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우는가. 나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슬퍼서? 아니, 슬픔은 너무 작다. 그것만으로는 눈물을 끌어올릴 수 없다. 슬픔이 눈물의 이유이긴 하지만 그 전부는 아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매일 팔 천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사실에 슬퍼하지만 매일 울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묻는다. 사람은 왜 우는가. 눈물은 슬픔 이전에 어디에서 오는가.
아이는 슬픔을 배우기 전에 운다. 배가 고프면 울고 품이 그리우면 울고 불빛이 두려우면 운다. 그때 울음은 감정이 아니라 감각이다. 슬픔을 하나의 감각으로 인지했을 때 우리는 운다. 눈물은 사건보다 먼저 온다. 감정보다 감각으로 먼저 알아차린다. 마치 어떤 결핍이나 상실이 예견이라도 된 것처럼 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눈은 벌써 적셔지고 가슴은 따라서 파열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감각의 이름은 나중에야 붙는다. 그건 슬픔이었어. 그건 그리움이었지. 그렇다면 눈물의 시초는 아직 언어가 가지 못하는 곳일 것이다. 가장 동물적인 형태의 본능일 것이다.
헌데 우리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울어본 적 있고 울 줄 알지만 울지 않는다. 울음을 알지만 울음을 감춘다. 우리에게 울음은 더 이상 누군가의 품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없고 운다고 해서 누군가가 손을 덥석 잡아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울음은 더 이상 구조 요청이 아니다. 우리에게 울음은 오히려 자살 신호탄이다. 울음이 터지는 그 순간 사람은 더 이상 인격이 아니고 사회적 존재도 아니며 이름 붙은 역할에서조차 벗어난다. 그것은 시스템을 중단시키고 대부분의 폭력을 저지한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열어젖히며 세상이 그것을 보든 말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방식의 발가벗음. 발가벗긴다는 것은 벗겨졌다는 것이고 벗겨졌다는 것은 스스로 벗었다는 뜻이며 동시에 벗겨져도 된다는 내밀한 허락이다. 울음은 인간이 가장 무력해지는 상태이지만 바로 그 무력함 때문에 가장 정직해지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에게 울음은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다. 보호받으려는 행위가 아니라 보호하고 싶은 것들을 붙잡고 버티려는 행위다. 그러므로 우리는 숨어서 운다. 나는 숨어서 운다. 우리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운다. 나는 사람 앞에서 울어본 적 없다.
그래서 우는 남자는 감동적이다. 그는 가장 진실된 형태로 패배를 인정한 해방된 자다. 나는 우는 남자를 존중한다. 나는 결핍된 남성성을 끌어안는다. 나는 숨지 않고 우는 남자를 본 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