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장 오래된 기억은 만화책 <신암행어사>1권과 핑클의 2집 타이틀곡 '영원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둘은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내가 우연찮게 둘을 함께 감상했을 뿐. 핑클의 테이프는 1999년에 발매되었고, <신암행어사> 1권은 2001년에 나왔으니, 내가 테이프를 좀 늦게 사서 오래 들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영원한 사랑'의 그 팀파니와 브라스가 멋지게 어우러지는 인트로는 그동안 들었던 가요들과 전혀 다른 장르로 느껴질 만큼 멋졌고, <신암행어사> 1권은 작화도 서사도 설정도 그동안 봐왔던 만화와는 결이 다른 충격을 선사했었다. 그래서 둘 다 뇌리 깊숙이 박혔는데, 하필이면 내가 '영원한 사랑'을 귀에 꽂은 채 <신암행어사>를 봤다는 게 문제였다.
<신암행어사>는 당시 국내 만화로서는 폭력묘사의 수준이 살짝 높은 편이었는데, 실제 그림의 묘사가 그렇게까지 선정적이지 않은데도 연출의 맥락상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위로 '영원한 사랑'의 황홀한 사운드가 깔리는 것이다. 어쩌다 둘을 그렇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나는 <신암행어사> 1권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자동으로 '영원한 사랑'이 BGM으로 깔려 기분이 이상해진다.
2. 그다음은 두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슬럼독 밀리어네어>였다. 각각의 영화로서 훌륭하고, 특히 <벤자민 버튼>은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보면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영화다.
특별한 주인공의 인생 전반을 통시적으로 돌아보는 유사한 이야기 구조의 이 두 영화는 극장에도 비슷한 시기에 걸려 있었다. 당시 군복무 중이었던 나는 휴가만 나왔다 하면 허기를 채우듯 개봉영화를 몇 편씩 보고 들어갔는데, 그 해 휴가에는 이 두 영화를 며칠 간격으로 연달아 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둘 다 훌륭한 영화고, 특히 <벤자민 버튼>은 내게 두고두고 오래 남을 영화다. 하지만 하필이면 두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나니,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아기 '벤자민'은 마침 그곳이 미국의 부유한 동네였기 때문에 '거꾸로 가는 시간'을 그토록 경이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자말'이 태어난 곳에서 '벤자민'이 태어났다면, 인생이라는 것을 채 경험하기도 전에 어느 정화조에 그대로 버려졌을 거다.
그렇다고 '벤자민이 깨달은 인생의 진리 따위 다 부유한 기득권의 배부른 소리'라고 말해버리면 안 된다. 벤자민이 인생에서 보여준 성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자말의 인생은 그렇게 가치 있었고, 벤자민의 인생은 그렇게 가치 있었을 뿐이다. 둘의 사이가 조금은 좁아지는 세상을 향해 가야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세상은 있는 그대로, 그러할 뿐이다.
3. 그리고 이번 주에 <소울>과 <세자매>를 연달아 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사람에 따라 <소울>의 스포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 원하지 않으면 멈추길 바란다.)
픽사는 항상 좋은 영화를 만든다.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설레는 성정을 갖지 못한 내가 거의 유일하게 항상 설레는 대상이 있다면 픽사의 신작들이다. 빈틈없이 짜인 플롯, 현실의 구현보다 늘 하나의 레이어를 더해 새로운 결을 만드는 놀라운 수준의 시각기술, 그리고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는 창의적인 디테일이 날 설레게 한다. <소울>의 개봉일정을 들었을 때도 꽤 오랫동안 이 영화를 기다리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극장에서 눈물을 흘렸다.
다만 <코코>부터 <온워드>, 그리고 이번 <소울>에 이르기까지 최근 들어 영화를 다루는 픽사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사이드 아웃>이나 <몬스터 주식회사>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그런 놀라운 반짝거림보다, 좀 더 보편적이고 묵직한 감동 쪽으로 비중이 옮겨갔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훌륭한 영화들이고, 열거한 세 영화의 상영관에서 모두 눈이 부어갖고 나오긴 했지만, 앞서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그 창의성과 디테일에 열광했던 나로서는 최근의 변화가 조금 아쉽긴 하다.
어쨌거나 <소울>의 메시지에는 깊은 공감을 했다. 내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몇 달을 준비했던 무대를 마치고 함께 참여했던 학생들이 서로 얼싸안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쏟아내고 있을 때, 연출이었던 나는 한구석에서 텅 빈 기분으로 멍하니 앉아있던 기억. 나쁜 기분도 아니고, 뿌듯하기도 한데, 어쩐지 멍한. '조'가 클럽에서 그토록 원하던 공연을 마치고 나온 순간의 그 표정을 너무도 알 것 같았다. 삶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들이란, 그저 그렇게 어쩌다 콕콕 박혀 별자리처럼 빛날 뿐이지 그것을 위해 살 수는 없다는 것.
또 한 가지 기억도 겹친다.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여섯 살에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서 영원히 산다'는 말을 듣고 너무 두려워서 울다가 토하고 한동안 교회를 가지 않았다. '천국의 영원'이란 너무 아득한 감각이라,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마치 <소울>의 '유세미나'처럼 피자맛도 느낄 수 없는 몽롱한 중립 상태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여섯 살의 상상력 속에서도 그 거대한 무의미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 두려움을 씻어준 건, '원할 땐 가끔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느냐'고 물었던 내 질문에 교회 선생님이 날 위로하려 황급히 대답해준 '그렇다'였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감각이 현실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육신으로 뉴욕을 체험한 후 생의 감각을 얻은 '22'처럼.
'일상을 온전히 살아내라'는 메시지는 흔하지만, 그걸 이토록 아름답게 보여준 영화는 흔치 않다. 내가 눈물이 터져 나온 장면은 그거였다. 조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촘촘히 아름다웠는지 느끼며 돌아보는 기억들이, 영화 초반 그가 자신의 '당신의 전당'에서 "무의미하다"며 탄식했던 바로 그 장면들이었다는 것.
그랬다. 참 아름다운 영화였다.
4. 그리고 사흘 만에 <세자매>를 보았다.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이나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떠올렸다면 맞다, 비슷한 부분이 있다. 그 영화들의 '절망편'일 뿐. 주연이자 제작을 맡은 소리 누나는 개봉 전에 사석에서 '이렇게 모두가 힘든 시기에 이렇게 힘든 영화를 내놔도 되는지 고민이 된다'고까지 얘기했었다. 그 말을 듣고 어느 정도는 그림을 그렸지만, 직접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절한 영화였다.
슬픈 것은, 그 처절한 묘사가 아주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서사의 영화 치고는 꽤 호흡이 빠른데다 이런 장면들을 겹겹이 겹쳐놓으니 층을 쌓는 비극과 그것을 표현하는 인물들이 조금은 과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장면장면 떼어놓으면 모두 현실 속 어디선가 마주쳤던 모습들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누군가의 얼굴들이 계속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라는 이소라의 젖은 장작 같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그 처절함이 다 터져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일상이란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것이다. 뉴욕은 치열한 도시고,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도 저마다의 행과 불행이 있겠지만, 'EARTH PASS'를 들고 지구 전체를 향해 뛰어드는 '22'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입장에서 일단 '뉴욕'에 안착한다면 로또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억겁의 세월 동안 '유세미나'에만 머물렀던 그가 하필 '뉴욕'으로 지구를 체험한 것은 정말이지 천운이다. 어쩌면 감독 피트 닥터의 머릿속에 'EARTH'의 기준이 뉴욕일 수도 있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소울>의 메시지가 '미국 사는 중산층 백인 감독의 배부른 소리'라고 치부하는 것은 자기 삶을 깎아먹는 편협함이다. <소울>의 메시지는 그대로 아름답고, 피트 닥터는 천재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엔 여전히 일상을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지독하게 버텨내야'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그냥 그 자체로의 사실일 뿐.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 일상을 만끽하려면 사람이 미친다. 그 부조화 때문에 어느 쪽의 극단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 사실을 잊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만끽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다른 이들의 만끽까지도.
하지만 '벤자민'의 삶도 '자말'의 삶도, '조'의 삶도 '미연'의 삶도 다 거기 그렇게 있다. 그 부조화를 건조하게 끌어안아야 내 삶도 내 삶답게 안을 수 있다. 심리학에서 사람들이 이상한 선택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려다 나온다. 세상은 원래 부조화 투성이다.
5. 결이 다른 영화를 연달아 보면 사람이 이렇게 된다.
6. 여담이지만, <세자매>에서는 배우 문소리의 어떤 경지에 이른 연기를 볼 수 있다. 이 분의 영화를 적지 않게 챙겨본 편인데, 그중에서도 단연 인상적이었다. 층이 아주 많고, 섬세하면서도 아주 현실적이다. 정말 연기에 감탄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오열하고 악을 쓰며 잘하는 연기도 있고, 또 다큐멘터리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너무 현실 같은 연기도 있지만, 그 모든 균형 안에서 경이로운 연기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