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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Jul 02. 2021

망설임 없이 너의 이름을 적는.

영화 <루카>

처음으로 세계가 확장되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나에겐 책이었다. 매일 밤 바라보던 밤하늘의 별들에 이름이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유년시절의 책. 십대 시절 세상을 하나둘씩 알아갈 때마다 고개를 드는 고민들을, 나보다 먼저 훨씬 깊이 성찰했던 이들이 남긴 책. 책은 나에게 희열을 주는구나, 깨닫고 더 많이 읽으려 찾다 보니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쌓아올린 세계. 평생 밥 먹고 책만 읽어도 끝내 이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것들만 가득 남겨두고 떠나겠구나 하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던 순간들.     


비슷한 희열을 아름답게 그린 장면들을 사랑한다. <일 포스티노>와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거장의 세계를 홀린 듯 탐구하는 젊은 문학도의 열정. <인터스텔라>에서는 그 어떤 장면보다 “유레카!”를 외치던 머피의 환희가 가장 벅찼다. <스토너>에서는 스토너의 세계에 함께 젖어가던 딸이 그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할 때 가장 아팠다. 좁은 세계가 전부였던 존재가 넓은 세상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내 어린 시절의 희열과 닮아 마치 내 것처럼 좇게 된다.     

땅 위를 선망하던 애리얼도 아마 에릭 왕자가 아니라 답사 나온 인류학 교수를 만났으면 좀 더 다른 종류의 희열을 경험할 수 있었을 텐데. 음, 하지만 그 시절의 연구 윤리란 좀 위험했고 인류학이 아니라 생물학 교수였으면 문제가 복잡해졌을 테니 왕자로 만족해야겠다.      


<루카>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가장 먼저는 자신의 신체에 적응해가며 두 발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 언덕을 오르는 소년의 성장담이고, 때론 성애와 구분할 수 없는 우정과 관계에 대한 성숙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괴물’들이, (아마도 이혼 가정의 딸인) ADHD 소녀와 선천적 장애인인 그의 아빠를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세상으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봉합되어 버리는 갈등도, 그래서 따뜻하다. 줄리아는 어릴 때부터 항상 ‘Too much’란 말을 들으며 자라왔고, 줄리아의 아빠 마시모는 한쪽 팔이 없는 채로 ‘세상에 나왔으니까.’ 그들은 그래서 그토록 쉽게 서로를 알아보고 나란히 서줄 수 있었을 거다.


아, 그리고 한없이 청량한 이탈리아의 치즈와 파스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산따 모짜렐라! 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아싸 섞박지! 정도가 되겠지.


하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무엇보다, 그토록 ‘세상 끝까지 닿게 해주는 베스파’를 갖고 싶었던 루카가 책 속에서 환희를 만나 끝내 기차를 타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다. 그 환희와 감동을 너무 아름답게 그렸다.    


내가 픽사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뻔한 이야기도 설득력 있게 쌓아올리는 서사의 실력도 물론 있지만 그렇게 쌓아올린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데도 살아있는 디테일에 있다. 루카에게 화를 낼 때 날카로워지는 엄마의 동공이나, 알베르토가 태양을 실컷 보라고 할 때 순식간에 작아지는 루카의 동공, 처음 물 밖으로 나와 걸으려 할 때 반사적으로 헤엄치는 몸부림, 상상 속에서조차 베스파를 타본 적이 없어서 어설프게 헤드를 잡은 루카의 자세 같은 그런 묘사들.     


영화, 특히 애니메이션의 어떤 장면들을 보면 창작자들의 얼굴이 그려질 때가 있는데, ‘이 장면은 정말 멋질 거야!’라며 스스로 열의가 한껏 차올라있는 표정이 떠오를 때가 있고, ‘이 아이디어 너무 재밌지 않냐’라며 낄낄거리는 표정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내가 픽사를 사랑하게 만든 장면들은 후자에 더 가까웠다. 최근 픽사의 멋진 작품들, <코코>, <소울> 같은 것들은 달뜬 열의는 느껴졌지만 낄낄거리는 표정은 드물게 보였다. 그래서 감동적이고 소중했을지언정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루카>는 그 둘이 아주 잘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표정마저 느껴지는 영화였다. 


그 모든 장면들을 통틀어서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은, 상기된 얼굴로 천문학 책을 빌려도 되냐 묻는 루카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표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찍찍 긋고 루카의 이름을 써주는 줄리아였다.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봤지만, 두 번 모두 이름에 줄을 긋는 순간 바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살아가며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장면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어떤 순간에, 그렇게 망설임 없이 그의 이름을 적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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