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겐남, 포섭된 남성성의 해방

by 고승환
emancipate.jpg Michelangelo - The Creation of Adam (1512)

최근 자주 회자되는 에겐남이나 테토녀라는 유행어는 자칫 혐오적 맥락으로 오해될 여지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를 시사하는 측면이 있다. 전통적인 성별 역할에 충실하지 않은 남성과 여성에 대해 사회가 미소를 머금고 호명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최소한 이러한 존재들이 더 이상 낯설거나 위협적인 타자로만 여겨지지 않는다는 무언의 동의를 암시한다. 비록 이 용어들이 완전히 긍정적인 언어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누군가를 낯선 방식으로 포착하고 호명할 언어를 스스로 생산해냈다는 점은 새로운 젠더 감각을 향한 미세한 균열의 징후일 수 있다.


에겐남과 테토녀라는 표현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성별 전복의 양상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용어는 전통적 젠더 이분법의 경계를 흐리면서도 완전히 해체하지는 않는 애매한 지점에 위치한다. 테토녀는 기존의 여성스러움이 배제했던 경쟁심과 성취욕을 포용하면서도 여전히 녀女라는 젠더 표지를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에겐남은 섬세함과 감수성, 자기 꾸밈이라는 전통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진 특질을 남성성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기존 남성성의 경계를 확장한다.


이제는 여성성이 여성만의 것이 아니며 남성성이 남성만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감지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스러움과 남자다움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리고 왜 여성에게는 여성스러움을, 남성에게는 남자다움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적 특을 적용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이 남아있다.


여성"스러움"은 부드러움, 수동성, 감성과 같은 특정한 특질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며 남자"다움"은 단호함, 강인함, 주도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언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행동과 표현의 범위를 규정짓는 역할을 해왔다. 페미니즘은 바로 이처럼 성별에 따라 구성된 여성스러움과 남자다움의 개념이 어떻게 권련 관계를 재생산하며 정체성을 제한해 왔는지를 비판해 왔다. 결국 이러한 개념들을 단순히 뒤바꾸어 적용하는 것만으로는 성별에 대한 이분법적 전제를 전복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분법의 경계를 흐려놓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친근한 유형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개개인의 젠더 수행이 전통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는 단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만의 정체성과 감성의 표현 방식을 유연하게 구성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선택하고 선언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섬세함이 조롱 대신 인정받고 누군가의 거침이 파격이 아닌 가능성으로 이해되는 사회는 분명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변화가 진정한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에겐남이나 테토녀라는 말들이 일상적으로 유통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는 것과 그것이 진정으로 수용되었다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에겐남이나 테토녀라는 명명 또한 하나의 규범적 시선을 전제하는 측면이 있고 때로는 소비적 기호로 전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용어들이 유통되는 방식은 우리가 젠더 수행에 대해 어느 정도의 사회적 합의나 포용의 태도에 도달해가고 있다는 징후로는 읽을만하다. 예전 같았으면 이상한 사람이나 성역할에서 벗어난 일탈자로 낙인찍혔을 이들이 이제는 밈과 유머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 그들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공동체가 그들을 해석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작은 균열이며 성찰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마침내 새로운 젠더 감각과 서서히 조우하기 시작했다는 조용하고도 의미 있는 변화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이제는 남성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진영 안에서 남성은 어떤 위치를 점해야 하는가. 가해자로서의 남성성을 반성하고 해체하라는 요구 앞에서 우리는 많은 남성들이 침묵으로 후퇴하거나 과도한 자기 검열에 빠져드는 것을 목격했다.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환영받지만 그 동조의 진정성은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진보적 담론 안에서 남성의 발화는 항상 이미 권력적인 것으로 선해석되며 그들의 침묵 역시 무관심이나 저항으로 해석된다.


이 해석의 틀 안에서 남성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진정성을 의심받는 구조적 위치에 놓인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의심이 과연 건설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남성들을 방어적 자세로 후퇴시키거나 표면적 순응에 머물게 할 뿐인가.


지금껏 우리는 남성성의 해체를 말하면서도 정작 그 해체의 주체가 될 남성들의 내면적 고통과 혼란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통적 남성 역할에서 벗어나려는 남성들이 경험하는 정체성의 위기, 새로운 관계 방식을 학습해야 하는 부담 그리고 변화하는 젠더 규범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해야 하는 어려움은 종종 특권층의 불만으로 치부해 왔다. 하지만 진정한 젠더 평등은 여성의 해방과 동시에 남성을 기존의 억압적 남성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대의 소년들이 자라면서 접하게 되는 메시지는 모순적이다. 한편으로는 전통적 남성성의 억압에서 벗어나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강하고 책임감 있는 존재가 되라고 요구받는다. 감정을 표현하라고 하면서도 그 감정이 여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제한받는다. 이러한 이중 메시지 속에서 성장하는 젊은 남성들의 혼란과 좌절을 우리는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는가.


가정에서 돌봄 노동을 분담하려 하지만 여전히 서투른 아버지들, 감정 표현을 배우려 하지만 수 십 년간의 사회화로 인해 어색해하는 남성들 그리고 페미니즘을 지지하면서도 자신 안의 무의식적 편견과 싸우는 남성들의 노력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이들의 시행착오와 불완전한 변화 시도를 단순히 아직 부족하다고 질책하는 것만이 해답인가. 변화의 과정에 있는 주체들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함을 요구하는 심판이 아니라 변화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연대와 격려가 아닌가.


남성 연대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기존의 남성 연대가 여성 혐오와 동사회적 유대를 기반으로 한 배타적 결속이었다면 새로운 형태의 남성 연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서로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감정적 지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남성들 간의 관계, 경쟁과 위계가 아닌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한 남성 공동체는 과연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되기도 전에 남성들끼리 모이면 결국 여성 혐오적 담론이 나올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그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것은 옳은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젠더 평등이라면 그 평등의 비전 안에는 해방된 남성성의 모습도 포함되어야 한다. 돌봄과 양육에 참여하는 남성, 감정적으로 개방적으로 친밀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성, 경쟁보다는 협력을 선택할 수 있는 남성 그리고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남성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담론 지형에서 이러한 새로운 남성성의 모델들은 충분히 제시되고 있는가 아니면 남성성의 해체라는 부정적 서술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결국 우리는 묻게 된다. 진정한 젠더 해방은 여성만의 해방인가 아니면 모든 성별의 해방인가. 남성성의 변화 없이 여성의 완전한 해방이 가능한가. 그리고 남성성의 변화를 위해서는 남성들 자신의 능동적 참여와 성찰이 필요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변화 노력을 어떻게 지지하고 격려할 것인가. 완벽하지 않은 그들의 시도들을 어떻게 건설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변화의 동력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이 모든 질문들 앞에서 나 역시 남성으로서의 내 위치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남성성의 해방을 논하면서도 여전히 지적 권위를 통해 발언권을 확보하려는 전통적 남성성의 패턴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페미니즘적 문제 의식을 드러내면서도 결국은 남성 중심적 관점에서 이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자기 의심의 순환 속에서도 여전히 말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의심과 성찰의 과정을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많이 실패해야 한다. 더 많이 언어화해야 한다. 더 많이 부끄러움을 견뎌내야 한다. 더 많이 무지를 인정하고 그 무지 안에 머물러야 한다. 더 많이 침묵해야 하고 그 침묵 속에서 들리는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만남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이 글은 영월철학회를 통해 집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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