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땀 흘리며 첫 회를 찍었던 <톡이나 할까?>가 이제, 촬영장 온도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하면 출연자들이 오들오들 떠느라 얘기가 제대로 안 풀리는 계절이 되었다.
그동안 몇몇 방송분은 어디서 찍었는 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었는데, 어떤 곳은 나도 답사하면서 마음에 들어 나중에 다시 놀러 찾아가보고 싶은 곳도 있었다. 코로나가 종식되거든 마음껏 놀러 다니고픈 분들이 그때 한 번쯤 참고하셔도 좋겠다.
나중에 다른 촬영 때 필요하면 또 쓰게 나도 볼겸, 정리해놓는 포스팅.
이거 만들면서 서울에 어지간히 예쁜 곳들은 다 찾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데, 또 마냥 예쁘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게 심플해보이는 화면에 비해 카메라 장비, 조명, 스탭들이 꽤 많은 촬영장이라 일단 장소 규모가 커야 한다. 공간의 분위기는 너무 마음에 드는데 크기가 작아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곳도 꽤 되었다.
또 한 가지, <톡이나 할까?>는 비교적 촬영시간이 짧은 프로그램이고 그런 만큼 대부분 출연자들이 같은 날 다른 스케쥴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동선을 고려해 가급적 서울 안에서 다 촬영한다. 근교까지도 나가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선택권이 꽤 좁은 편인데, 이 프로그램이 이어지는 동안 쓸만한 촬영지가 먼저 떨어지진 않을 지 걱정이긴 하다.
박보영 편
카페 무니 / 서울 용산구 신흥로 20길 37. (후암동)
남산을 등에 지고 서울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전망 맛집 카페.
맨 처음 기획할 때부터 첫 회는 꼭 루프탑으로 하고 싶었다. 세로로 긴 프레임에서 머리 위로 메시지가 쌓이는 그림은 꼭 지붕이 없이 시원하게 뻥 뚫린 하늘 위로 만들고 싶었다.
첫 촬영은 8월 중순이었고 내내 지독한 장마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촬영일을 잡을 때만 해도 장마가 끝날 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촬영 당일까지 비가 오면 같은 카페의 2층으로 들어가 비오는 창밖을 배경으로 찍는다는 플랜B도 세워뒀었다. 거짓말처럼 이틀 전부터 날이 개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첫 회는 반드시 이 뽀송한 그림이어야 했다.
사실 너무 덥긴 했다. 비가 씻어낸 맑은 서울 하늘은 여름 햇살을 여과 없이 쏟아냈고, 두 출연자는 뙤얔볕 아래 땀을 깨나 흘리며 화면에 너무 더워 보이진 않을까 걱정했었다. 두 분을 고생시켜 너무 죄송하긴 했지만, 그림은 더운 기색 하나 없이 뽀송하게 잘 나왔다.
기획하며 그렸던 그림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지금까지도 다시 보면 기분이 좋은 첫 회.
박은빈 편
구름아래소극장 /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29가길 15 (서교동)
첫 회는 일단 그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제일 원했던 그림인 루프탑으로 갔지만, 고민에 포함되었던 공간의 또 다른 특징은 '왜 같은 공간에 있는데 카톡으로 해야하는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처음 기획안을 얘기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었고, 프로그램이 꽤 많이 진행된 지금도 심심찮게 듣는다.
기획의 목적은 '카톡으로 대화할 때만 볼 수 있는 언어의 또 다른 결'이었고, 여기엔 '문자 대화'라는 특성에 더해 표정, 눈빛과 같은 '비언어적 신호'도 포함 된다. 육성으로 대화할 땐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이러한 비언어적 신호의 비중이, 목소리를 안 내면 급격히 커지는 것이다. 그 효과를 노린 것이 '대면 카톡'이었다. 이건 떨어져 있으면 생명력이 없다. 서로 마주 앉아 눈치껏 표정을 살펴야 그 맛이 산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획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주 앉아 카톡을 하는 상황이 인위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프로그램의 컨셉이니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물론 있을 터. 그래서 몇몇 에피소드는 '실제로도 육성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일상 중에도 카톡으로 얘기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있다. 수업시간, 회의시간, 도서관, 혹은 멀리 떨어져서 대화해야 하는 순간 등.
마침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출연 예정이었던 박은빈 씨가 섭외되었고, 드라마의 컨셉에도 맞출 겸 공연장을 섭외해 브람스 사중주가 연주되는 촬영장을 마련했다.
음악이 나오고 있어 소리 내서 대화할 수 없는 곳. 물론 실제 공연장에서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카톡을 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래도 완전히 어두운 극장보다 적당한 밝기가 유지되는 클래식 공연장 같은 곳에서 급한 카톡을 잠시 주고 받는 정도는 연주자에게야 실례겠지만 주변 관객들에게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아 어느 정도 양해가 되는 편이다.
구름아래소극장은 좋은 공연을 많이 하는 곳이다. 나도 촬영 이전에 바버렛츠 콘서트를 보러 관객으로 간 적이 있었다. 부디 다시 좋은 공연들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날이 어서 돌아오길.
김강훈 편
홍대 몬스터즉석떡볶이 /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29마길 6 2층 (서교동)
홍대 먹자골목 조금 위로 올라오면 있는 즉석 떡볶이집. 바로 골목 너머에 같은 사장님이 하시는 일반 분식 떡볶이집도 있다. 촬영 때 김강훈 배우가 주문한 대창떡볶이를 바라보며 침을 삼키고 그 뒤로 일주일 내내 편집실에서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짬이 날 때 꼭 먹으러 가야지 생각했는데, 그 뒤로 코로나가 점점 더 심해져서 한 번도 못갔다. 함께 주문한 씨푸드 튀김은 촬영이 끝나고 조금 남은 걸 먹어봤는데 맛있었다.
마주보고 앉아 카톡만 계속 하는 그림이 반복되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까 싶었다. 다른 행동을 적당히 섞어가며 해보는 시도 중 하나로 먹을 것을 놓고 해보았는데, 마침 떡볶이를 좋아하는 아역배우이니 만큼 인테리어와 플레이팅이 예쁜 떡볶이집으로 결정했다.
결국 배가 많이 고팠던 김강훈 배우가 눈앞의 떡볶이를 마음 놓고 먹지 못해 괴로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안 그래도 단답 위주의 카톡을 하는 듯 했는데 답이 더 짧아진 듯. 미안...
광희 편
블루스퀘어 북파크 /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94 (한남동)
한강진 역에 바로 내리면 있는 접근성 최고의 공연장 블루스퀘어. 위로 올라가면 이런 대형 서점이 있다. 공연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장소. 공간의 크기에 비해 장서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만큼 시원시원하게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어 촬영장소로는 오히려 제격이었다.
박은빈 편과 마찬가지로 '소리내서 대화할 수 없는 곳'의 또 다른 컨셉으로 도서관을 떠올렸는데, 실제 도서관을 대관하기가 여의치 않아 대형 서점을 도서관 같은 분위기로 연출했다. 당연히 책을 읽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섭외한 보조출연자들.
여기에 광희 씨는 아주 적절한 게스트라고 생각했는데, 평소 시원시원하게 큰소리를 내고 다니는 캐릭터이니 만큼 정숙을 요하는 공간에서 답답해하고 눈치 보는 코미디를 기대했으니까.
웬걸. 생각보다 카톡 대화에 금방 적응해서 별로 답답해 하지 않았다. 기대했던 코미디는 크게 나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내면을 만날 수 있었으니 훌륭한 촬영이었다.
김민경 편
핏인플라잉요가 / 서울 마포구 큰우물로 53 (염리동)
촬영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운동뚱>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민경 씨를 섭외한 만큼, 그 컨셉을 살려보고 싶었다. 기왕이면 <운동뚱>에서 안 해본 운동이면서, 촬영 때는 사실 운동은 거의 안 하고 앉아있어야 하니 앉아있는 그림이 재미있는 곳. 플라잉요가만 한 운동이 없었다. 촬영지는 마침 센터도 화사하고 해먹 색깔도 예뻐서 그림이 참 좋았던 곳.
지금의 아내와 7년 넘게 열심히 데이트를 다니며 안 해본 게 없는데, 그 중 하나가 함께 플라잉요가 체험 수업을 들으러 간 거였다. 그게 아니었으면 플라잉요가를 떠올리긴 쉽지 않았을 거다. 다른 예쁜 촬영지들도 데이트의 경험으로부터 떠올린 곳이 많다. 놀러 다니는 것도 열심히 해두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된다.
김영하 편
독수리다방 /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36 독수리빌딩 8층 (창천동)
김영하 편에 대한 다른 포스팅에도 쓴 독수리다방. 내 대학시절 많은 시간을 보낸 너무 사랑하는 카페다. 마침 학교 동문이자 여전히 연희동에 사시는 김영하 작가님이 그 인근에서 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반가운 마음으로 섭외한 장소. 늘 반갑게 맞아주시는 매니저 님이 촬영 때도 많이 도와주셨다.
서울 중심부에 이런 묘한 풍경을 자랑하는 루프탑이 잘 없는데, 10차선의 거대한 성산로를 바로 앞에 두고도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 없이 연세대의 정갈한 캠퍼스를 마주하고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창천교회 하나만 큰 건물인데, 오히려 대형교회로는 드물게 고풍스런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있어 낭만적인 느낌을 더한다. 마침 두 분 의상도 어쩜 이렇게 딱 맞게 입고 오셨는지, 이 편을 본 사람들로부터 심심찮게 <냉정과 열정 사이>가 떠오른다는 말을 들었다. 피렌체 안 가고 이런 말을 듣다니 가성비 최고.
영상을 만드는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 중 하나는, 자연광을 이길 수 있는 조명은 없다는 거다. 저녁 무렵 촬영을 시작해 시시각각 빛이 변해가는 그림이 두 분의 대화와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주었다. 해가 지고나서부터는 마침 뻥 뚫린 테라스 너머로 성산로 위의 차들의 불빛, 그리고 저 너머 유일하게 휘황한 건물 세브란스의 불빛까지 더할 나위 없는 조명을 연출해주었다. 애정이 많이 가는 회차.
독수리다방은 테라스도 맛집이지만 내부 인테리어도 아주 깔끔하고 아늑하다. 다른 카페에 비해 음료 가격이 좀 비싼 편이지만 대신 한 잔 시켜놓고 마음껏 공부하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처럼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아메리카노로 1회 리필도 해준다.
잠시 짬을 내어 취미로 만들었던 <신촌기억전: 독수리다방>을 보면 이 곳의 분위기와 인테리어,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사실 카톡하는 자세 중 제일 흔한 건 '눕톡'일 거다. 그래서 괜찮은 게스트가 있으면 '눕방'을 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건 최초 이나 님의 아이디어. 눕방을 하려면 서로 좀 편한 사이어야 될 텐데, 마침 재재 씨를 섭외하려던 차였기에 적절한 게스트인 셈이었다.
다만 누우려면 매장이나 카페 같은 곳은 안 될 거고, 호텔방을 빌려볼까도 했지만 그것도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는 촬영용으로는 대부분 너무 좁았고. 그때 유능한 우리팀 작가님이 짠 하고 찾아주신 곳은 대관 전용 파티룸. '스페이스클라우드' 같은 곳에 이런 장소가 많이 올라와있다.
어디 누구 집으로 가긴 곤란하고 친구들과 하룻밤 빌려서 호호깔깔 놀고 싶을 때, 호캉스가 부담스럽다면 훨씬 편하게 쓸 수 있는 이런 파티룸을 요즘 많이 애용하는 모양이다. 마침 촬영 컨셉하고도 딱이지 않은가. 재재 씨가 연출하는 문명특급의 키치한 느낌과도 살짝 닮았다.
원래 공간에다 조명에 색을 많이 입혀 그림을 만들었다. 재재 씨의 머리색깔, 두 사람의 의상, 우리팀 조연출이 센스있게 골라온 다과 디자인까지 딱 맞아 떨어져 예뻤던 촬영.
김혜수와 이정은 편
카페 난만 /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39길 50 (역삼동)
이나 님의 드림 게스트였던 두 분은 다소 급하게 섭외가 이루어졌고, 컨셉보다는 동선과 시간을 고려해 최적의 장소를 찾아야했다. 사실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어울리는 공간을 찾는 것도 쉽지는 않았고.
그래서 넓고 깨끗한 느낌으로 찾은 카페. 세로 프레임 컨텐츠의 특성상 시선이 올라가는 위쪽도 너무 심심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식물로 꾸며진 천장의 느낌이 좋았다.
엄정화 편
레드문 /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20길 41-4 지하1층
엄정화 씨가 한창 '환불원정대' 활동하던 시기에 맞추어, '환불원정대'의 컨셉으로 찾은 곳. 군만두와 멘보샤가 맛있어 빈 속으로 촬영온 이나 님에게도 딱이었다.
녹색톤으로 칠해진 내부와 정면의 빨간 네온사인이 주는 대비를 잘 살리고 싶어 두 사람의 얼굴에 빨간 빛이 그대로 떨어지도록 했다.
네온 사인의 한자는 '참지마라' 라고. '환불원정대'와 딱 아닌가. 눈물도 두려움도 참지 말라던 두 사람의 대화와도. (한자 발음이 그렇다는 거고 실제 한자로서의 의미는 안 맞는 거 같다)
박지훈 편
연세대학교 청송대 /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50 (신촌동)
가을의 끝자락.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야외촬영을 해야 해!'라는 마음으로 정한 곳. 독수리다방과 더불에 내 대학시절의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박지훈 씨가 주연 중이었던 드라마 <연애혁명>을 보면 연남동 신촌 인근에서 상당 부분 촬영이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언뜻 지나가는 숲의 느낌이 연세대 캠퍼스 내의 청송대와 닮았었다. 연세대는 온갖 드라마와 영화 촬영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곳이니 청송대에서 찍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정하기도 했는데 후일 보니 청송대는 아니었더라.
그래도 박지훈 씨의 싱그러운 느낌과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도트리'를 좋아하는 그에게 줄 도토리도 있었고. 이나 님이 도토리를 주워주는 20여 초의 긴 컷은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제일 좋아하는 컷 중 하나가 됐다.
박하선 편
올댓재즈 /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27가길 12 (이태원동)
서울 라이브 재즈클럽의 원조이자, 내 대학 시절에도 유명했던 양대 산맥 중 하나. 다른 하나였던 '원스인어블루문'은 얼마 전에 폐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육성보다 카톡으로 대화해야 하는 상황'이 박은빈 편에서는 클래식 사중주였다면, 이번 편에서는 라이브 재즈 공연이 된 셈이다.
박하선 편을 촬영할 때 박하선 씨가 주연한 <며느라기>와 <산후조리원>이 동시에 방영을 앞두고 있었던 차였는데, 둘 다 젊은 엄마 역할로 나오는 작품이었다. 보통은 게스트가 출연하는 작품에 맞춰 우리도 컨셉을 잡지만, 이번엔 반대로 해보고 싶었다. 말하자면 육아와 가사에서 해방되어 친구와 맥주 한 잔 즐기러 나온 분위기라고 할까. 박하선 씨가 맥주와 재즈를 몹시 즐겨주셔서 나도 즐거웠던 촬영.
그러고보니 출연해서 이나 님과 멋진 케미를 보여준 여자 배우들이 전부 박 씨다. 박보영, 박은빈, 박하선. 가만있어보자 그럼 박소담... 박혜수...
적재 편
푸시풋살룬 /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31길 7-6 지하1층 (한남동)
유럽 기차 객실 컨셉의 칵테일 바. 디테일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컨셉이 구현되어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너무 훌륭했다. 복층의 테이블로 올라가면 기차 차창 너머로 풍경이 흐르는 연출까지 되어있다. 처음 찾으면 들어오는 입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데, 미국의 금주법 시대에 단속을 피해 몰래 모여서 술 마시던 '스피키지'를 재현한 느낌도 난다.
게다가 적재 씨를 불렀으면 '별보러 가자'를 들어야 되는데, 마침 홀의 문을 열면 실외로 이어지는 구조라 멋진 인테리어의 내부를 찍으면서 별이 떠있는 밤하늘도 볼 수 있으니 완벽한 장소였던 셈.
팔고 있는 음료도 굉장히 맛있다. 이 곳만의 시그니쳐 칵테일들은 다른 곳에서 맛보기 힘든 독특한 느낌을 준다. 가격이 싼 편은 아니지만 기분을 내고 싶을 때 한 번쯤 찾기 좋은 곳일 듯.
구경선 편
그림제작소 혜화점 /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234 동화빌딩 3층 (명륜동)
캐릭터 '베니'의 작가이자 동화작가인 구경선 작가님에 맞추어, 동화 같은 분위기의 화실을 찾았다. 취미로 미술을 하려는 분들이 그림에 대한 부담 없이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공간 같았다.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베니'와도 너무 잘 어울렸고, 꽤 추운 날씨였음에도 창밖의 가로수가 싱그러워 참 따뜻했던 촬영.
구경선 작가님은 청각장애인이신데, 섭외 당시 다른 방송보다 <톡이나 할까?>만큼은 자신도 동등한 입장으로 출연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해주셨다. 음향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보고 싶기도 했는데, 이 역시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몹시 감사했다. '마주 보고 하는 카톡'을 소통의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서 잘 보여줄 수 있었던, 애정이 많이 가는 회차.
남주혁 편
우디집 / 서울 성동구 둘레9길 17 (성수동)
남주혁 씨가 주연한 영화 <조제>의 분위기를 비슷하게 살리기 위해, 겸허한 느낌의 목조 건물을 꽤나 열심히 찾았다. 성수동에서 찾은 '우디집'은 한국의 구옥과 일본식 주택이 묘하게 섞여있는 곳이었는데, <조제>의 원작인 일본 작품도 함께 연상되면서 분위기가 참 좋았다.
다만 장소가 그리 크지 않아 그림을 만들기 위해 화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문을 살짝 열어놓고 촬영해야 했는데, 날씨가 제법 추워지기 시작한 때라 두 분이 꽤 추워하셔서 몹시 죄송했다. 그래도 실내이니 난방을 틀어놓으면 문을 살짝 열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 실수였다. 여름에는 덥게 촬영해서 죄송하고, 겨울에는 춥게 촬영해서 죄송하고. 앞으론 더 세심하게 배려하자...
여담이지만 풀샷의 구도가 중요한 만큼 출연자 각각의 배경도 중요하게 고려하는데, 원샷의 배경에 이런저런 오브제가 잡혀 최대한 그림이 심심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반면 다른 곳보다 작았던 이 촬영지는 남주혁 씨의 배경을 그냥 흰벽으로 둘 수 밖에 없었는데, 모든 제작진이 입을 모아 말했다. 흰벽만 있어서 너무 좋다고.
정세랑 편
텅플래닛 / 서울 성동구 성수이로 82 2층 (성수동)
촬영을 위해 답사 다녀본 곳들 중에 가장 독특한 분위기를 지녔던 곳. 영상에 등장하는 공간만 해도 굉장히 큰 규모인데, 이 곳과 분리된 나머지 공간들 또한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로 잘 꾸며져 있다. 컨셉만 맞으면 이곳에서 앵글을 바꾸어 두 편을 찍었어도 티가 안 났을 거라 여겨질 정도. 카페에서 팔고 있는 음료나 베이커리의 디자인도 예사롭지 않다. 날씨가 좋으면 옥상도 개방하는 모양인데, 광활한 옥상을 호쾌하게 활용하는 디자인 또한 볼만 했다. 옥상은 영상보다는 광각 렌즈로 화보를 찍으면 딱 그림이 좋을 것 같았다.
정세랑 작가님의 작품 중 드라마 덕분에 가장 많이 알려진 <보건교사 안은영>과도 잘 어울리도록, 충분히 '이상하고 아름다운' 컨셉이었던 카페. 심지어 곳곳의 가구들이 젤리 같아 보였다. 어딜 막 찍어도 인스타에 올리기 좋을 그런 공간.
지창욱과 김지원 편
사유의 서재 /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98길 11 메트로빌딩 5층 (역삼동)
<도시남녀의 사랑법> 두 주인공은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두 사람을 아우르는 '도시 남녀'의 느낌이란 적당히 어른스러우면서도 너무 차갑거나 무거워보이진 않았으면 했다.
'사유의 서재'는 복잡한 강남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와인바를 겸한 식당이었는데 구석구석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고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특히 커다란 통창 너머로 어렴풋이 강남의 실루엣이 보였는데, 이 통창의 역광을 화사하게 쓰고 싶었다. 너무 맑은 날이었다면 역광도 활용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마침 비가 내린 뒤 적당히 흐린 하늘이라 렌즈에는 딱 알맞은 노출이 되어주었다.
촬영지로 정한 공간에 살릴 포인트가 딱 한 군데라면 고민할 필요가 별로 없는데, 이 곳처럼 곳곳의 미장센이 괜찮으면 고민이 깊어진다. <톡이나 할까?>는 몇 개의 고정된 앵글을 주로 쓰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앵글을 뒤집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통창의 역광을 살리느라 가게의 다른 인테리어는 거의 보여주지 못했던 점이 아쉬웠던 촬영지. 음식도 맛있다고 하니 다음에 다시 가보고 싶다.
문가영 편
소전서림 /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138길 23 (청담동)
2020년 마지막 게스트. 애서가, 다독가로 잘 알려진 문가영 씨에게 맞춰 찾은 공간. 마침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의상과도 잘 어울렸다.
사설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겠다.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걸 나도 이번 촬영 덕분에 알게 됐다.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소전서림'은 대단히 정갈한 인테리어의 널찍한 공간에 적잖이 꽂혀있는 책들 또한 잘 큐레이션 되어 있다.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다채로운 좌석들이 마련되어 있는데, 좀 더 편하게 개방된 곳부터 아예 벽으로 둘러싸여 훨씬 개인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까지 있다. 게다가 책장에도 꼬박꼬박 20프로씩 공간을 남겨놓으며 한 칸 가득 책을 꽂지 않는 여유까지. 공간은 낭비할수록 고급스러워 보이는 법이다. 하기야 그건 뭐든 그렇지. 낭비할 수 있음이 여유의 상징이니까.
나에게 도서관은 종이의 섬유질 묵은 냄새가 햇살에 노릇하게 익어 가득하고, 낡고 닳은 가구들에서 이 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느끼는 그런 이미지였는데, 이런 동네에는 이런 도서관도 있구나 싶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공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내 원래 이미지 속 도서관에서는 누런 종이의 철학이나 문학이 잘 읽힐 것 같다면 이런 곳에서는 디자인이나 미학 책을 봐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여유가 될 때 꼭 와서 조용히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