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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Apr 01. 2021

말하기의 다른 방법

<톡이나 할까?>를 만들며 발견한 '문자대화'의 결.

"OO는 생물이다" 만큼 진부한 표현도 없다. 저 'OO'에 들어가는 단어를 대단해 보이게 만들고 싶은 속셈은 알겠지만, 실은 저 자리엔 어떤 관념을 넣어도 보통 맞는 말이 된다. '생물이다'라는 표현은 결국 '일단 만들어 놓으면 내 생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뜻인데, 내 생각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방송도 생물이다. 처음 기획과 섭외는 연출자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지 몰라도, 일단 세상에 등장하고 나면 자기 길을 자기가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 길은 대중의 반응과 호흡하며 생기기도 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연출자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결국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창작물이 완전한 통제에서 점점 벗어난다는 뜻일 텐데, 그만큼 살아있는 무언가란 이야기니까 반겨야 할 일이다.


<톡이나 할까?>를 처음 구상했을 때 그렸던 것은 앞서 다른 글로 한 번 정리했었는데, 실제로 찍고 편집하면서 새롭게 느낀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1. 글은 말과 다르다, 확실히.

'왜 카톡으로 대화하냐'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단 답답하다. 말로 하면 훨씬 빨리, 속시원하게 많은 말을 꺼내놓을 수 있는데 카톡을 두드리는 건 한참 걸린다. 스마트폰을 자기 몸처럼 쓰는 젊은 세대야 그 간극이 훨씬 적지만, 출연한 사람이나 보는 사람의 연령대가 올라가면 그 답답함도 배가 된다.

그 답답함이 만드는 소통이 있다. 말에는 동시성이 있다. 일단 발화하면, 입에서 나오는 동시에 존재하고, 인지되고, 사라진다. 말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어도 추임새가 있고, 높낮이가 있고, 억양과 감정이 있기 때문에 '소리의 형태'로만 인지되어도 무언가가 전달된다.


하지만 글은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대충 얼버무리는 것이 안 된다. 억양과 강세 없이, 오직 문자 자체가 의미하는 것으로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글은 '아직 발화되지 않은 상태로서' 내 눈에 보인다. 일상에서 모든 말을 내뱉기 전에 머릿속으로 문장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사람은 없다. 입에서 나와야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인지된다. 하지만 글은 발화하기 전에, 즉 전송버튼을 누르기 전에 쓰는 동안 내 눈에 보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눈으로 보면서 스스로 정리가 된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좀 더 명확해지고, 때론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며, 속 깊은 이야기를 하려면 어쩌면 용기가 조금 더 필요한 대화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대화의 장에서는 모두가 조금씩 더 정확해진다.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어떤 감정인지를 돌이켜 본다.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정제해본다.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대화한다. 평소에는 사용해보지 않은 언어로 대화를 나눠보는 경험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놀라운 것은 이 '발화 이전의 과정'을 시청자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목소리로 하는 대화에서야,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이내 삼킨 말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저 말을 꺼내기까지 어떤 생각들을 거쳤는 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보인다. 어떤 말을 썼다 지우고, 무슨 표현들을 거치고 고쳐서 저 말을 꺼냈는 지 알 수 있다. 말하기 전의 머릿속까지 볼 수 있는 토크쇼인 셈이다.



2. 먹히는 말이 없다.

대화에 열이 오르면 우리는 종종 서로의 말을 가로 막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의 첫머리를 꺼내다가, 서로에게 먼저 이야기하라며 휘휘, 손을 내젓기도 한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자기 순서를 받은 다음 잊지 않고 다시 상대의 말을 호출하기도 하지만, 말은 꼬리를 물기 마련이라 한쪽 말의 화제가 만발해 버리면 먹힌 말의 순서는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문자 대화는 '말을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 입으로 하는 말은 음성 신호고, 음성 신호는 동시성이라 일단 말을 시작했어도 누군가 치고 들어오면 끝내 완성하지 못하는 것도 가능하다. 청각은 두 사람의 말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자는 상대가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하는 중이어도 내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상대의 말이 아무리 길게 이어지고 있어도 일단 내 문장을 전송하면 그대로 두 사람의 눈앞에 존재한다. 먹히지 않고 덮이지 않는다. 이 말을 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쓰기를 중단하는 것 뿐이다.


물론 서로 신이 나서 자기 말만 신나게 하다보면 서로 순서야 좀 꼬일 수는 있겠다. 그걸 편집으로 살짝 정리만 해주면, 아무리 서로 바쁘게 대화한 말들도 사라지는 것 없이 존재할 수 있다. 문자대화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3. 표현의 역치가 낮아지는 감정들.

"꺄아아아아악!!" "엉엉엉!!" 같은 격정적인 표현들은 실제로 목소리를 내서 하긴 쉽지 않다. 대화하다가 조금 민망한 드립이 생각났을 때도 그걸 입밖으로 꺼내려면 적당한 톤과 표정까지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자로는 훨씬 부담이 없다. '꺅꺅갺갸가ㅑㄲ꺅!!!'이라고 타이핑하는 것은 목소리를 내서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쉬운 일이지만, 적당한 미소만 동반하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문자에서 자동적으로 목소리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혹은 꽤 무거운 표현, 부담스러운 말도 글씨로는 조금 드러내기 쉬워진다. 때로 너무 진지한 이야기들은, 목소로리로 말하기엔 어쩐지 쑥스러워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내 눈앞의 건조한 글씨로 표현되는 순간,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꺼내놓을 수 있다. 깊은 밤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누군가에게, 마주보고는 못했을 말들을 장문의 카톡으로 남기는 것도 비슷한 이치 아니었을까.


감정이 닦여나간 '정확한 표현'이 문자대화의 장점이라고 얘기했지만 반대로, 어떤 감정들은 간결한 문자라서 오히려 표현하기 더 쉬워질 때도 있다. 이건 정말로, 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실감한 것이었다. 



4. 삶이 단순해지면 사소한 것들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전신마취하고 사랑니 세 개를 한꺼번에 뽑아서 거의 한 달 가까이 뭘 제대로 못 먹었던 적이 있다. 이를 쓸 수 없어 죽을 계속 먹어야 했는데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니 정말 뭐라도 씹고 싶어서 생양파를 썰어 물에 담가 놓았다가 그냥 씹어 먹었다. 매운 기가 다 안 빠졌는데도 아삭아삭한 식감이 반가워 눈이 벌개져서 먹었다. 양파의 단맛과 매운맛이, 그렇게 풍요로운 레이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섭식을 극도로 제한하면 감각이 예민해진다. 바빠서 하루종일 뭘 제대로 못 먹은 채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먹는 방울토마토는 어떻게 그렇게 풍성하고 다채로운 맛이 나는지 모른다. 과즙이 푸악 터지며 가득차는 풍미는 홍수 같다. 그냥 오이 하나도, 맨 식빵 한 장도 맛의 층위가 층층이 느껴진다. 식생활을 단출하게 만들고, 조리의 양념을 싱겁게 해버릇 할 수록 오히려 느끼는 맛은 더 풍성해진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감각의 해상도가 대단히 높아지는 것이다.


<톡이나 할까?>를 연출하면서 스스로 느끼는 재미가 그렇다. 보통의 예능이었다면 왁자한 소란 속에 눈길도 못 끌었을 작은 소리와 표정들이 여기서는 부쩍 눈에 띈다. 가만히 앉아서 말도 안 하니 자극의 기준이 극도로 낮아진다. 아주 미세한 감정들도 극대화 된다. 방송분에서는 음악을 좀 깔지만 편집실에서 가편집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새벽까지 편집실에서 밤을 새고 있어도 옆 방에서는 퇴근한 줄 아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표정도 아닌, 눈동자 하나 굴리는 것까지 의미를 가진다. 다문 입을 벌릴 때 자그맣게 '쩍'도 아니고 '빳'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굶고있다 먹는 방울토마토처럼, 평소에 놓쳐왔던 미세한 감정들이 살아나는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의 작은 눈빛 하나까지 그렇게 유심히 바라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소개팅 자리의 상대방이나, 면접장에서의 면접관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삶이 소란스럽고 특별하지 않게 느껴진다면 자극을 줄여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5. 말하기의 다른 방법.

국민토끼 '베니'의 구경선 작가님은,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에 시각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동화작가로서 그가 보여준 훌륭한 결과물 덕분에 과거 몇몇 방송에 출연하신 적도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들었던 생각이 있는지 가급적 방송은 출연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톡이나 할까?>만큼은, '동등해보였다'고 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신경 안쓰고 정말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실제로 사전 미팅을 할 때도, 김이나 씨와 녹화를 할 때도, 여느 출연자보다도 훨씬 유려한 대화를 편안하게 나눌 수 있었다.


세상엔 말하기의 다른 방법들도 많이 있다.


6. 그리고, 김이나는 쩐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들수록 감탄하게 되는 것은 MC 김이나 님의 역량이다. 


모든 토크쇼에는 대본이 있다. 심지어 대본이 상당히 중요한 장르다. 호스트가 게스트와 주고받는 대화의 상당수는 사전에 이루어진 인터뷰와 취재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능한 호스트들 중에서도, 대본이 없으면 매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이들이 많다.


<톡이나 할까?>에도 당연히 대본이 있다.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면 늘 대본 이상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MC인 이나 님의 힘이다. 덕분에 제작진은 제작진 나름대로 대본을 알차게 구성하지만, MC가 그 이상을 끌어내줄 거란 여지를 늘 남겨놓는다.


모든 제작진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대본에 있는 것도 제대로 다 못 살릴까봐 방송에 필요한 분량의 150%씩 보험으로 구성안을 만들어놓는 경우가 더 많다. MC의 재량을 발휘할 여지를 남겨놓는다는 것은 그가 제작진이 '신뢰할 수 있는 진행자'를 넘어 '의지할 수 있는 진행자'라는 뜻이다. 그건 그가 가진 특유의 센스와 관찰력, 표현력의 발로기도 하지만, 놀라운 준비성의 결과기도 하다. 아마 사람들에겐 전자만 보이고 후자는 잘 보이지 않겠지.

심지어 자신이 잘 모르는 게스트가 나올 때는 우리가 준비해 준 자료 이상을 공부해온다. 인터넷 헤비유저의 능력으로 우리 자료에 없는 트렌드와 짤까지 섭렵해두고, 작가가 출연할 때는 아예 책을 새로 읽어오기도 한다. 


'카톡토크쇼'라는 포맷은 묘한 긴장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준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화하러 온 게스트의 입장이고, 이야기를 끌어내야 하는 호스트의 입장에서는 정말 진이 다 빠지는 일이다. 목소리로 대화할 때 어떤 제스쳐, 의성어, 표정으로 대강 넘어갈 수 있는 뉘앙스들이 텍스트로 들어오는 순간 수많은 맥락의 층이 생긴다. 그 행간을 읽어내고 깊은 얘길 끌어내며, 그 와중에 적절하게 농담까지 던지려면 한 시간 남짓한 녹화시간 동안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대화의 농도가 대단히 농밀해지는 시간이다.


매 회차, 녹화하고 편집할 때마다 느낀다. '김이나 말고 누가 이걸 이렇게 뽑아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아래 영상은 이나언니(고유명사) 헌정 영상.

모아놓고 보니 종횡무진 그의 탁월함이 더 돋보이는 것 같다.

https://youtu.be/tRlajBo4Q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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