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저 하늘에 구름 따라

내 젊음의 배경음악 16.

by 들꽃연인

임관 후에 배치된 부대는 양평에 있는 기계화 부대였다. 난 장갑차 부대의 소대장을 맡았다. 누구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를, 다른 누구에게는 빛나는 전통으로 여겨지는 과거가 있는 부대였다. 지금 양평은 서울에서도 가깝고 골프장이나 관광지도 많아 많은 사람이 찾는 교통의 요지이자 유동인구도 많은 곳이다. 하지만 내가 복무하던 당시에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농부와 군인 밖에 없는 소읍이자 외딴곳이었다. 당연히 서울에서도 엄청 먼 곳으로 여겨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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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원래는 그리 추운 곳이 아니었는데, 주변에 댐과 이로 인한 호수가 많이 생기면서 기후가 바뀌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일기예보에서 양평이 춥다는 얘기만 나오면 우셨다고 하고.


내가 삼겹살을 아마도 처음, 그리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부대에서 20분쯤 걸어가면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의 정육점이 곧 식당이기도 했다.


몹시도 추웠던 것으로 기억되는 어느 겨울날, 퇴근 후 BOQ(장교 숙소)에서 TV를 켜니, MBC에서 창사특집 드라마로 이문열 원작의 ‘젊은 날의 초상’을 방송해 주었다. 오랜 기억으로 희미하지만 손창민 배우가 주연이었고 최불암 배우도 칼갈이 노인으로 출연했었다. 그 드라마를 보니 갑자기 내 젊음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꾹꾹 눌러놨던 감성도 터져 나왔다. 동료 장교와 같이 20분을 걸어 정육점 식당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드라마의 감상과 내 감성을 이야기했다.


다소 술이 과했지만, 우린 다방 2층의 맥주집에서 한잔을 더했다. 동료 장교는 구전되는 곡이라며 노래 하나를 가르쳐주었다. 난 동료가 부르는 그 노래 ‘저 하늘에 구름 따라’에 빠져 몇 번이고 반복해서 따라 불렀고 그 노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리스트에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일명 ‘불행아’, 또는 ‘부랑아’라고도 불리는 그 노래는 곡과 가사도 좋지만, 당시 나의 감성에 딱 맞았던 것 아닌가 싶다. 동료는 나에게 작사, 작곡 미상의 구전가요라고 했지만, 인터넷에는 김의철이라는 가수의 작사, 작곡으로 나와있다. 노래를 부른 사람은 김의철 가수 본인부터 양희은, 윤연선 등 많은 가수가 불렀으나 난 이광조 가수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광조 가수의 다른 노래에는 데면데면한데, 이 노래만큼은 이광조 버전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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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이 비번인(당직이 아닌) 휴일이어서 마음이 편했는지 과음을 하고 말았다. 어떻게 숙소로 복귀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눈길에서 몇 번 미끄러져 넘어지며 눈을 맞고 들어온 건 기억이 난다.


아침 시간, 속 쓰린 숙취를 느끼며 잠에서 깨자 아무렇게나 벗어 팽개친 군복 외투, 그 외투에서 녹아 방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던 눈 녹은 물, 빈 물주전자 이런 것들이 눈에 띄었다. 켜져 있던 FM라디오의 진행자(백형두 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는 ‘악마가 바쁠 때는 술을 대신 보낸다’는 탈무드의 글귀를 소개해줬는데, 너무 공감이 되었다.


진행자는 이어서 황동규 시인의 ‘기도’라는 시를 낭송했다. 마치 그 당시의 내 상황을 쓴 시 같아서 듣고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 몇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기도 황동규


1.

내 잠시 생각하는 동안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생각이 끝났을 땐 눈보라 무겁게 치는 밤이었다. 인적이 드문, 모든 것이 서로 소리치는 거리를 지나며 나는 단념한 여인처럼 눈보라처럼 웃고 있었다.

내 당신을 미워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면은 나는 그곳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2.

내 꿈결처럼 사랑하던 꽃나무들이 얼어 쓰러졌을 때 나에게 왔던

그 막막함 그 해방감을 나의 것으로 받으소서

나에게는 지금 엎어진 컵

빈 물 주전자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닫혀진 창

며칠 내 끊임없이 흐린 날씨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곤 세 명의 친구가 있어

하나는 엎어진 컵을 들고

하나는 빈 주전자를 들고

또 하나는 흐린 창밖에 서 있습니다

이들을 만나소서

이들에게서 잠깐 잠깐의 내 이야기를 들으소서

이들에게서 막막함이 무엇인가는 묻지 마소서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맡기소서.


3.

한 기억 안의 방황

사방이 막힌 죽음

눈에 오는 소금기

어젯밤에는 꿈 많은 잠이 왔었다

내 결코 숨기지 않으리라

좀더 울울히 못 산 죄 있음을


깃대에 달린 깃발의 소멸을

그 우울한 바라봄, 한 짧고 어두운 청춘을

언제나 거두소서

당신의 울울한 한 적막 속에.


저 하늘 구름 따라 (← 이곳을 누르면 해당곡이 재생됩니다. 유튜브 링크입니다.)


저 하늘에 구름 따라 김의철 작사, 작곡 이광조, 양희은, 김의철, 김광석, 윤연선 등 노래


저 하늘에 구름 따라 흐르는 강물 따라 / 정처 없이 걷고만 싶구나 바람을 벗 삼아 가면

눈앞에 떠오는 옛 추억 아 그리워라 / 소나기 퍼붓는 거리를 나 홀로 외로이 걸으면

그리운 부모 형제 다정한 옛 친구 / 그러나 갈 수 있는 이 몸

홀로 가슴 태우다 흙 속으로 / 묻혀갈 나의 인생아

묻혀갈 나의 인생아 / 묻혀갈 나의 인생아


깊고 맑고 파란 무언가를 찾아 / 떠돌이 품팔이마냥

친구 하나 찾아와 주지 않는 이곳에 / 별을 보며 울먹이네

이 거리 저 거리 헤매이다 / 잠자리는 어느 곳일까

지팡이 짚고 절룩거려도 / 어디엔들 이끌리리까

그리운 부모 형제 다정한 옛 친구 / 그러나 갈 수 없는 이 몸

홀로 가슴 태우다 흙 속으로 / 묻혀갈 나의 인생아


묻혀갈 나의 인생아 / 묻혀갈 나의 인생아

묻혀갈 나의 인생아 / 묻혀갈 나의 인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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