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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Mar 19. 2018

디즈니표 저항정신

<블랙팬서>와 <흑표당>

*<블랙팬서>와 <겟아웃>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1. 얼마 전 뉴욕여행 중 아프리칸 지인의 도움으로 비밥의 기원이라는 할렘 '민톤스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9시, 11시 공연 두 번이 있었는데 9시 공연에 자리를 제법 많이 차지하고 있던 백인들이 나가자 11시 공연에는 흑인들로 가득찼다. 역시 흑인인 여성보컬은 한 곡을 끝내자 무대에서 '<블랙팬서> 보신 분!'하고 소리쳤고, 좌중의 반 이상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번쩍 들었다. <블랙팬서>는 바로 전날 개봉이었다.


2. 함께 간 지인에게, 아프리칸들에게 <블랙팬서>의 의미가 특별한지 물었다. 그는 '백인보다 똑똑하고 부유하며 강인한 최초의 흑인히어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그걸 빼고 그냥 영화로도 훌륭했다'면서 '부산에서 촬영도 하지 않았느냐'하고 찡긋했다. 덧붙이면 켄드릭 라마가 프로듀싱한 음악 덕분에 영화BGM에 맞춰 상영관 가득한 흑인들이 클럽처럼 그루브를 타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3. 클럽 정도면 양호하다. 극중 와칸다의 공용어를 실제로 쓰고 있는 남아공에서는 영화가 끝나고 이런 광경을 낳았다. https://youtu.be/YWH29J0-3Hc

4. 실제로 영화를 보니 열광할만 했다. '최초의 흑인 히어로' 수준이 아니라 주제부터 스타일까지 아프리칸 정체성과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고 구워먹고 삶아먹고 모든 걸 다 그걸로 꽉 채운 영화였다. 흑인배우로 가득찬, 흑인이 주인공이고 흑인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토록 거대한 예산의 블록버스터는 처음이니까. 바이브 넘치는 흑인들 사이에 서있는 마틴 프리먼은 꼭 리메이크 된 <고스트 버스터즈>의 크리스 햄스워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더 간지를 챙겨줬지만.


5. 흑백 한정 인종차별 문제에 있어 마틴루터킹과 말콤X로 상징되는 평화주의와 분리주의의 두 노선은 미국 창작물에서 자주 재생산되는 단골 소재다. 이미 <X-맨>시리즈에서 자비에 박사와 매그니토로 그려졌던 이 상징은, <블랙팬서>에 이르러 실제 흑인 문제를 내세우며 보다 직접적으로 그려졌다.


6. 실제로 <블랙팬서>와 같은 이름을 쓰는, 한국어로는 '흑표당'으로 번역되는 'Black Panther Party'라는 흑인 인권단체가 6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다. 공식적인 연관성이 언급된 바는 없지만 마블 코믹스에 '블랙팬서'가 처음 등장한 것과 '흑표당'의 창당이 같은 1966년 불과 3개월 차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관련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할 거다.

7.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 '블랙팬서'는 마틴루터킹에 가깝게 그려지는 반면, 같은 이름을 쓰는 '흑표당'은 베레모와 총기로 상징되는 '무장투쟁'의 이미지로 대표되며 실제로 말콤X의 철학을 계승한 단체다.


8. 이미지는 그렇긴 하지만 '흑표당'의 총기는 어디까지나 자위권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사용하기 보다는 당시 흑인들에게 무분별하게 가해졌던 공권력의 폭력을 경계하는 역할을 했다. 합법적인 총기소지 규정을 준수하며 일종의 시위의 선을 넘지 않는 운동방식은 당시 흑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9. 무장단체 이미지와 달리 실제 '흑표당'의 주력 사업은 미국의 지역사회가 공급해주지 못하는 기본적인 복지를 흑인 공동체 스스로가 자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무상 급식, 무상 의료 등이 그 주요 내용이었으며, (원래 무상으로 제공되었어야 하는)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며 무장단체의 이미지를 이어갔다. 다시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영화에서 '블랙팬서'가 최종적으로 이르는 지점과 만난다.


10.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흑인사회 내에서도 상징적인 인물이며 나아가 미국민 상당수가 그리워하고 있는 인기 대통령이지만, 바다 건너 케냐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거리 곳곳마다 오바마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그와 관련된 상품을 판다. 그의 아버지가 케냐 부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데, 오바마의 이름 '버락'은 케냐에서 가장 흔한 남자아이 이름 '바라카'의 영어 버전이다. 한인 출신 Mr.김철수가 미국 대통령이 된 셈. 아니, 일본 수상이 된 기무상이면 더 비슷할까.


11. 노예로 끌려갔던 대륙에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프리카 대륙에 사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을 지 새삼 생각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로 미국 내 일부 흑인사회에서는 젠틀한 오바마의 이미지를 두고 '집권을 위해 지나치게 백인 흉내를 낸다'는 비판 또한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규범자체를 백인의 것으로 규정하고 반문화를 흑인의 것으로 내세우는 문화는 계속해서 어려운 지점들을 낳는다.


12. <블랙팬서>가 흑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자명해 보이지만, 결국 킬몽거의 혁명이 좌절된 헐리우드적 전개에 입맛이 씁쓸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혁명보다는 자선, 그루브로 칠해놔도 결국 제작사는 디즈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비브라늄으로 전세계를 다 몰살시키자는 주장에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인데. 기울어진 운동장은 늘 강자를 더 품위있게 만들어준다. 폭력을 독점하고 너넨 쓰지 말라하니.

13. 오바마가 그랬던 것처럼 '흑표당'이 살아남는 길도 결국 백인들의 규율을 준수하며 그들의 사회에 편입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실패한 블랙팬서는 인도주의적 정치참여와 무장폭력투쟁이라는 두가지 분기점을 남기고 60년대를 달궜던 혁명의 열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4. 뉴욕 서점 곳곳에는 '페미니즘'과 '인종차별' 섹션이 여전히 제일 앞 매대에 나와있었다. 그 이슈가 가장 오랫동안 뜨거웠던 나라에서 여전히 이 책들이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기도 씁쓸하기도 고무적이기도 했다.

15. 와카비 역의 다니엘 칼루아를 본격적으로 알린 <겟아웃>에는 흑인의 육신을 탐하는 백인들 사이에 동양인 한 명이 섞여있다. 그가 흑인의 육신을 탐내는 지점은 순수하게 그 신체성을 선망하는 백인들과 다를 것이라는 칼럼이 하나 있었다. 칼럼에 따르면 미국사회에서 흑인과 동양인의 소수자적 정체성은 그 층위가 다른데, '사회적 지위'와 '내부자성'의 두축이 그것이다. 흑인 계층은 계급적 하층민을 주로 형성하는 반면 미국사회의 '주 구성원'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 아시아인들은 주로 중산층 이상의 분포를 보여주긴 하지만 여전히 미국사회의 '외부자'로서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로 영화 속 동양인은 흑인의 육체를 통해 미국사회의 주류로 편입하고 싶어하는 욕망의 구현이라는 것.


16. 흑인을 전면에 내세운 <블랙팬서>에, <원더우먼>의 뒤를 이어 <캡틴마블>과 <블랙위도우>의 여성 히어로도 대기 중이지만 아시아인은 변변한 사이드킥으로도 찾아볼 수 없다. 자갈치 시장에서 '사고우치귀 조와하눈 애둘이라고?' 정도 내뱉을 뿐. 흑인에 비해 아시아인들은 자기들 나라에서 영화도 잘 만들고 웬만큼 잘먹고 잘살아서 그리 절실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킬몽거가 외치는 '전세계 흑인동포론'에 그리 공감이 안 되기도 할 거고. 마블에서 동양인 히어로가 나온다 한들 한국인들이 뭐 얼마나 열광할 것인가. 남아공 극장의 저런 진풍경이 나올리는 절대 없다.


17. 그래도 가오갤의 매력적인 맨티스는 반가웠다. 더 보면 좋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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