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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Dec 21. 2020

'오빠'의 정치학

'입술 소리'를 거부하는 본능은 무엇일까.

아내와 나는 다섯 살 차이가 나지만 '오빠'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처음 만나고부터 이제 꼬박 7년이 넘었지만 연애 초반 아주 잠시 호칭이 애매할 때 몇 번인가 쓴 게 전부였다. 성민아, 서로의 호칭은 쭉 이름이다. 나이는 잊은 지 오래다. 가끔 주변에서 '두 분 동갑이세요?'하는 의아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실은 아예 처음부터, '나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늘 떠오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면 마음이 쉬이 가지 않았을 것 같다. 내게 연인 관계란 동등한 눈높이를 뜻했다. 나를 자신보다 위에 두고 대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연인으로 느끼기는 어려웠을 거다. 그런 연인관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그건 왜곡된 관계이고, 왜곡된 관계는 필히 어딘가에서 부딪힌다.

20대에 다섯 살 차이는 누군가에겐 많다면 많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 차다. 처음부터 그 5년의 차이를 보란듯이 무시하며,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그였기에 마음이 적잖이 움직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동성친구 만큼이나 이성친구가 많은 편이고, 그 중에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아주 많지만 '오빠'라는 호칭은 거의 들을 일이 없다. 십대 시절부터 알고 지내며 오랜 동안 그 호칭이 귀에 익은 몇몇이 전부다. 대부분은 성민 씨, PD님, 권쌤, 선배 정도로 다 통용이 된다.

그렇다보니 '오빠'는 내게 너무 낯선 호칭이다. 달갑지가 않다. 예상 못한 누군가가 '오빠'라고 부르면 듣기가 어색해서 몸이 뻣뻣해지는 기분이다. '비공식적인 관계의 연상의 남성'을 통상 부르는 말이니 부르지 말라 하면 유난스러운 것이 사실이고, 속으로만 끄응, 하고 신음을 삼킨다. 그걸 아는 아내는 아주 가끔 나를 골리고 싶을 때 일부러 써먹기도 한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던 대학에서도 대개는 '선배'란 호칭을 들었지만, 가끔 초면에도 '오빠'를 서슴 없이 쓰는 여자 후배들이 있었다. 신기했다. 그 와중에 내가 선배인 걸 아는데도 '성민 씨'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는 이들에겐 오히려 호감이 갔다. '씨'는 엄연한 존칭이지만 묘하게 연장자에겐 쓰지 않는 느낌이 있다. 그걸 알면서도 그냥 쓴다면, 그런 태도가 좋았다. 요즈음에는 '님'이 많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사람들은 대체제를 찾아내고 있다.

듣기 괴로워하는 나만큼이나, 그 호칭을 이상할 정도로 쓰기 힘들어하는 여성들 또한 꽤 있다. 한국 사회에서 '오빠'라는 호칭은 나머지 비교군인 '형, 누나, 언니'에 비해 이상한 지위를 갖고 있다. 80~90년대 대학의 운동권에서는 여학생들에게도 '오빠' 대신 '형'으로 호칭을 통일시키기도 했었고, 그러한 문화는 다른 업무현장에서 아직도 가끔 보인다. '형'도 '언니'도, 그리고 상대적으로 드물긴 하지만 '누나'도 종종 되는데, '오빠'는 훨씬 더 터부시 된다.

일단 '누나'도 그렇지만, 이성 간의 호칭이 주는 묘한 긴장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모두가 동등한 동지'이기 때문에, 모종의 애정 관계를 연상시키는 호칭을 배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나는 이해했다. '제 2의 성'으로서 여성이 가지는 예외성이 더 큰 시절이기도 했고.


어떤 현상은 대개 당시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 이유가 항상 정당하지는 않지만 이에 불만을 가질 때도 기왕이면 그 전후 사정을 먼저 이해하고 나서 가지는 것이 훨씬 타당성을 얻기 수월하다.

여기서의 불만은 그런 거다. '모두가 동등한' 관계인데, 왜 제 3의 호칭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여성의 호칭은 폐지시키고 남성의 호칭으로 통합한 것인지. 이러면 남자는 새롭게 적응하는 노력이 필요 없다. 지금보다 더 남자들의 세상이었던 시절 부족한 상상력으로 나름 노력한 결과다. '남성들의 세계'에 들어온 여성을 '남성'으로 대해주는 것은 그 시대 나름의 존중이었던 셈이다.

물론 '형'이라 부른다고 진짜 남성으로 대한 것은 아니었던 만큼, 애정관계나 성희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시 제대로 된 존중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오빠'는 왜 그토록 특별대우, 혹은 금기시 될까 생각해보다 떠오른 사실은, '형, 누나, 오빠, 언니' 중에서 '오빠'만 혼자 입술소리, 순음이라는 거다. 'ㅁ, ㅂ, ㅃ, ㅍ'의 입술소리.


발음하려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만나야 하는 순음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유아가 처음 옹알이로 부모를 부르는 소리다. '엄마, 아빠', 'Mama, Papa', '妈妈, 爸爸', 'まま, パパ'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포루투갈어, 러시아어, 인도네시아어, 우즈베키스탄어 전부 대동소이하다. 아빠는 간혹 차이가 있지만 엄마는 예외가 없다. 전부 순음이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의지를 가지고 뭔가를 발음하려 애쓸 때 제일 먼저 나오는 소리가 입술소리이기 때문이다. 부르르르, 아르르르하는 옹알이는 그저 기분의 표현이지만, 뭔가 필요가 생겼을 때 그 필요를 채워줄 대상을 향해 의지를 담아 소리를 낼 때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게 된다. 그럼 음맘마 순음이 된다.

입술을 붙였다 떼면서 소리를 내는 것. 순음은 원초적인 발음 중에 가장 의지의 결과로 나오는 소리고, 그래서 '단어'처럼 들리는 소리다. 그래서 이 소리는 모든 문화권에서 인간이 처음 이 소리를 낼 때 곁에 있는 존재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니까, 엄마를 부르는 이 '입술소리'는 모든 문화권에서 보호본능의 상징인 셈이다. 그리고 그 보호본능의 상징이 한국어에서는 '어린 여성이 연상의 남성을 부르는 호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소리로 다른 남성을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성들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이러한 원리를 인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소리에 그렇게 집착하는 어떤 남자들에게도 같은 이유일 거고.

물론 어디까지나 그냥 내 상상이고, 이론적인 근거는 없다.

ⓒ 며느라기

'형'은 한국어에서 성별과 상관 없이 위계를 나타내는 언어였다. 지금까지도 친족관계의 위계에 들어온 여성들은 손윗 시누이 동서에게 '형님'이라고 부른다.

반면 '언니'는 원래 남자들끼리도 위계관계 밖에서 좀 더 편하게 연장자를 부를 때 썼다. 위계서열 안의 관계는 '형', 밖의 관계면 '언니'였던 거다. 다만 '언니'가 이렇게 쓰였던 역사는 아주 짧다. 어릴 적 졸업식에서 부르던 노랫말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에서 불편함을 느낀 남자아이가 있었다면 근대 이후 한국에서 남자 사이의 '언니' 호칭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원래는 권력관계의 공식성을 보여주는 '형'과 '언니' 호칭이 성별의 영역으로 분화되었다는 사실은, 남성은 '위계의 언어'를, 여성은 '친화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유도되었다는 뜻이다. 공식적인 위계의 세상은 전부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했고.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에서 남자들끼리의 위계서열이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어지간하면 새로 사귄 누구와도 말을 놓지 않으려는 편인데, 특히 내 쪽만 말을 놓는 사이가 되면 관계의 역학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오고가는 대화의 내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말을 놓지 않아도 '형'의 위력은 대단하다. 서로 존댓말을 쓴다 한들 저쪽에서 '형'을 호칭으로 삼으면 기울어진 위계를 좁히기란 쉽지 않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일방적으로 반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상대방을 존중하며 대화할 수 있겠지만 난 그 수준은 못된다. 오가는 대화의 균형이 미묘하게 망가지는 걸 느낀 뒤로는 상대가 아무리 말을 편하게 하라고 사정해도 꿋꿋이 존대를 고수한다. 말씀 편하게 하시라뇨, 존대가 편해서 존대하는 건데요. 나 편하자고 하는, 몹시 이기적인 존댓말입니다.

불편해하는 그 마음도 이해는 간다. 위계질서로 가득한 한국사회에서 살다보면 그 질서가 익숙해진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어도 몇 살이고 누가 형인지부터 따지는 나라다. 새로 누군가를 만나면 서로 이 질서 어딘가에 자리를 잡아야 비로소 관계가 정리되고 안정감을 얻는다. 상호 간의 존대를 ‘아직 교통정리가 끝나지 않은 관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 카카오톡 이모티콘 '그런데 말입니다'

솔직히 나도 반대 입장이 되어 까마득히 나이 많은 연장자가 나를 계속 ‘성민 씨’라고 높이며 존대하면 어색한 게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이 위계질서가 익숙했다는 걸 깨닫는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가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그럴 때마다 나 역시 나 편하자고 존댓말을 쓴다는 걸 떠올린다. 저 분도 저게 ‘편한 말씀’이겠지. 놓고 싶으면 자기가 먼저 놓겠지. 그의 존중은 다시 나의 존중으로 갚으면 된다.

누군가는 ‘아직 교통정리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그 상호 존대가 좋다. 위계가 정리되지 않은 긴장감, 그래서 유지되는 적당한 거리감의 예의가 좋다. 서로가 온전히 다른 타인이라는 걸 늘 인식하며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사이가 좋다. 스물한 살이고 두 살이고 서른이고 마흔이고 서로 같은 말을 쓰며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사실 한국어처럼 이렇게 존대어가 명확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아도, 어느 문화권에서나 남성성이 두드러지는 집단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위계를 정하려 애쓰는 긴장관계가 있다. 쓸데없는 기싸움 없이 나이와 언어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한국사회가 차라리 효율적인지도 모른다. 출신이고 계층이고 그냥 때 되면 진급하는 군대가 때로는 더 깨끗해보이는 것처럼. (feat. '썩으러 가는 길', 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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