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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Feb 10. 2021

신파는 죄가 없다

허구와 실화, 감동을 대하는 두 가지 자세에 대해

슬픈 영화가 있다.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 '이건 엄청 슬픈 내용이고 본 사람들 대부분이 많이 울었다'라고 미리 알려주면 더 슬프다고 느낄까, 아니면 시치미 뚝 떼고 있다가 갑자기 슬픈 내용이 드러나는 게 더 슬플까. 내 경우는 후자였다. 영화는 최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채로 보는 걸 좋아하는데, 슬픈 장면은 예기치 못한 채 만났을 때 더 많은 눈물을 쏟는 것 같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살면서 만나는 슬픔도 대개는 아무 예고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래서 더 바닥까지 무너뜨리는 법이다. 미리 준비할 시간을 주면 조금은 견딜 만할 텐데 삶은 그리 자상하지 않다.


한국 영화계가 이런 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던 시기가 2000년대 초반이다. <엽기적인 그녀>를 시작으로 '골 때리는 영환 줄 알았는데 막판에 울리는' 전개는 한국영화의 철저한 흥행공식이 된다. 거의 모든 영화들이 깨발랄한 로맨틱코미디인 척하다가 후반부에 갑자기 최루성 비극을 쏟아붓는 패턴을 보였고, 또 그게 먹혔다. 나 역시 이 시기에 본 영화 몇 편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으니까. 어느 평론가는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 관객들은 극장에 가서 모든 감정을 다 경험하고 와야 아깝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게 슬픈 영화를 전달하는 정석이라기엔 포스터부터 눈물 글썽이는 얼굴로 채워진 영화들도 적지 않다. 대놓고 제목이 <새드무비>인 영화도 있었다. 발랄한 척하는 영화가 예기치 못한 슬픔으로 가슴을 때린다면, 이쪽은 처음부터 울고 싶은 사람들을 부르는 식이다. 준비가 안 돼 있는 사람을 울리는 것과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눈물을 받아내는 것. 흥행면에서는 단연 전자가 앞설 수밖에 없다. 예기치 못한 눈물이 훨씬 인상적인 법이고, 애초에 이미 울고 싶은 사람보다야 별생각 없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

학부시절 미디어심리학 수업에서 자유 연구과제가 주어졌을 때 저걸 알아보고 싶었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미리 알려주고 보여줬을 때 더 감동적일까, 아니면 예고 없이 보여줬을 때 더 감동적일까. 그래서 실험참여자를 두 집단으로 나눠 한쪽에는 '이건 엄청 감동적인 영상으로 유명하고, 본 사람들도 다들 눈물 났다는 반응 투성이였다'라고 알려주고, 다른 한쪽에는 조회수 같은 아주 객관적인 정보들만 제공한 채 감동적인 영상에 대한 반응을 측정하는 실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실험을 준비하다 보니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2시간짜리 영화를 매번 보여줄 수야 없으니 인터넷에서 2~3분 내외의 감동 영상을 찾아야 했는데, 이런 짧은 클립은 감동적인 공익광고처럼 '연출된 픽션'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 감동적인 장면을 누군가 촬영한 '감동 실화' 영상이 있었다. 두 영상은 느낌이 아주 달랐다. 둘 중 한 가지만 사용해서는 제대로 된 반응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계획을 바꿔 실험 참여자를 네 그룹으로 나눴다. 감동에 대한 사전정보 유무의 한 축에, 영상이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구분하는 한 축이 더해진 거다. 그러니까 '픽션-감동정보', '픽션-중립정보', '논픽션-감동정보', '논픽션-중립정보'의 네 개 그룹이 되었다. 픽션 영상은 감동적인 연출로 유명한 대만의 공익광고였고, 논픽션 영상은 파병되었던 군인이 가족들 몰래 돌아와 놀래켜주는 장면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피실험자를 두 배 더 모아야 했고, 보여주는 시간도 두 배는 더 걸리는 고생을 해야 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심리학 실험의 결과에는 항상 일정한 경향이 반영된다. 그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이다. 사람들은 감정에 흔들리는 것보다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여기에 인위적인 감정을 조장하며 자기 반응을 측정한다는 사실까지 알면 웃음이든 눈물이든 더 인색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경향은 우리 실험에서도 고스란히 보였다. 픽션 영상을 본 사람들은 중립적인 정보를 제공했을 때보다 '굉장히 감동적인 영상이고,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자기는 '덜 감동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양쪽 모두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는 더 감동할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눈물을 쥐어 짜내려는 어설픈 시도로군. 다른 사람들이라면 넘어갈 수도 있겠어. 하지만 난 아니지."라는 뜻이다. '눈물 나고 감동적인 영화'라고 홍보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영화인 척 홍보하는 것이 좀 더 관대한 감정을 얻어낼 거라는 실험의 예상이 적중한 지점이었다.


의외의 지점은 '논픽션 영상' 그룹에서 나왔다. 이쪽에서도 두 그룹 모두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감동할 것'이란 평가는 똑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픽션 영상'과는 반대로 중립정보 그룹보다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고 알려준 그룹에서 감동의 점수가 더 높게 나왔다. 연출된 영상이 아니라 실제 영상이라는 점이 작동한 것이다. 만들어진 감동 앞에서는 다소 무딘 반응을 보여도 이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남들은 울었을지 몰라도 난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아. 하지만 감동적인 실제 현장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다 울었다는데 '나는 별로 안 그런데?'라고 얘기하는 건 너무 못된 사람 같아 보인다는 뜻이다. 심리학 실험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문장에 한 가지가 추가되는 순간이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다 보여주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진실에 반응한다. 좀 더 정확히는 거짓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연출된 감동에는 인색해지고 날 것의 감동에는 마음을 연다. 감동의 반대도 마찬가지다. <현대 원시주의의 망상>라는 짧은 다큐멘터리는 사실과 비사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설명할 때 가장 적절한 예시다. 독특한 사상을 가진 한 남성이 등장하는데, 그는 신체를 훼손함으로써 이를 표현한다. 각종 문신과 피어싱을 지나 그가 도달하는 것은 '총상'이다. 간혹 학창 시절 자신의 치기를 드러내기 위해 '담배빵'이나 '칼빵'을 자기 몸에 일부러 내는 아이들이 왕왕 있는데, 정확히 같은 선상의 '총빵'인 것이다. 영화는 그가 '총빵'을 내러 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실제로 총을 맞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나는 종종 강의를 할 때 이 자료를 활용한다. 학생들의 반응이 볼 만하다. 일단은 문신과 같은 개념인지라 총을 맞아도 최대한 안전한 자리에,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화력의 총으로, 각종 의료 처치를 동반한 상태에서 쏘는데도 이미 장전하는 순간부터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마치 자기가 맞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비를 위해 영화 <원티드>의 한 장면을 함께 보여준다. 똑같이 사람에게 총을 쏘되, 훨씬 잔인하고 자극적인 연출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영화 속 총격전에는 무딜 대로 무뎌져 있다. 수십 발 총을 맞고 피칠갑이 되어도 끝까지 쓰러지지 않는 비장한 주인공은 물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잔인한 연출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원티드>는 사람의 얼굴에 정면으로 총을 쏘고, 뒤통수가 터져나가는 등 수위 높은 연출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도 나오지만, 오히려 아드레날린이 도는 걸 느끼며 화면에 끌려 들어가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랬던 사람들이, <현대 원시주의의 망상>을 보면서는 고작 팔뚝에 총구만 가져다대도 비명을 지르는 거다. 전자는 누가 봐도 과장된 '비현실'일 뿐이고, 후자는 그 현실의 감각이 오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실과 비사실의 여부에 따라 감정을 수용하고 드러내는 세팅을 바꾼다.

ⓒ <Wanted>

드라마와 예능이 섞인 콘텐츠 <두니아>를 제작하면서도 비슷한 지점을 만다. 오랜 세월 TV 예능의 대명사였던 '리얼  버라이어티'를 벗어나 대놓고 상황극인 '언리얼'을 표방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혼란이 예상치를 상회다. 시작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이건 드라마인가요, 예능인가요' '대본인가요 실제 상황인가요' 묻는 사람이 계속 등장다. 차라리 그냥 재미가 없다는 불만은 다른 영역이다. 연출력의 부족일 수도 있고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르를 묻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워프며 공룡이며 어차피 출발부터 말도 안 되는 설정인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들에게 자유롭게 맡기는 '리얼'파트도 결국 상황극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게 뭐 중요한가 그냥 넋 놓고 보면 되지 생각했는데 시청자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드라마인지 리얼 버라이어티인지에 따라 세팅을 바꾸고 봐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거다.


애초에 만들어지는 콘텐츠에 '100% 리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연출자라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제작진의 개입 없이 출연자들이 자유롭게 여행하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실제 현장에서는 일군의 스탭과 카메라 감독들이 화면 밖에서 따라다니고 있다. 누가 봐도 방송 촬영인 만큼 주변 사람들도 더 적극적이고 친절해진다. '관찰 예능'을 표방하는 포맷들은 그걸 피하기 위해 카메라마저 곳곳에 숨기고 제작진은 아예 다른 건물에서 지켜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를 찍고 있다'는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평소였다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당연히 하던 어떤 행동들은 하지 않는다. 그건 '사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지는 다큐멘터리도 벗어날 수 없다. 몰래카메라가 아닌 이상 피사체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는다.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와 다를 바 없는 신세다. 찰은 그 자체로 결과에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시청자에겐 기준이 필요하다. 드라마라면 일단 모든 것이 대본과 연출이라는 인식이 세팅된다. 어차피 전부 연기이기 때문에 인륜을 거스르는 장면들을 만나도 실제 배우에게 악플을 달 일은 없다. 더 악랄하게 느껴질수록 차라리 그 연기력에 감탄을 하겠지. 하지만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는 예능에서라면 사소한 뉘앙스 하나에도 논란이 들쑥날쑥한다. 재미를 위해 다소 연출된 상황이어도 꽤 많은 사람들은 그걸 '리얼'로 받아들인다. 예능을 볼 때는 그렇게 세팅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영화라면 발달장애인 주인공이 등장해서 웃음을 만들 수 있다. 그의 시련을 보여주는 장면일 수도 있고, 독특한 행동 때문에 주변인들이 악의 없이 웃는 장면일 수도 있다. 이런 소재의 영화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장면이다. 예능이라면 상상하기 어렵다. 발달장애인의 독특한 행동을 보고 웃는 주변 사람들? 방송 나가면 큰일 난다. 영화라면 미묘한 지점까지 불편하지 않게 이상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완벽한 순간은 나타나기 어렵고 그만큼 카메라에 담기도 어렵다. 영화 속 장애인 주인공에게 온갖 잡동사니를 집어던지며 폭언을 내뱉는 몰상식한 배역들이 있다 한들, 예능에서 슬쩍 비꼬는 말 한마디 뱉은 사람이 훨씬 큰 분노를 살 거다. 마구 총을 쏴대는 <원티드>와, 조심스럽게 총상을 내는 <현대 원시주의의 망상>의 충격이 비교하기 어려운 것처럼. 사람들은 '실제'라고 느끼는 것에 반응한다. 감동에는 더 쉽게 마음을 열고, 분노에는 더 예민해지는 방식으로.

ⓒ <Any Day Now>

'리얼 버라이어티'보다 좀 더 본격적으로 사실과 비사실이 뒤섞여있는 장르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일 거다.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졌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밋거리다. 결국엔 전부 대본과 연기로 만들어진 '픽션'이 되고 이미 엄청난 각색을 거치느라 '실화향 0.02% 첨가'인 수준이 되어도, 사람들은 그 출발점이 실화라는 이유만으로 굉장히 관대해진다. '전 세계를 울린 감동 실화!'라는 홍보 문구는 지치지도 않고 넣는다. 실험으로 확인했던 중요 변수들이 다 들어가 있는 문장이다. '전 세계를 울린' '감동 실화'. 전 세계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이거 보고 다 울었는데 심지어 이게 실화라는 걸 강조해줘야 나도 이성적인 척 안 하고 같이 울 마음이 생긴다. 지난한 홍보문구만 봐도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는데 괜한 실험을 한 것도 같다.


하지만 '실화'에도 여러 영역이 있다. 역경을 극복한 휴머니즘 스토리는 극화하기도 좋고 다소 과장을 섞어도 사람들이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사의 비극이라면, 혹은 근래에 일어났던 재난이라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감동의 지점이 달라지는 실화라면? 문제가 좀 민감해진다. <변호인>과 <국제시장>의 감동을 각각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지어낸 이야기에 담긴 가치관이야 수용자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다. 보편적인 사회윤리를 한참 벗어나도 가짜 이야기인데 무엇이 문제랴. 애초에 이야기의 원형인 신화, 성경, 민담이나 전설들부터가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그래서 이야기인 거다. 보편 윤리를 얌전히 따르는 이야기는 재미있기 어렵다. 더 나가 윤리 규범이라는 것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생긴 셈이다. 그러니 규범 밖에서 활보하고픈 욕망 역시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것이고, 그런 장면을 담은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윤리규범을 벗어난 그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흥미로워하고 끝내면 안 된다. 감동실화야 규범을 벗어난 일이 감동실화가 될 리가 없으니 상관없다. 살인사건이라면 어떨까. 허구의 이야기에서는 살인만큼 흔한 것도 없다. 악당들을 죽이는 정의의 사도는 진작에 치워두자.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데도 묘하게 매력적으로 묘사되는 캐릭터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화를 기반으로 그런 연출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실제로 피해자가 존재하니까. 살인자가 매력적으로 묘사된 작품을 그 피해자의 유족들이 보게 된다면 심정이 어떨까. 정 그런 연출이 하고 싶다면 감정적인 유착이 남아 있는 이가 없는 시대까지 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실화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거다. 물론 그 정도쯤 되면 실화가 가지는 힘 자체가 많이 퇴색되겠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세월호 참사가 그 예다. 이 사건을 불과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펀딩까지 받아가며 극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심지어 공개된 몇몇 조악한 자료들에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신중함 대신 말초적인 접근이 느껴졌다. 거센 논란 속에 펀딩이 중단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제작자들이 정확히 어떤 마음으로 기획을 시작했는지 알 수야 없지만 충분한 시간이 지나 조심스럽게 접근해도 민감할 이야기를 조급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들었다는 의심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그렇게 비난한 사람들도 대부분 <타이타닉>은 눈물을 흘리며 봤을 거다. 사건의 전후 맥락은 여러모로 다르고 비극의 크기를 비교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타이타닉'은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남긴 사건이다. 이를 소재로 청춘남녀의 사랑을 다룬 통속극이 가능했던 건 비극의 참혹한 실감으로부터 80년이라는 거리를 두었기 때문일 거다. 심지어 사는 땅까지 다른 한국인들에게야 허구나 다름없겠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아직 조심스런 지점들이 남아있는 사건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치밀한 고증과 조심스러운 접근을 인정받고 있지만, 그 치밀한 영화에서도 실제와 다르게 묘사된 인물이 있어 유족들이 영화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감정을 유발하려는 영화가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비난을 위해 '신파'라는 단어부터 꺼내드는 건 좀 게으른 반응이다. '신파'는 애초에 형식미에 갇혀 있던 고전극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초기에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기 위해, 후기에는 인간사의 다양한 감정을 자연스러운 문법으로 표현하고자 일어났던 연극 사조를 일컫는 말이다. 한자 그대로 'New Wave'인 셈이다. 지금은 촌스러움의 대명사로 쓰이는 단어가 실은 그 의미 자체부터가 '세련됨', '새 것'을 뜻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감정을 유발하려는 연출 자체가 거부감을 일으킬 일은 아니다. 찬사를 받는 영화들 중에서도 서사 자체는 '신파'라 욕을 먹는 영화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경우도 많다. 중요한 건 그 연출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의 여부일 뿐이다. 눈물을 유도하는 연출 자체를 욕할 것이 아니라, 그 연출이 얼마나 세심하지 못했는가를 아쉬워할 일이다. 화면 속 감정을 반복서술할 뿐인 격정적인 음악, 배우를 몰아붙이는 듯한 오열 연기와 이를 꽉 채운 클로즈업과 슬로모션, 렌즈의 과노출과 필터의 힘을 빌려 뽀얗고 하얗게 연출한 회상신. '신파'연출이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도식성에도 있다. 형식미를 벗어나며 만들어진 단어가 다시 도식성에 갇히는 순간이다.


최근에는 감독들 또한 이러한 비판을 의식해, 감정적인 클라이맥스 신이라 하더라도 저 모든 요소를 다 취하진 않는다. 모든 요소를 동원해 과잉감정으로 가득 찬 장면은 줄어드는 추세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감정적인 클라이맥스에 유난히 엄격하다. 실패한 연출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유독 '눈물'을 유도하는 연출이 욕을 많이 먹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심지어 눈물을 쏟게 만드는 데 성공했어도 욕을 먹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여전히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게 픽션일수록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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