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파크와 경험비판

by 고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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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시원하지만 물가에 선 사람은 덥다. 햇볕은 어깨뼈를 따갑게 두드리고 발등은 아스팔트 위에서 익어간다. 그 아래 차곡차곡 꽂힌 구명조끼들은 날마다 젖고 말기를 반복하며 누군가의 안심을 입는다. 우리는 그 안심을 팔고 그 무사함을 빌려준다. 그리고 그 무사함의 대가로 땀방울을 적립하며 하루를 살아낸다.


워터파크는 여름의 격렬한 한복판에 존재한다. 부유하는 땀과 염소 냄새, 튜브들의 고무 마찰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른들의 고함이 한데 엉켜 어지러운 배경음을 만든다. 어떤 날엔 거대한 축제 같았고 또 어떤 날엔 세계의 축소판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물 가장자리에서조차 온전히 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젖지 않았다. 흠뻑 뛰어드는 대신 어정쩡한 걸음으로 가장자리를 맴돌며 바짝 마른 두 손으로 자신의 자리를 계속 확인해야 했다.


나는 운이 좋았다. 겸손의 문장이 아니라 경험적 표현이다. 나보다 먼저 이곳에 발을 디딘 이들이 손을 건넸고 그 손짓은 단순한 호의나 친절이 아니라 공간의 맥락을 짚어주는 지도였다. 그 지도가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오랫동안 헤맸을 것이다. 혹은 아예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은 빠르지 않았고 설명의 반복을 마다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놓쳤을 때에도 질타하지 않았고 때로는 나의 일을 대신해주기도 하였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나는 이 워터파크의 리듬에 발을 맞출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운이 좋았다는 사실은 누군가는 운이 나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운을 배당받지 못했다. 늘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사람, 교육을 두세 번이나 들었음에도 여전히 물어야 했던 사람, 자꾸만 어색한 동선으로 눈에 띄었던 사람, 웃음 타이밍을 놓쳤던 사람. 그런 이들은 이곳에 제대로 흠뻑 젖지 못했다. 바싹 마른 두 손은 언제나 물가에만 머물렀고 그들은 오직 땀으로만 젖어갔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기에 이곳은 충분히 축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외는 부드럽고 조용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결정적인 거절의 말없이도 완벽히 작동한다. 누구도 노골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밀하고 사소하며 자주 설명할 수 없는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의 순서가 자꾸만 밀려나는 순간에, 다수의 웃음 속에서 홀로 웃지 못하는 짧은 침묵에 스며 있다. 아무도 적대하지 않았는데도 발을 맞추는 것에 신경 쓰기 시작할 때 소외는 이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감각이 아니라 내가 틀린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소외는 공간의 구석을 점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한가운데를 지나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중심에서 약간 비껴나 있다. 더욱이 워터파크와 같이 격렬한 공간에서는 소외가 더 잘 감춰진다. 함성과 웃음,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과 고객 응대의 소란 속에서 소외는 사라진다. 모두가 바쁘고 모두가 고단하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의 낯빛이나 동선의 어색함이 쉽게 지워진다는 것이다.


워터파크에 오래 머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조용하다. 그들은 정확하다. 그들은 효율적이다. 언제 서둘러야 하는지 알고 언제 여유를 가져도 되는지 안다. 일의 흐름을 끊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법을 알고 돌발 상황에 당황하지 않는 법을 안다.


그러나 이러한 능숙함은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능숙함은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시스템 밖에 선 이들을 배제한다. 그들은 배웠기 때문에 침묵하고 반복 속에서 익숙해졌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한다. 이러한 침묵은 의도된 악의가 아니라 훈련된 무심함에 가깝다. 원래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질서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 질서는 어떤 외부의 질문도 반영하지 않는 하나의 관성이 된다.


그들의 눈빛은 일정한 방향을 가진다. 신입은 설명해야 할 존재. 실수를 예감하게 하는 불안 요소. 속도를 늦추는 변수. 그리하여 누군가는 설명하지 않기로 하고 누군가는 다른 이에게 떠넘긴다. 침묵은 위계가 감추는 가장 날카로운 형식이다.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설명 받을 자격을 박탈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거대한 의도나 설계의 결과가 아니다. 소외는 누군가가 고의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가장 정교한 소외는 누구의 의식도 거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설명이 생략되고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자리의 배치, 태도의 뉘앙스, 말투의 단절, 인사의 유무 같은 사소한 단편들이 얽혀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지금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경험이 처음인 사회초년생들은 이것을 언어화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받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 설명을 요구하지 못하고 관계를 요청하지 못한다.


이 고립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급여가 잘못 입금된 것 같을 때 인사팀에 연락해 설명을 요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알더라도 그것이 불편함을 유발할까 두려워 포기한다. 통근 버스가 시간표를 어기고 일찍 출발하였을 때 총무팀에 항의해야 하지만 그 방식과 어휘를 알지 못한다. 시스템에 말을 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시스템으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한다.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하물며 관계의 문제나 소속감의 문제는 더욱 다루기 어렵다.


그들은 언어로 표현할 줄 모르고 항의할 용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소외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소외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을 명확히 밀어내지 않았기에 그들은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이 조직이 개인을 길들이는 방식이다.


조직과 시스템의 질서의 구조는 이렇게 인간을 소외시킨다. 그 구조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고 다수의 눈짓과 침묵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눈치로 이루어진 시스템은 매우 정교하다. 명문화된 규칙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누구도 위반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그 안에서 살아간다. 원래 그렇게 해왔다는 말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지만 시스템의 유일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말 앞에서는 모든 개선의 시도는 무력해진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쁘지 않다. 다만 구조가 무심할 뿐이다. 하지만 이 무심함은 의도적인 악의보다 더 해롭다. 악의라면 그것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할 수 있지만 무심함은 그 자체로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는다. 별일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무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웅적인 개입이 아니다. 시스템은 사람의 몸과 말로 움직인다. 정말이다. 변화는 거대한 제도개혁이 아니라 아주 작고 인간적인 순간에서 비롯된다.


옆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 사소한 질문에 정성을 담아 대답하는 일. 명찰을 바라보지 않고 눈을 바라보는 일. 말이 끝나기 전에 대답하지 않는 인내. 타인의 낯섦을 조롱하지 않는 성숙함. 이러한 태도들이 조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그야말로 조직의 공기를 바꾼다. 무심함이 그랬듯이 이 공기는 제도화된 언어보다 더 무겁고 더 오랫동안 작용한다. 공기가 바뀔 때 사람들은 환영받고 있다고 느낀다. 바로 그 순간 소외는 균열을 맞이하고 그때서야 비로소 언어화될 수 있는 여지를 얻는다.


우리는 타인의 미숙함을 얼마나 오래 기다릴 수 있는가. 이것은 단순한 인내의 문제가 아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의 인내와 시스템의 압박 중 어느 것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가에 관한 문제다.


누군가의 어색한 태도를 미숙함으로 볼 것인가 불손함으로 볼 것인가. 이것은 실제로 매우 윤리적인 문제다. 같은 행동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이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을 배움의 의지로 볼 수도 있고 귀찮게 구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반응이 느린 것을 신중함으로 볼 수도 있고 둔함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 해석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과 편견, 그 순간의 기분과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바쁘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따져 짚어보면 다른 관점이 가능하다는 것을 손쉽게 알 수 있다.


누군가의 더듬거림을 잠시 멈추어 함께 들어줄 수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을 한 명의 독립적인 인간으로 존중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더듬거리는 말속에도 그 사람만의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웃지 못하는 얼굴을 나무라기 전에 그 안에 고인 열기를 식혀줄 수 있는가. 그 뜨거운 침묵 뒤에 숨어 있는 말을 끌어내기 위해 기다릴 수 있는가. 침묵은 감정을 숨기는 기술이 아니라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의 마지막 저항이다. 침묵하는 이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강요하기보다 침묵이 말이 되기까지 곁에 머무는 일이야말로 서로를 가로지르는 가장 근본적인 환대일 것이다.


이런 질문들은 우리 각자에게 던져진 도전이다. 완벽한 답은 없다. 우리도 인간이고 우리도 바쁘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팔월의 여름이 다가오고 그때가 되면 새로운 사람들이 다시 들어온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말을 먼저 걸지 못한다. 먼저 웃어보이는 것이 아직도 서툴고 친절한 손짓보다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볼 때가 많다. 그러나 적어도 침묵이 만들어내는 간격이 얼마나 넓은지 안다. 작은 눈짓이 얼마나 큰 불안을 줄 수 있는지를 안다. 누구도 외따로 앉아 있는 이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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