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여, 세상이 우리 주위에서 무너져도 좋다!

by 고승환
werther.jpg The Stolen Kiss - Jean-Honoré Fragonard (1787)

어떤 밤에는 활자 속을 헤매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본다. 이때 나는 문학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묘한 어지러움을 느낀다. 방금 전까지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다가 다시 평범한 현실로 돌아오는 그 짧은 눈짓 사이에 문학과 현실의 경계가 아득하게 흔들린다. 문학을 배운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런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다. 나는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괴테.「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나는 문학을 배우며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인간 내면의 복잡성, 감성의 모순됨, 고독의 필연성, 사랑의 이해불가능성, 윤리의 상대성, 언어의 한계, 죽음의 일상성, 우연의 지배력, 체제의 잔인함, 사회의 억압성, 규범의 폭력성, 존재의 부조리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멀고 그 낙차는 아찔했다. 지식은 깊어지는데 삶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문학은 언제나 현실을 향해 말을 걸고 나는 언제나 문학의 편에 서서 그를 대변해 왔지만 문학은 결코 현실로 완전히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나뿐이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도 환승역이 다가오면 나는 어김없이 휴대폰을 끄고 어깨를 세우고 출입문 앞을 서성거린다. 문학 속 인물들이 아무리 숭고해 보여도 나는 지하철을 놓치면 안 되는 사람이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쏟아져내리고 휴대폰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가 가득하다. 해야 할 일들이 캘린더에 빼곡하고 시간은 계속해서 재촉한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삶을 가만히 떠받치고 있는 것 같다가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문학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렇게 무력하고 그렇게 아름답다.


그러니까 문학과 현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간극이 존재한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 앞에서 문학은 무능해지고 문장 위에는 아무런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다. 월세는 매달 내야 하고 약속 시간에 늦어선 안되며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어쩌면 이 간극은 메워져서도, 메우려는 시도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학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현실의 문학화가 아니라 이 간극 자체를 남겨두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만약 베르테르가 현실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그는 로테*에게 로테여, 세상이 우리 주위에서 무너져도 좋다!라고 외치면서도 세금을 내야 하고 직장을 다녀야 하며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번호표를 뽑아야 할 것이다. 삶의 행정 앞에서 베르테르의 절망은 초라해진다.

*괴테.「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베르테르가 짝사랑한 여인


문학 속 인물들의 숭고함은 그들이 현실의 번잡함 앞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하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혹되면서도 현실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존재가 되어 이 간극 속에서 흔들리는 경험이다.


괴테를 보아라. 그는 이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작품을 썼지만 정작 자신은 일흔네 살에 열아홉 살짜리 젊은 여자와 사랑했다. 베르테르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지만 괴테는 궁정에서 재상으로 일하며 여든두 살까지 장수했다. 괴테가 베르테르처럼 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베르테르를 씀으로써 베르테르가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의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괴테뿐 아니다. 피츠제럴드는 술 퍼먹다 심장마비로 죽었고 헤밍웨이는 알코올 우울증으로 자살했으며 케루악은 간경화로 이른 나이에 죽었다. (셋 다 술이네) 그들이 만들어낸 문학적 인물들은 영원히 찬란하지만 그들 자신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 다만 이들은 문학과 삶 사이의 간극을 절실하게 경험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베르테르가 될 수 없을 것이고 뫼르소*도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베르테르와 뫼르소를 읽은 자로서 살아간다. 진정성은 수용하되 냉혹함은 피한다. 열정은 간직하되 파멸은 거부한다. 이 수용과 거부의 반복이 내 삶의 스타일을 형성한다. 이것이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내가 그런 선택을 강요받는 현실을 부정했다. 문학 속 인물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에 타협하고 시스템 앞에 고개 숙이는 부정한 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인정한다. 그것들은 문학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 안에서만 아름답다.

*카뮈.「이방인」의 주인공


나는 다만 문학을 읽으며 수많은 가능성의 삶을 체험한다. 극단적으로 살 수도 있었고 냉혹한 무관심으로 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나는 어떤 극단도 선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상적인 문학의 세계를 덮고 비겁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준 질문들을 품은 채 간극을 살아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이 나에게 준 특권이다. 감히 특권이라 부를 수 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는 특권. 삶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특권. 나만의 윤리를 세울 수 있는 특권. 나만의 미학을 만들 수 있는 특권. 문학은 살아보지 못한 삶들을 살아보게 했고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길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제서야 순순히 사랑하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사랑 앞에 철학과 문학을 들이대며 순도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문장 하나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그리워한다.


나는 이제서야 취업을 위해 달리는 이들의 열정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세상이 허락한 자리에서 자신만의 무게로 삶을 밀어 간다.


나는 이제서야 하루의 무게를 술잔 하나에 덜어낼 줄 아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슬픔을 문장으로 바꾸지 않아도 되는 용기. 면책을 위해 뒷걸음질 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감당. 이들에게는 문학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없다. 그것이 때로는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로운 일인가.


나는 이제서야 마음 놓고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에 기꺼이 순응하여 삶을 견인한다. 나는 이제서야 마음 놓고 글을 쓴다. 나는 이제서야 마음 놓고 문학을 한다. 나는 이제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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