀 있는 지니를 비춰주지 않는다. 그런 지니에게 달콤한 시어를 속삭여주는 극작가 지망생 믹키는 단순한 로맨스 이상이다. 지겨운 이 일상에서 자신을 건져 다시 화려한 무대 위에 세워줄 구원이다.

하지만 비일상은 결코 일상으로 편입되지 못한다. 아슬아슬하게나마 균형을 유지해오던 지니와 험프티의 가정은 두 명의 비일상의 등장으로 기우뚱거리고, 그들이 가져온 비일상의 색깔 그대로 점점 더 난장판이 되어 간다. 캐롤라이나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답게 아버지의 후처의 내연남과 사랑의 빠지고, 느와르의 주인공답게 갱스터의 손길까지 따라오게 만든다. 지니에게 한눈에 반한 로맨티시스트 믹키는 캐롤라이나에게도 역시 한눈에 빠져 또다시 달콤한 시어를 읊기 시작한다. 비일상의 공간 코니 아일랜드에서 지긋지긋한 일상을 살던 지니는 다시 비현실적인 연극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다. 셰익스피어의 희비극처럼 얽히고설킨 운명의 장난에 빠졌으니 어쩌면 원했던 것을 이뤘는지도 모른다. 그 작품이 '한여름밤의 꿈'이었다는게 문제지만.

믹키는 지니가 험프티의 돈을 훔쳐 선물한 고가의 시계를 거절한다. 그리고 이별을 선언한다.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 믹키가 캐롤라이나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지니는 연극이 끝났음을 깨닫는다. 이 모든 갈등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연극 같은 롱테이크가 끝나고, 지니는 다시 지독한 일상의 식당 유니폼을 입은 채 일을 나선다.

난 사실 지니 같은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지니처럼 무책임하고 충동적이고 자기합리화가 심한 인물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불륜이 소재인 영화도 별로다. 미학적인 영화일수록 이런 제멋대로인 인물들을 두둔하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는 환상이라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 속에서라도 책임감 있고 따뜻하며 매력 넘치는 사람을 보고 싶다. 그럼에도 지니가 저 유니폼을 입은 채 술에 취해 터덜터덜 식당을 향하는 장면에서만큼은 그가 느끼는 일상의 지독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공감했고, 그를 연민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은 몹시 영리하게도, 모두 한없이 비정상적인 이들에게 또 연민할 수 있는 순간들을 콕콕 박아두었다. 등장인물 중 누구라도 현실에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별로인 사람들이지만, 순간순간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눈빛과 표정이 스쳐 지나갈 때면 마냥 미워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큰 숨을 들이켠다. 그래, 그들도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서였을까. 킬러들이 캐롤라이나를 쫓아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하게 수화기를 들었던 지니가 망연한 눈빛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너무 이해가 되는 마음에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을 잠시 할 수 없었다. 전화를 걸고, 도망치라 말하고, 비일상과 비일상이 그대로 떠나게 내버려두었으면 한여름밤 꿈에서 깨어나 다시 일상에 안착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니는 다시 한번 연극의 주인공이 되기로 한다. 이번에는 희비극도 아닌 온전한 비극이지만.

비극의 무대 위에 제 발로 올라선 지니는 화려한 무대 의상과 소품을 잔뜩 꺼내 치장한다. 그 무대 위로 연인을 잃은 비운의 남자 배우 믹키가 입장한다. 지니는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부정했다가, 분노했다가, 배신의 사랑을 원망하는 긴긴 독백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이 연극무대에서 그가 펼친 연기는, 젊은 날 배우 시절까지 통틀어 가장 뜨거운 명연기였을 것이다. 모든 걸 쏟아낸 지니의 대사가 끝나자 믹키는 퇴장한다. 두 사람의 무대에 조명이 되어준 코니 아일랜드의 불빛이 꺼진다. 연극은 끝났다.

마침내 두 개의 비일상이 온전히 사라지고 험프티가 들어온다. 잠시나마 삶의 희망이었던 캐롤라이나가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언제 그렇게 불안에 떨었냐는 듯 갑자기 태연한 목소리로 지니에게 다시 묻는다. 다음 주에 같이 낚시 가겠어?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일상으로의 귀환이다. 그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인력을 수긍하며 지니는 영화를 통틀어 가장 연극적인 대사를 내뱉는다. "유니폼을 빨아야겠어."

영화의 제목인 <원더 휠>은 코니 아일랜드의 상징 같은 대관람차다. 유원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비일상의 랜드마크다. 런던의 거대한 대관람차 '런던 아이'는 심지어 유원지도 아닌 시내 한복판에 서 있지만 그게 서 있는 곳은 그 자체로 비일상의 공간이 된다.

험프티는 코니 아일랜드에서 회전목마를 관리한다. 유원지의 가장 화려한 두 개의 놀이기구, 대관람차와 회전목마. 그 존재만으로 환상을 떠올리게 하는 두 놀이기구는 결국 느릿느릿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화려한 비일상에 올라탄 지니가 결국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지독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결국 지니는 스스로 만든 무대 위에서 일생 가장 격렬한 연기로 모든 걸 쏟아낸 뒤, 자신에게 남겨진 것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 아들처럼 모든 걸 불태울 수 없다. 유니폼을 빨아 입고 다시 식당으로 출근해야 한다. 험프티가 그렇게 경멸스럽게 말했던 식당 종업원의 삶으로 돌아간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거길 벗어날 수 없을 거다. 원더 휠처럼 회전목마처럼 코니 아일랜드가 드리운 환상의 그림자 아래 제자리 쳇바퀴를 돌며 살아갈 테다.


코니 아일랜드는 이제 동화 같은 화려함은 잃었지만, 원더 휠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빙글빙글 돌고 있다. 쇠락한 환상의 유적 위에서 그 덧없음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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