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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Jan 17. 2018

충분히 착해도 된다, 이 정도는.

<원더>

보고 싶었던 영화.

워낙 대작들 투성이인 시기라 곧 상영관이 다 사라질 것 같아 느즈막이나마 서둘러 극장을 챙겼다.


다르게 태어난 얼굴을 가리기 위해 헬멧을 쓰고 다니는 아이. 하지만 여느 아이처럼 우주를 좋아하고, <스타워즈>를 좋아하고, 아니 살짝 더 솔직해지면 똑똑한 엄마의 홈스쿨링 덕분에 여느 아이보다는 좀 더 과학을 잘하고 명민한 아이.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학교에 들어서는 친절한 예고편만 봐도 어쩐지 영화를 다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런 영화가 있다. 예고편만 봐도 무슨 영화인지 다 알 것 같은데, 다 알겠는 그게 또 보고 싶어 극장을 찾게 되는 영화. 실제로 영화를 보니 예상은 반만 맞았다. 예고편에서 보여준 '어기'의 이야기는 줄곧 예상한 전개대로 흘러갔지만, 영화는 그 '어기'로 인해 일상에서 크고 작은 영향을 받는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그 시선의 대상이 바뀔 때마다 아예 인물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며 챕터의 형식을 취하는 적극적인 영화의 태도가 못내 반가웠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나 <대니쉬 걸> 같은 영화에서도 느껴지듯, 할리우드는 '다르게 태어나 괴로워하는 인물'을 그릴 때면 늘 그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지는 무게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런 시선의 폭이 다르긴 했지만 결국 정성스런 시선을 나눠 받은 주변 인물들 역시 조금 부족하긴 해도 하나하나 다 따스함을 가득 품은 사람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지만 부디 그 예상대로 이어지길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며 따라가게 되는 영화다. 상처와 성장을 고루 겪으며 학교의 일원이 된 '어기'가 학기말 전교생 앞에 나가 상을 받는 결말까지 그렇다. 다만 골고루 애정을 주었던 연출 덕분에, '어기'가 단상으로 나갈 때 진심으로 환호하며 기뻐해주는 그 표정의 수만큼 감격이 깊어졌다. 누군가의 도전과 성장을 저렇게 가슴 가득 환호해줄 수 있는 모습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맞다. 이 영화는 몹시 착하다.

엄마, 아빠, 누나, 그리고 할머니까지 가족들은 지혜롭고, 친구들은 성숙하며, 선생님들은 정의롭고 그 시스템도 잘 작동한다. 이제 세상에 처음 나온 '어기'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사실 괴롭힘이라고 할 만한 것도 심한 욕을 적은 쪽지를 몇 번 건네는 정도가 다였다. 가장 나쁜 악역도 결국 '아이라서' 보인 미숙함의 발로였다. 진짜 악역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마지막에 잠시 등장하는 그의 엄마 정도다. 감독 역시 이 영화의 따뜻한 온도를 의식했는지 "어기의 외모는 바꿀 수 없으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 한다'는 교장의 충고에 "현실세계에 그렇게 전달해 보겠다"라는 의미심장한 대사 한 줄을 남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화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다. 전후 미국을 배경으로, 날 때부터 흉측한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버려진 아기가 노인요양원에서 키워지며 점점 젊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 속에 인생에 대한 다양한 성찰을 담은 이 영화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꾸 다시 들춰보고 싶어 진다.

<벤자민 버튼>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함께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  두 영화를 며칠 간격으로 봐서 그런지 함께 인상에 남았다. 빈민가 출신 '자말'이 거액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 나가 문제를 맞히는 영화. 퀴즈 하나하나마다 그가 살아온 삶이 정답을 알려주는데,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며 인생의 장면들을 보여주는 방식이 <벤자민 버튼>과 닮아있다.

다만 저주받은 몸으로 태어난 '벤자민'은 전후 미국 사회의 교양 있는 요양원에서 키워지고, 재벌 아버지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아 인생의 성찰을 깨우치며 살지만, '자말'은 건강하게 태어났음에도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잃으며 인생을 배운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시간을 거꾸로 사는 '벤자민'의 삶도 비극적이다. 사랑하는 이와 엇갈린 시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이 전후 미국이 아니라 '자말'의 빈민가였다면 과연 그 흉측한 아기는 얼마나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노인요양원처럼 따뜻한 곳에 버려지긴 힘들었을 거다. 어느 하수구 속에서 울다 지쳐 차갑게 식었을지도 모르겠다. '자말'이 들어갔던 변소 똥통에 빠졌다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거다. 혹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한들 어느 나쁜 어른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그 '벤자민'이 깨우칠 인생의 성찰은 전혀 다른 결이었을 거다.


영화를 꼭 이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는데. 하필이면 두 영화가 같이 개봉해서 그렇다. 하필이면 난 그걸 며칠 간격으로 봐버렸고.


<원더>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어기'는 자신의 다른 얼굴을 힘들어하긴 하지만, 아주 넓고 안락한 방에서 교양 있는 가족들의 위로를 받으며 힘들어한다. '어기'가 간 학교는 '어기'를 보호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학교다. '어기'에게 쪽지를 몇 개 보냈다는 이유로 교장실에 끌려온 '줄리안'의 아빠가 "이 학교 이사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다"며 협박해도, "나는 더 많이 안다"며 맞설 수 있는 교장이 있는 학교다.

어떤 현실을 볼 때 그 이면을 보는 것은 중요한 습관이다. 모두가 착한 <원더>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 '23번의 수술'을 할 만한 돈이 없는 가정의 '어기', 훌륭한 홈스쿨링을 해줄 수 없는 부모를 둔 '어기', 조금만 밉보이면 흠씬 두들겨 맞고 화장실에 처박히는 일이 쉬이 벌어지는 <문라이트>의 슬럼가 학교를 다니게 된 '어기'를 떠올렸을 거다. 그런 세상도 있고, 이런 세상도 있다. 사회마다 맞춰가는 기준이 있고, 그게 어디 있든 우리는 그걸 계속해서 올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 불공평함에 대한 분노를 '운 좋은 어기'에게 향하는 것은 방향이 잘못됐다. '벤자민'은 '자말'의 슬럼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가 깨달은 것들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 역시 <원더>에서 한 명 한 명 짚어주는 인물들이 결국 모두 따스한 마음을 가졌다는 걸 보여줄 때, '뭐 전부 다 착하네'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게 또 뭐 그리 착한 건가.

'어기'는 그냥 조금 다르게 생겼을 뿐이다. 지나가다 자기도 모르게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정도야 어쩔 수 없지만,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할까. 대화를 하기 위해서 조금 더 노력을 들여 귀 기울여야 하는 그런 장애도 아니다. 그런 작은 수고조차 피로를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기'는 심지어 평균 이상으로 똑똑하고 센스도 있는 아이다. 이런 아이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고, 예뻐하고, 다르지 않게 대하는 영화 속 인물들이 '비현실적으로' 착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분명히 어딘가 고장 난 거다. 충분히 착해도 된다, 그 정도는.

비현실적인 거라면 차라리 약속한 듯 다 같이 반짝거리는 훈훈한 외모를 물고 늘어지든가. '미란다' 너무 예쁘고 '썸머'도 예쁨 철철 흐르고 특히 '잭 윌' 진짜 훈내 대폭발. 솔직히 이 정도면 좀 반칙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음, 확실히 좀 비현실적이다.


<원더>를 보고 또 하나 줄곧 보고 싶었던 <코코>도 보았다. 역시 어딘가 겹치는 영화 두 개를 바짝 붙여서 보면 머릿속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꿈이고 뭐고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고 슬리퍼 들고 쫓아와서 후드려패는 대가족과, 누가 뭐래도 네가 제일 소중하다고 두 손 꼭 잡고 말해주는 4인 가족. 멕시코와 뉴욕, 국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천차만별인 가족들이 산다.

다들 저마다의 삶을 그렇게 사는 거다. 이 잣대를 저기에 들고 와서 갖다 대는 순간 눈금이 안 맞는 곳 천지일 거다. 발 딛고 선 곳에서 조금씩 올려가면 된다. 그곳이 허락하는 만큼은 충분히 착해져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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