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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Dec 17. 2017

무지랭이의 언어로 이야기 해보는 영화 속 천문학 (2)

영화 [인터스텔라]

팽창하는 우주와 빅뱅, 질량과 중력, 그리고 블랙홀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 지식들은 [인터스텔라] 전반에 녹아 있는 배경을 이해하는데는 살짝 도움이 될 지는 몰라도 영화의 내용 자체에서는 그닥 써먹을만한 구석이 없긴 하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머릿속을 직접 긁어놓은 놈은 '상대성이론'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시공간'과 '차원'에 대한 이야기들이니까. 애초에 한 편으로 끝내려고 했던 글을 잘라가면서까지, 내용과 썩 관계도 없는 이야기들을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단촐하게나마 배경지식들을 짚고 넘어가야 본격적인 내용들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무지랭이의 언어다. 실제 이론과는 아예 개념조차 다른 부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각 잡고 공부할 건 아니고, 아마도 앞으로 무지랭이로 살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싶으면 같이 이해해 보자.

(이번에는 아마 스포일러가 들어갈 겁니다. 상관 없는 분들만 읽어주세요.)


/ 시공간
시공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인터스텔라]에서 긴장감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지구의 가족들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우주를 여행하는 주인공들로 하여금 똥줄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아니었던가.
시공간이라는 말 참 많이 나온다. 중력과 블랙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도 엄청 썼다.  대부분 '질량의 존재 주변에서는 시공간이 왜곡되어 중력이 형성된다'는 설명과 함께 등장했다. 그런데 이 '시공간'이라는 말부터 좀 낯설다. 별생각없이 들으면 '치맥'처럼 각각 따로 존재하는 개념인 '시간'과 '공간'을 편하게 붙여서 부르는 말인 것처럼 들리기 쉬운데 그게 아니다. '시공간'은 단일 개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용광로에 집어넣고 휘휘 저어 굳힌 것마냥 유기적으로 하나가 된 개념이다.


그럼 일단 우리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보자. 여기에 대해서는 또 수도 없이 많은 철학들이 있고, 심지어는 정확하게 이 부분만 연구하고 있는 '인지과학'이라는 분야도 있긴 하지만, 무지랭이끼리 너무 무리하지 말자.

가장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실상 감각기관을 통한 세상은 절대적이다. 이 감각기관의 신뢰성에 대한 의심이 고개를 들면, 이는 곧바로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의심으로 직결된다.

어린 시절 어딘지 남다른 인식론적 감수성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면 "이 모든 세상이 사실은 내가 볼 때만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내가 안 볼 때는 막 완전 다른 모습인 거 아닐까?" 하는 식의, 귀엽게 보면 [토이스토리], 좀 끔찍하게 보면 [트루먼쇼]에 가까운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일화도 들은 적이 있다. [매트릭스]류의 '시뮬라시옹' 철학에 심취한 어느 학생이 철학과 교수님에게, '이 모든 세상이 실은 실존하는 것이 아닌 가상의 감각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교수님이 따귀를 시원하게 한 대 갈기고 '이것도 가짜 같냐'는 말을 듣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는 이야기.

참으로 실존주의적인 교수님의 교육방식에 대한 감탄 혹은 비판을 잠시 접어두고 나면, 사실 그 교수님의 행동은 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학생이 전제한 '거짓일 수도 있는 감각'에는 따귀가 주는 강렬한 아픔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더럽게 아프고 기분도 더럽지만, 그렇다고 그게 현실이라는 뜻은 아니니까.

그러나 일상적 인간에게 감각은 곧 현실이다. 감각기관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그 어떤 현실도 믿을 수 없게 된다. 따귀맞아서 아프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 처럼.

사실 [매트릭스]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봤을 것이다. '와 나 같으면 그냥 파란약 먹고 매트릭스 안에서 산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의 오감은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뇌로 전송되기에 애초에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 완벽한 세계의 감각을 바로 뇌로 쏘아준다면, 그리고 그 당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것이 그저 전기신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모른채 살아간다고 하면 '현실'이라는 말이 가지는 빛은 순식간에 바래버린다. 탐욕스럽게 스테이크를 썰어 먹으며 '네오'를 설득하던 배신자 '사이퍼'의 이야기는 솔깃할 수 밖에 없다.


시공간의 운을 띄워놓고 왜 자꾸 영화 속 실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면 상대성이론에서 말하는, 사실 상상이 잘 안되는 '시공간'을 그나마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이해해보는 첫번째 단계가 바로 '실제'보다는 '인식'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정말로 그렇다'라기 보다는 '그렇게 보인다'라고 일단 이해하고 나면 한결 부드러워진다는 뜻이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 둘은 다르지 않은 의미이다. 예술과 학문이 끊임 없이 그 오류를 지적하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하자니 어딘지 마음이 껄끄럽기는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세상은 '보이는대로 존재한다.'

때때로 부정확하기도 한 이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훈련하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감각의 세계 없이 살 수는 없다. 아니 감각 없이 오로지 뇌 속의 합리적 이성만으로 살아간다면 그건 일단 인간이 아니다. 그냥 뇌 덩어리겠지.

그런 감각 중에서도 가장 유용한 것은 단연 시각이다. 심리학이나 트릭아트 같은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의 오류를 짚어내는 흥밋거리들을 내어 놓고는 하지만 이는 결국 그만큼 시각이 우리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를 알려주는 역설에 다름 아니다.
시각이 가장 유용한 감각이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럼 '유용한' 대신, '신속한'으로 표현을 바꿔보자, 혹은 '광범위한'도 괜찮겠다. 그럼 이견이 있기 어렵다. 감각신호를 전달하는 매질 중에 가장 빠르고, 멀리까지 이르는 것이 '빛'이기 때문이다. 직접 접촉이 이루어져야 신호가 전달되는 촉각과 미각은 당연히 제껴두고, 공기를 통해 전달되는 후각과 청각도 당연히 빛을 통해 전달되는 시각에는 한참 못미친다.


이전 글에서도 몇 번인가 언급했듯, '본다'는 과정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 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라면 그로부터 출발한 빛이, 빛을 내지 못하는 물체라면 다른 발광체로부터 출발한 빛이 '보일'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어 망막까지 날아오고, 망막으로 들어온 빛의 신호는 전기신호로 바뀌어 뇌에 전달된다. 이 과정을 모두 거쳐야 비로소 우리는 그 물건을 '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줄의 글로 서술한 이 모든 과정은,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사실상 '동시에' 이루어진다. 빛이 겁나 빠르기 때문이다.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 돈다'는 지구의 속도는, 뭔가 새롭고 엄청나 보이는 지식 배우기를 좋아하는 유치원 시절부터 달달 외우게 되는 구절이다.

청각이나 촉각을 통해 세상을 훨씬 구체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구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우주를 얘기하려던 참이고, 까놓고 말해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 감각할 수 있는 우주는 '시각으로만' 존재한다. 우주의 냄새, 소리, 촉감과 맛은 안타깝게도 지구의 대기권에 들어오지 못한다. 오로지 빛만이 이곳에 이를 수 있다. 우주의 소리를 녹음해 보내온 위성이 있긴 하지만, 소리를 '녹음'해서 '전파'로 전송하는 순간 지구에 들어오는 건 결국 소리의 정보를 담은 '빛'이다.


그런데 지구 위 세상을 인식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빛의 속도는, 우주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여기서부터 '광년'이라는 단위가 나온다. 어감이 좀 이상하다. 다들 들어본 말일테니 오해 없으리라 믿는다. '빛의 속도로 1년 동안 갈 수 있는 거리'라는 뜻이다.

이건 다른 의미로도 어감이 이상한데, '10광년', '500광년' 하는 식의 표현들을 들으면, '~년'으로 끝났으니 당연히 '시간'의 단위로 들린다.  그런데 거리, 즉 공간을 나타내는 단위란다. 짜잔, 시공간 개념의 첫 등장이다.


자 그럼 이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펼쳐서, 편의상 1광년 떨어진 곳에 행성이 하나 있다고 하자. 빛의 속도로 이 행성까지 가는데 꼬박 1년이 걸린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 이 행성에서 출발한 빛 역시 지구까지 도착하려면 꼬박 1년이 걸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은 2014년 11월. 지구에 서있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행성의 모습은, 사실은 2013년 11월에 출발해 1년에 걸쳐 지구에 도착한 빛이다. 즉 2013년 11월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다. 당장 오늘 이 행성이 폭발해서 사라져버린다 해도, 우리는 앞으로 1년 내내 이미 실제로는 사라지고 없는 그 행성을 여전히 관찰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직접 그 자리에 가서 확인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러나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고, 빛의 속도로 그곳까지 간다 하더라도 가는 길목 어딘가에서 행성이 폭발할 때 출발한 빛을 만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 눈에는 그 순간 폭발한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이미지 출처: http://www.picrolls.com/wallpapers/65/65699-Hubble_Starry_Night_Vol_4_No_1.htm )

서울에서는 어렵지만, 빛 공해가 없는 한갓진 어느 뫼의 맑은 밤이면 밤하늘을 가득 매운 별 잔치를 즐길 수 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별들은 우리 눈에야 한 겹 밤하늘에 곳곳 박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모두 다 제각각이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의 모습 중에는 10년 전 것도 있고, 수천년, 수억년 전의 것들도 있고, 심지어 눈에 보이는 별들 중의 상당수는 실제로는 폭발해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별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시간의 지점들을, 우리는 2014년이라는 지구의 시간 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우주는, 거리가 멀어지는만큼 시간도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실제로 그 장소에는 우리가 '동시'라고 여길 수 있는 시점의 그 실체도 존재하겠지. 그런데 무슨 의미랴. 직접 갈 수가 없는데. 간다해도 가는 거리만큼의 시간도 같이 흐르는데.  공간이 곧 시간이 된다.


지난 번에 얘기했던 '빅뱅'을 다시 생각해보자. 태초의 폭발 이후로부터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그럼 그 폭발의 가장 시작부터 출발한 빛, 그래서 지금은 팽창하는 우주를 가장 바깥에서 밀어내고 있는 그 빛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오래된 우주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https://thespectrumofriemannium.wordpress.com/tag/wmap-results/ )

그 개념에 가장 가까운 것이 '우주배경복사' 관측이다. 1964년에 펜지어스와 윌슨은 하늘에서 들어오는 전파잡음을 발견하였고, 이것이 특정한 방향에서만 수신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부터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전파는 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 여러차례 관측에도 성공했다.

모든 방향에서 날아오는 전파라는 사실은 몹시 중요한데, 이는 특정한 별이나 은하와 같은 단일 천체로부터 발생하는 빛이 아니라 존재하는 우주 공간 전체로부터 수신할 수 있는 빛이라는 말이된다. 별이나 은하와 같은 천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공간은 말 그대로 빈 공간이다. 그 빈 공간에는 빛을 발산할 수 있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 공간 전체를 둘러싼 빛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빅뱅 이야기를 할 때 비디오 테이프를 끝까지 뒤로감기 했던 것을 상기해보자. 그 때 우주는 한 점으로부터 폭발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때 빛이 발생했다. 그리고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최초의 발생한 빛은 풍선의 고무막처럼 우주를 둘러싼 채 점점 옅어질 것이다. 즉 우주의 빈 공간을 둘러싼 빛의 존재는, 우주가 처음 형성되던 때 빛의 흔적이라는 뜻이 된다. 태초의 뜨거웠던 우주를 둘러싼 빛이 한없이 팽창해 짜게 식어버린 흔적이라는 말이다.

뜨겁게 폭발한 최초의 우주의 온도는 빛 조차 녹여버렸다. 이때는 전자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어서 '빛을 발산'한다는 개념조차 불가능했다. 그 폭발의 온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원자가 안정화되고, 비로소 빛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시점이 빅뱅 후 38만년이라고 한다.

우주배경복사는 이 때 방출한 빛의 흔적이다. (관측 사진에서 빛이 균일하지 않은 모습이 보일 것이다. 최초의 불균등하게 분포된 우주의 물질들이 좀 더 뭉쳐있는 곳들에는 질량이 더해지고, 이는 다시 중력을 형성하면서 더 많은 물질들을 끌여들였다. 즉 우주배경복사에서 빛이 뭉쳐있는 지점들이 이후 우주에서 별과 은하가 만들어지는 씨앗인 셈이다.)

즉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우주 가장 저 멀리 바깥에는, 137억년 전의 모습마저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 공간에서 거리와 시간이라는 개념을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좀 더 와닿지 않는가.


/ 상대성이론에서의 시간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해도 여전히 좀 석연찮다. 지금 설명한 시공간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볼 때 '시간의 시점'이 다르다는 얘기가 된다. 즉 보이는 시간의 지점이 달라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각각의 장소에서 시간은 똑같이 흐르고 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근데 영화에서는 아예 막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데? 막 먼저 나이 먹고 막 애들이 막 추월하고 막 잠깐 내려갔다오니까 아저씨 늙어있고 막 그러는데? 방금까지 얘기한 시공간 개념은, 평범하게 지구에서 살고있는 우리가 우주를 바라볼 때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이야기까지 하려면 평범하게 살아갖고는 안된다. 일단 지구를 떠나서 빛의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


그럼 아까 예를 들었던 1광년 떨어진 그 행성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아까는 2014년 11월에 지구에 서서 그냥 그 행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니 행성은 영락없이 1년 전, 2013년 11월의 모습이었고. 그게 행성 입장에서는 2013년 11월의 모습인거지만, 어쨌든 우리 입장에선 그게 2014년 11월에 보이는 행성이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실제로 그렇다' 보다는 '그렇게 보인다'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번에는 행성을 향해 날아가보자.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된다고 해보자. 1광년이니까, 지구에서 행성까지 날아가는데 꼬박 1년이 걸린다. 출발할 준비를 이것저것 갖춰서, 2015년 1월에 출발한다. 자, 출발하는 시점에, 우리에게 보이는 행성의 모습은 2014년 1월의 모습이다. 빛의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해, 6개월 정도에 이르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해보자. 지구로부터 여행을 시작한 지 6개월 째, 그러니까 지금 시점은 2015년 6월이다.

그럼 여기서 바라보는 행성의 모습은? 출발할 때로부터 1년이 지난 모습, 2015년 1월의 모습이다. 행성까지 빛의 속도로 6개월 걸리는 거리에 왔으니, 우리에게 보이는 행성의 모습도 6개월 전에 출발한 빛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행성에 도착했다. 2015년 1월에 출발해 꼬박 1년을 날아왔으니 2016년 1월. 도착해서 보는 모습이니 행성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2016년 1월이다.

자, 우리는 분명 2015년 1월에 출발해서 1년을 날아왔다. 그러나 행성의 모습은 2년이 흘렀다. 출발할 때는 2014년 1월의 모습이었는데, 도착하니 2016년 1월의 모습인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행성에 도착해서 지구를 바라보니, 1년 전 출발할 때 모습 그대로다. 빛의 속도로 날아왔으니, 우리가 보는 지구의 모습도 우리와 함께 출발한 그때 그 빛이다. 2016년 1월에 바라보는, 2015년 1월의 지구.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있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면, 서로의 시간도 다르게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나뉘는데, 방금 이야기한 경우는 '특수상대성이론'에 해당한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보면 물체의 운동과 시간이 다르게 보이는데 이에 따라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는 내용이다.

방금 예를 들었던 행성까지의 여행에서, 우주선 안에서는 1년이 흘렀는데 행성의 시간은 2년이 흐른 것처럼 보였다. 우주선 안에서의 시간이 절반 정도 느리게 흐른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근데 이건, 우리가 우주선 안에서 하염없이 행성 한 군데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성에 도착해서 지구를 보니, 오히려 지구의 시간은 1년 전 그대로처럼 보이지 않았는가.

해서 방향에 상관없이 어떻게 시간이 달라지는지를 한 번 보자.

특수상대성이론을 설명할 때는 이 예를 가장 많이 쓰는 듯 하다. 지구의 어느 방 안에 있는 A와,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 안에 있는 B를 가정한다. 참 그러기가 쉽지 않겠지만, A의 방 크기와 B의 우주선 선실의 크기는 같다. A가 겁나게 부자든지,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우주선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생겼으니 크기도 간소화된 B라고 해보자.

빛의 속도는 어디에서나 같다. 다시말해 A나 B나 천장을 향해 빛을 쏘면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똑같다는 말이다. 편의상 1초라고 하자. 그렇다고 방 높이가 30만km(빛의 초속)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도달하는 시간이 1초라고 하자.

방 안에 있는 A와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 안에 있는 B 모두, 자신이 쏜 빛이 천장까지 이르는데 똑같이 1초가 걸리는 현상을 본다. 그런데, 서로를 보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움직이는 물체에는 관성이 적용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머리 위로 공을 던졌다가 받으면 우리 눈에는 직선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공은 포물선 운동을 한 것이라는 얘기는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우리가 흔히 배운 내용이다. 우주선의 선실 안에 있는 B의 눈에는 빛이 천장까지 그대로 직선운동을 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바깥에 있는 A의 눈에는 우주선의 이동거리까지 더해져 대각선 운동으로 보일 것이다.

만약 천장까지 이르는 세로 거리가 1이었다면 똑같은 속도로 가로로도 1을 움직였으니 A의 관점에서 본 'B가 쏜 빛의 1초 동안 이동거리'는 √2, 즉 1.4배 정도 더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물리학에는 중요한 법칙이 있다. 빛의 관측 속도는 절대적으로 일정하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같은 속도로 보인다. 움직이는 물체 안에 있다고 해서 가속도가 붙지 않는다. 빛이 제일 빠른 물질인데 거기서 더 빨라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걸 어쩌나. 분명히 A, B는 각각 자기 빛이 1초 만에 천장에 닿는걸 봤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A가 볼 때 B의 빛은 1.4배 더 많이 움직였다. 그게 똑같이 1초 안에 해결되려면 B의 빛이 더 빨리 움직였다는 얘기가 돼야 한다. 하지만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거리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A와 B의 시간 체계자체가 달랐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주선 안에 있는 B는 자기 시간이 1초 흘렀다고 느꼈는데, 우주선 밖에 있는 A가 볼 때 빛은 분명히 1.4초 동안 움직였다. B에게 1초가 A에게는 1.4초, 우주선 바깥의 시간이 더 빨리 흐르고 있는 것이다.

빛의 이동속도가 항상 일정하다는 전제를 박아놓고 나면 실제로 빛이 얼마나 움직였는가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럼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물체 안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특수상대성이론 말고도, '중력의 큰 공간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일반상대성 이론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력의 영향으로 시공간이 왜곡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지난 번 글에서 설명했다. 왜곡된 시공간 안에서는 직선운동을 하는 빛 또한 구부러진 공간을 따라서 이동할 수 밖에 없다. 같은 직선의 거리도 구부러뜨리면 거리가 늘어난다. 다시 말해 휘어진 공간 안에서는 바깥과 같은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더 많은 공간을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빛의 속도는 똑같다. 같은 시간 안에 같은 거리를 이동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밖에서 봤을 때, 휘어진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빛은 실제 이동거리보다 더 많이 움직인 것으로 보일 것이고, 휘어진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도 휘어진 공간 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때와 똑같은 빛으로 느껴질 것이다. 즉 서로 똑같은 빛의 움직임을 밖에 있는 사람은 더 많이 움직인 것으로 보게 된다. 이는 휘어진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것보다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는 것을 뜻한다.


앞서 우주선 안과 밖에서 빛을 쏘았던 A와 B의 예와 똑같은 경우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 안과 밖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시간의 차이처럼, 강한 중력의 영향권 안과 밖에 있는 사람도 시간의 흐름을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쿠퍼 일행이 밀러 박사의 신호를 따라 바닷물 뿐인 행성에 착륙했을 때 이 행성은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권 안에 들어가 시공간이 힘껏 왜곡된 곳이었다. 그래서 쿠퍼는 그 영향권 안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 하기 위해 블랙홀의 영향권 바깥 쪽을 따라 우주선을 이동시킨 뒤, 거기에 우주선을 세워놓고 중력 영향권 안의 행성으로 단번에 진입한다. 그렇게 생긴 우주선과 행성과의 시간의 차이 때문에 쿠퍼와 브랜드가 우주선으로 돌아왔을 때, 잔뜩 나이를 먹은 로밀리가 그들을 반겼다.

그 긴 시간 동안 멀쩡하게 깨어서 미치지 않은 로밀리의 정신력에 박수를 보내자. 심지어는 그 긴 세월 동안 홀로 곱씹은 고독과 어떤 종류의 깨달음도 있었을 텐데 그런거 아무도 안 궁금해하고 그냥 바로 다음 행성을 향해 간다. 역시 아무나 인류를 구하러 가는건 아닌 모양이다.
...물론, 로밀리의 최후를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로밀리다...


/ 차원의 문제

자 그럼 영화에서 가장 '공상과학', 혹은 '판타지'로 보이는, 블랙홀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얘기해보자. 일단 빛마저도 삼켜버리는 중력권인 그 블랙홀 안에 들어서는 순간, 쿠퍼는 형체도 남지 않고 찌그러졌어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5차원의 존재'로 불리는 미래인류는 일종의 데우스엑스마키나다. 합법적으로 개연성을 밥 말아먹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 어쨌든 우리는 그 데우스엑스마키나 덕분에 놀란이 그려낸 블랙홀의 안쪽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타스가 말하길, 5차원의 공간을 3차원으로 구현했다는 바로 그 공간.


일단, 차원이란 어떤 개념일까?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차원의 개념은 2차원과 3차원, 즉 2D와 3D라는 단어일 것이다.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들은 2D, [토이스토리]나 [니모를 찾아서] 같은 픽사의 작품들은 3D.
영어로 '차원'을 뜻하는 Dimension의 D가 뒤에 붙어있다. 차원은 '축의 개수'를 말한다. 1차원은 축이 하나, 2차원은 축이 두 개, 3차원은 축이 세 개다. 저 두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사람은 이 '축의 개수'가 누구보다 분명한 개념으로 다가올 것이다. 작업할 때 필요하니까.

2차원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은 우리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끊임 없이 괴롭힌 그 이름, x, y라는 익숙한 이름으로 불린다. 평면좌표 위의 어떤 점이든지 두 개의 축을 통한 좌표 (x, y)로 모두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웠다. 그런 2차원의 개념을 세상에서 가장 잘 표현한 장난감이 난 이거라고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 http://core77.com/blog/toy/etch_a_sketch_inventor_andre_cassagnes_passes_away_24321.asp )

이름도 제대로 모르지만 80년대 생이라면 누구나 어렸을 때 한 번쯤 가지고 놀아봤을 이 장난감, 정식 명칭은 'Etch A Sketch'다. 저 투명한 스크린 안쪽 면에는 황금색 모래가 묻어 있는데, 아마도 정전기를 활용한 듯 싶다. 왼쪽 레버와 오른쪽 레버를 돌리면 스크린 안쪽에 있는 바늘이 모래를 긁어내며 선을 긋는데, 왼쪽 레버는 가로 직선으로만, 오른쪽 레버는 세로 직선으로만 움직인다. 정확하게 두 개의 축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parkcirca.com/What-You-Need-To-Know
http://radar.oreilly.com/2009/09/rfid-fun-at-picnic-2009.html )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런 그림이나 그리면서 놀았을 것이다. 각각의 레버가 직선으로 밖에 움직이지 않아서,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림을 구현해내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곡선을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 두 개의 레버를 동시에 돌리면서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면 각도까지도 미세하게 조정이 가능하다. 거기에 도가 트면 저 장난감 갖고 이런 것도 가능해진다.

(이미지 출처: http://www.telegraph.co.uk/news/picturegalleries/howaboutthat/6005436)


이쯤되면 좀 무섭긴 한데, 어쨌든 2차원의 평면 위에서는 두 개의 축 만으로 모든 점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와닿는다.

3차원은 여기서 축이 하나 추가 된다. 가로, 세로에 높이라는 축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면적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부피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3D 모델링을 조금이라도 구현해 본 사람이라면, x, y축에 뒤이어 등장한 z축을 허구한날 보면서 살았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https://forums.wildstar-online.com/forums/index.php?/topic/48843-rotation-by-degrees/)
(이미지 출처: http://www.boutin.de/axis-orientations-from-3ds-max-to-unity3d-pt1/ )

우리는 3차원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의 모든 지점은, 저 x, y, z 세 개의 좌표를 통해서 모두 표현이 가능하다. 위의 이미지는 3D 모델링의 가장 기본이 되는 뼈대를 보여주고 있지만, Etch A Sketch로 마이클 잭슨을 그려낸 것 같은 장인정신이 발휘되면, 실제와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수준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럼 4차원이란 뭘까. 부피의 개념을 만들어준, 우리 3차원이 가지는 '높이의 축' 말고 또 다른 하나의 축이 추가되는 것이다. 저 3차원 축에 다른 방향으로 화살표를 하나 더 끼워넣는다고 그게 새로운 축이 될 수는 없다. 어차피 저 3차원 축 그림 안에 다른 어떤 화살표를 아무리 끼워넣는다 한들 그건 전부 그냥 3차원 안에 존재하는 직선일 뿐이다.

사실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 단계 낮춰서 생각해보면 된다. 질량의 존재가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주공간을 매트리스 같은 평면으로 낮춰서 이해한 것처럼, 한 차원 아래인 2차원은 우리가 사는 3차원을 이해하기에 용이한 도구다. 3차원에 사는 우리에게 축이 하나 추가된 4차원은, 마치 2차원에 사는 누군가에게 축이 하나 추가된 3차원을 설명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2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과 3차원의 원뿔이 있다. 그리고 이 3차원의 원뿔을, 2차원에 찔러넣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2차원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들로 보일 것이다.

원으로 보이거나, 삼각형으로 보이거나, 조금 비스듬하게 찔러넣으면 부채꼴로 보일 수도 있고, 아예 꼭지점만 살짝 찔러넣으면 하나의 점으로 보일 수도 있다.

2차원 공간의 사람에게 '원뿔'이라는 도형은 상상할 수가 없다. 원뿔은 애초에 3차원적 속성을 지닌 도형이다.  물론 손으로 그린 저 그림은 2차원이다. 2차원 속에 3차원의 형상을 구현했다. 저게 우리에게 3차원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3차원의 존재이기 떄문이다. 우리는 2차원으로 그려져 있어도 3차원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저 2차원의 사람은 맨처음 그려놓은 원뿔을 봐도, 그저 '점선이 그려져 있는 부채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개념에는 z축이 존재하지 않기 떄문이다. 2차원의 x축과 y축은, z축의 기준으로는 그저 하나의 점이다. 가로, 세로로는 무한한 공간을 펼칠 수 있지만, 높이의 관점에서는 1픽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3차원의 세계로 돌아와보자. 3차원의 우리에게는 가로, 세로, 높이로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이런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1픽셀, 한 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새로운 축은 무엇일까?

'시간'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축 안에서 한 점 이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은 엄밀히 말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말을 꺼내는 순간 과거로 지나가버리니까. 위 그림에서 2차원의 존재가 자신의 바로 앞, 바로 뒤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2차원의 장면들을 볼 수 없듯, 우리도 시간 선상에서 바로 앞, 바로 뒤의 3차원 공간을 볼 수 없다. 과거를 기억할 수는 있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볼 수는 없다. 그것이 네 번째 축을 가지지 못한 우리의 한계다.

이러한 한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보려는 시도는 종종 있어왔다. '입체파'로 불리는 피카소의 그림은 3차원 공간에서 각각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개체의 대상을 2차원의 한 면에 쑤셔넣는 방식이다. 2차원은 3차원의 딱 한 지점에서 본 모습만 재현할 수 있다. 3차원이라는 말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학시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인물을 평면적 인물, 이야기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는 인물을 입체적 인물이라고 배우지 않는가.)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이 큐비즘, 다시 말해 입체파다. 3차원의 축을 때려부숴버린 뒤에 조각난 입체면들을 2차원의 축에 맞추어 재조립한 그림인 것이다.

피카소가 2차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3차원을 끌어들였다면, 마르셸 뒤샹은 4차원의 어떤 면을 끌여들여 보려고 했다. 맞다. 고등학교 때 봤던, 남자 소변기 전시해 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였던 충격과 공포의 그 사람이다. 그런 짓만 하는 건 아니고 실제로 그림도 못그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위 그림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다. 후에 뒤샹 자신이 이 그림을 직접 재현한 사진도 제법 유명하다.

그림을 보면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의 연속된 시간들을 2차원의 평면 한 지점에 모두 모아놨다. 어차피 그 시간 동안 계단은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똑같은 모양 그대로일 것이고, 내려오는 사람의 중첩된 시간만 연속적으로 보일 것이다.

어렴풋이, 4차원의 축 선상에서 펼쳐지는 3차원의 개념이 살짝, 상상되지 않는가. 뒤샹의 그림이 4차원의 시간축을 한 장의 2차원 이미지에 표현한 것이라면 쿠퍼가 블랙홀 속에서 만난 큐브는 4차원의 시간축을 3차원의 공간적인 표현으로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는 '머피의 방'이라는 3차원 단일 공간의 중첩된 시간들을 하나의 통합된 시공간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4차원의 세계에서는 우리 개념의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축 선상의 우리는 그 한 점을 차지하고 사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아주 자연스럽게 '선후관계'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4차원의 축을 볼 수 있는 존재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2차원의 존재를 다시 떠올려보자. 2차원의 주인공에게 '부피'는 우리의 '시간'과 비슷하다. 애니메이션의 프레임 한 장 한 장을 그려놓은 종이를 쌓아놓은 더미를 보면, 그 한 장 한 장 프레임 속의 주인공에게는 자신의 앞뒤 그림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순서'로 보이겠지만 우리에게 그 종잇더미는 그냥 하나의 '덩어리'다. 분절된 개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4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의 시간은 하나의 덩어리다. 그곳에서는 모든 영원이 한순간이다. 영화에서 '5차원의 존재들'이 블랙홀의 큐브가 연결되는 지점을 '머피의 방'으로 연결해 주었기 떄문에 쿠퍼가 머피와 함께 살아온 시간들, 중력장의 이상을 발견하고 NASA를 찾아가는 순간들, 그리고 쿠퍼가 떠난 뒤에 그를 원망하며 수십년을 살아온 머피의 시간들까지, 머피의 방에서 흘러온 그 모든 순간들은, 블랙홀의 큐브 안에서는 그저 한 순간, 찰나와도 같은 것이다.

선후관계가 없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쿠퍼가 중력장을 이용해 책장을 떨어뜨리는 것도, 모래로 좌표를 알려주고, 모스부호를 통해 중력 방정식의 해를 전해주는 과정들도,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미래에서 그것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순간, 쿠퍼의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머피의 법칙'이란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뜻이라는 쿠퍼의 말이, 3차원의 시간 축을 뛰어넘은 영역에서는 모든 시간의 사건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를 새롭게 얻는 것이다. 쿠퍼 자신이 한 말을 쿠퍼 스스로 재현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동시에, 큐브가 닫히는 순간 쿠퍼가 말한다. 이 모든 것을 이끌고 있는 '저들'도 결국 '우리'라고. 자신이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시간축을 뛰어넘은 것처럼, 똑같은 일을 또 다른 시간축 어딘가의 우리가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미래의 진보된 인류들도 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들이 지구를 떠나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수 있게 된 것도 쿠퍼와 머피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결국 3차원의 어느 시점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웜홀을 열어주고, 블랙홀 안에 큐브를 열어주는 등 에지간히 애를 써준다. 그들도 결국 머피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인 것이다.

사실 그 존재들은 4차원이 아니라 5차원이라는데, 5차원부터는 아예 상상도 못하겠다. 시간축을 뛰어넘은 또 하나의 축은 무엇일까, 중력이려나. 어쩌면 작가가 차원문제로부터 오는 모든 딴지를 회피하기 위해 이 모든 과정을 손에 쥐고 있는 존재를 차원 수 하나 더 올려서 5차원이라고 설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의 결론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자, 뭐 그런거다. 미래의 존재들이 시간축을 간섭하며 쿠퍼에게 큐브를 열어줄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들이 쿠퍼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 아니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많은 장면들에서 울컥했지만, 가장 강렬하게 전율이 왔던 장면은 머피가 '유레카!'를 외치는 장면이었다.  긴긴 문제의 답이 결국엔 드러나는 순간. 그 순간이 주는 전율이 스크린 너머 내 몸까지 전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라는 하나의 문장이 영화를 관통하는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후서 3:8)
이 얼마나 물리학적인 구절인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3차원의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에게는 시간은 한 덩어리이고, 과거와 현재는 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유기적인 결합이다. 그러니 미래를 알기 원하고 기도로 미래를 바꾸어가려는 신앙인들이 있다면, 열심히 기도하며 동시에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 그게 곧 미래가 되는 것이니까.

이 영화에서 '하나님'을 봤다는 신앙인들은, 부디 그 속에서 이러한 메시지도 함께 봤기를 바라는 바이다. 5차원의 존재들은 쿠퍼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우리는 시간축을 뛰어넘을 수 없으니 그저 '믿고' 그렇게 애쓰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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