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나무(1) 보리밥나무
4년전인 2022년 여름, 제주에서 한 달을 지냈습니다. 섬을 천천히 걸으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때 자주 눈에 들어오던 나무 하나가 있습니다. 까마귀쪽나무(Neolitsea sericea, 네올리트세아 세리케아) 무리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있던 작은 나무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덤불쯤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 나무는 조금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줄기는 완전히 곧게 서지 않고, 그렇다고 땅에 눕지도 않습니다. 주변 나무의 가지 사이로 몸을 비틀며 올라가고, 바람이 불면 그 사이에서 유연하게 흔들립니다.
그 나무가 보리밥나무(Elaeagnus macrophylla, 엘라이아그누스 마크로필라)입니다.
보리밥나무는 보리수나무과(보리수나무과, Elaeagnaceae)에 속하는 상록 작은키나무입니다. 다만 식물도감의 설명은 이 나무를 정확히 다 담지 못합니다. 보리밥나무는 단순한 관목도, 전형적인 덩굴도 아닙니다. 식물학에서는 이런 자세를 흔히 “반덩굴성”이라고 부릅니다. 줄기가 스스로 서기도 하지만, 필요하면 주변 식생을 살짝 빌려 올라가기도 하는 형태입니다.
이 자세는 성격이라기보다 환경의 결과에 가깝습니다. 보리밥나무가 가장 많이 자라는 곳은 해안입니다. 바람이 거칠고, 토양은 얕으며, 염분이 섞인 공기가 끊임없이 불어오는 자리입니다. 이런 곳에서 키를 높게 세우는 것은 위험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줄기가 길게 자랄수록 바람의 힘을 그대로 받기 때문입니다. 해안에서는 실제로 수고가 낮고 수관이 넓게 퍼지는 형태가 흔합니다. 바람이 강한 곳에서 나무가 취하는 전형적인 형태적 적응입니다.
그래서 보리밥나무는 다른 방식을 택합니다. 낮게 퍼지며 버티다가, 주변 식생이 만들어 놓은 틈을 만나면 그 사이로 몸을 올립니다. 완전히 의존하지도 않고, 완전히 독립하지도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주변 식생을 구조물처럼 이용합니다. 덩굴식물처럼 다른 나무를 감거나 붙잡는 기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몸을 기대며 자랄 뿐입니다.
이 방식에는 장점이 있습니다. 줄기를 굵게 키우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바람이 강한 해안에서는 굵은 줄기보다 유연한 가지가 더 오래 버티기도 합니다. 또 주변 식생의 그늘과 구조를 이용하면 어린 개체가 강한 바람과 염분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해안 식생에서는 이런 ‘기대기 전략’이 생각보다 흔합니다.
제주에서도 비슷한 자세를 취하는 식물을 몇 가지 더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박덩굴(Celastrus orbiculatus, 켈라스트루스 오르비쿨라투스)이나 청미래덩굴(Smilax china, 스밀락스 키나)은 아예 덩굴식물로 다른 나무를 타고 오릅니다. 반대로 사철나무(Euonymus japonicus, 유오니무스 자포니쿠스)나 돈나무(Pittosporum tobira, 피토스포룸 토비라)는 낮게 퍼지는 관목으로 바람을 견딥니다. 보리밥나무는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간”은 미완성 단계가 아닙니다. 하나의 완성된 형태입니다.
식물의 형태는 흔히 교목, 관목, 덩굴처럼 나뉘어 설명되지만, 실제 자연에서는 그 사이의 다양한 전략이 존재합니다. 어떤 식물은 스스로 서고, 어떤 식물은 완전히 기대어 오르며, 또 어떤 식물은 상황에 따라 두 방식을 함께 사용합니다. 보리밥나무는 바로 그 세 번째 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덩굴이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큰 교목으로 진화하지도 않았습니다. 덩굴식물이 되려면 줄기를 감거나 붙잡을 구조가 필요합니다. 보리밥나무에는 그런 기관이 없습니다. 반대로 큰 교목이 되려면 깊은 토양과 안정적인 뿌리 기반이 필요합니다. 해안의 얕은 토양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결국 보리밥나무는 다른 해안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해안이라는 환경에 맞는 몸을 선택한 셈입니다. 스스로 서되, 필요하면 주변의 구조를 빌리는 방식.
보리밥나무의 잎을 뒤집어 보면 또 하나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잎 뒷면이 은빛에 가깝게 밝습니다.
보리수나무속(보리수나무속, Elaeagnus)의 잎에는 비늘 모양의 미세한 털이 촘촘히 붙어 있습니다. 식물학에서는 이런 구조를 인모(鱗毛) 또는 트리코움(trichome)이라고 부릅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작은 비늘이나 별 모양의 판이 잎 표면에 겹겹이 놓여 있는 형태입니다. 이 때문에 보리밥나무의 잎은 멀리서 보면 은빛을 띱니다.
겉으로 보면 플라타너스 잎 뒷면의 솜털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구조는 다릅니다. 플라타너스의 털이 솜털처럼 퍼진 별 모양이라면, 보리밥나무의 털은 작은 비늘이 겹겹이 붙은 형태입니다. 그래서 플라타너스의 잎은 흐릿한 회백색으로 보이지만, 보리밥나무의 잎은 은빛처럼 반짝입니다.
바람이 불면 잎이 뒤집히며 그 은빛이 번쩍 드러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색채가 아닙니다. 해안 식물에게 잎 표면은 가장 먼저 환경과 맞서는 곳입니다. 강한 햇빛, 염분이 섞인 바람, 건조한 공기가 동시에 작용하는 자리입니다.
보리밥나무의 은빛 털은 이 환경에 대응하는 여러 역할을 합니다.
첫 번째는 빛의 반사입니다. 은빛 비늘은 햇빛을 일부 반사해 잎 표면의 온도를 낮추는 효과를 냅니다. 강한 일사 아래에서 잎이 과열되는 것을 막고, 광합성 조직이 손상되는 것을 줄여 줍니다.
두 번째는 수분 손실을 줄이는 기능입니다. 잎 표면의 털층은 미세한 공기층을 만들어 증산을 완충합니다. 잎 바로 위에 얇은 습한 공기층이 형성되기 때문에 수분이 빠르게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건조하고 바람이 강한 환경에서 특히 효과적입니다.
세 번째는 염분에 대한 방어입니다. 해안에서는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이 잎 표면에 직접 닿습니다. 비늘털은 염분 입자가 잎 표면 조직에 바로 접촉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 줍니다. 실제로 해안 식물에서는 이런 비늘 구조가 염분과 수분 스트레스를 완충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초식 동물과 곤충에 대한 방어입니다. 많은 식물에서 잎털은 곤충이 잎 표면에 접근하거나 산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잎의 미세한 털은 작은 장벽이 되어 잎 조직이 직접 노출되는 것을 줄입니다.
이렇게 보면 보리밥나무의 은빛은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여러 기능이 겹쳐 만들어진 표면입니다. 빛을 반사하고, 수분을 붙잡고, 염분을 완충하고, 잎을 지키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은빛이 드러나는 장면은 단순한 색의 변화가 아닙니다.
해안의 날씨와 싸우며 만들어진 표면이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이 나무를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드는 일은 땅속에서 일어납니다.
보리밥나무는 질소고정 식물입니다. 뿌리에는 방선균(Frankia, 프랑키아)과 공생하는 뿌리혹이 만들어집니다. 이 미생물은 공기 중 질소(N₂)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암모니아 형태로 바꿉니다. 식물은 그 질소를 이용해 단백질과 엽록소를 만들고, 대신 미생물에게 탄수화물을 제공합니다.
이 공생 덕분에 보리밥나무는 다른 식물들이 쉽게 자라지 못하는 토양에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해안의 토양은 대개 가난합니다. 모래와 자갈이 많고, 유기물은 적으며, 비가 와도 영양분이 쉽게 씻겨 내려갑니다. 염분이 섞인 바람까지 더해지면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질소는 더 부족해집니다. 많은 식물에게는 불리한 조건입니다.
그러나 보리밥나무에게는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공기 속 질소를 직접 끌어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단순히 가난한 땅에서 버티는 식물이 아닙니다. 그 땅의 조건을 조금씩 바꾸는 식물입니다. 낙엽이 떨어지고, 뿌리 주변 토양에 질소가 축적되면서 주변 토양의 비옥도가 서서히 높아집니다. 그 결과 처음에는 드물던 다른 식물들이 점차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생태학에서는 이런 식물을 개척종(pioneer species) 또는 토양 개량 식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척박한 환경에 먼저 들어와 조건을 완화하고, 뒤이어 다른 식물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해안 숲의 초기 단계에서 보리밥나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이런 능력이 해안 식물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주 해안 숲을 이루는 주요 식물들을 보면 대부분은 질소를 직접 고정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까마귀쪽나무(Neolitsea sericea, 네올리트세아 세리케아), 돈나무(Pittosporum tobira, 피토스포룸 토비라), 사철나무(Euonymus japonicus, 유오니무스 자포니쿠스) 같은 상록 관목들은 토양 속에 이미 존재하는 질소에 의존합니다.
질소고정 능력은 오히려 특정 계통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전략입니다. 콩과식물처럼 뿌리혹 박테리아와 공생하는 식물들이 대표적이고, 보리밥나무가 속한 보리수나무과(Elaeagnaceae)는 방선균과 공생하는 몇 안 되는 목본 식물 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때문에 보리밥나무는 해안 숲에서 조금 특별한 위치에 놓입니다. 다른 나무들이 이미 형성된 토양을 이용하는 식물이라면, 이 나무는 토양의 조건을 바꾸는 식물입니다.
그 결과 해안 숲에서는 종종 이런 장면이 나타납니다.
먼저 보리밥나무 같은 질소고정 식물이 들어옵니다. 척박한 모래와 자갈 사이에서 군락을 이루며 토양에 유기물을 더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까마귀쪽나무나 후박나무 같은 난대성 상록수들이 그 사이에 들어옵니다. 숲은 조금씩 높아지고, 구조가 복잡해집니다.
보리밥나무는 그 숲의 중심 나무가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숲이 시작되는 자리에는 종종 이 나무가 있습니다.
바람이 가장 먼저 닿는 자리에서
다른 식물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땅을 조금씩 바꾸는 나무입니다.
보리밥나무의 시간표도 독특합니다. 이 나무는 가을에 꽃을 피우고, 겨울을 지나 이른 봄에 열매를 붉게 익힙니다. 많은 나무들이 여름이나 가을에 열매를 내놓는 것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이 시간표는 우연이라기보다 새의 시간과 맞물린 결과에 가깝습니다. 남서해 도서 지역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보면, 보리밥나무 열매를 먹는 새는 적지 않았습니다. 찌르레기(Sturnus cineraceus, 스투르누스 시네라케우스), 직박구리(Hypsipetes amaurotis, 힙시페테스 아마우로티스), 개똥지빠귀(Turdus naumanni, 투르두스 나우만니) 등을 포함해 모두 8종이 이 열매를 이용했습니다. 새가 먹고 지나간 종자는 그냥 떨어진 열매보다 더 빨리, 더 잘 싹텄습니다. 새는 과육만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씨앗의 휴면을 줄이고 새로운 해안으로 옮겨 주는 운반자이기도 했습니다.
제주에서는 이 관계를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습니다. 제주 전역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직박구리가 82종의 열매를 먹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직박구리는 제주 난대림과 해안 숲에서 가장 중요한 종자산포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리밥나무의 붉은 열매도 이런 새들의 이동과 섭식망 안에 놓여 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봄은 북상하는 새들이 섬과 해안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시기인데, 숲 전체로 보면 아직 열매가 풍부하지 않은 때입니다. 바로 그때 보리밥나무가 익습니다. 이 나무는 봄을 장식하는 나무라기보다, 봄의 공백을 메우는 나무에 가깝습니다.
이 시간표는 제주 식물 전체에서 흔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식물은 가을에 익고, 새들은 그 풍성한 계절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제주와 남해안의 상록 덩굴·관목 가운데는 드물게 가을에 꽃피고 다음해 봄에 열매를 익히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송악(Hedera rhombea, 헤데라 롬베아)입니다. 2020년 섬 생태계 먹이 연구에서는 보리밥나무와 송악이 4~5월에 잘 익은 열매를 제공하는 대표 식물로 함께 언급됐고, 먹이가 부족한 3~4월에는 보리밥나무 선호도가 특히 높았습니다. 다시 말해 보리밥나무의 시간표는 완전히 고립된 예외라기보다, 제주 난대성 상록 식생 안에서 봄철 새 먹이 자원을 분담하는 하나의 패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중에서도 보리밥나무는 붉고 눈에 띄는 열매, 해안 분포, 그리고 질소고정 식물이라는 점까지 겹쳐 좀 더 독특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제주에서는 보리수나무류를 통틀어 ‘볼레낭’이라고 부릅니다. 보리밥나무도 보리 수확철에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볼레(보리)+나무(낭), 즉 ‘보리볼레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사람들(Homo sapiens, 호모 사피엔스), 특히 아이들에게 좋은 간식거리가 돼 주었습니다. 이 이름에는 분류학보다 먼저 생활의 감각이 들어 있습니다. 해안 숲 가장자리에서 바람을 견디고, 봄이면 먼저 열매를 내어 새와 사람 가까이에 있던 나무. 그래서 보리밥나무의 붉은 열매는 단순한 결실이 아니라, 섬의 봄이 아직 다 차오르기 전에 먼저 켜지는 작은 신호처럼 보입니다.
해안 숲은 혼자 서는 나무들의 숲이 아니라, 서로의 몸 사이에서 버티는 나무들의 숲입니다. 보리밥나무는 그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리밥나무
보리수나무과(보리수나무과, Elaeagnaceae)에 속하는 상록 작은키나무. 해안 숲 가장자리에서 자라며 반덩굴성 형태를 보인다. 질소고정 식물로 척박한 토양에서도 자랄 수 있다.
반덩굴성
줄기가 스스로 서기도 하지만 주변 식생이나 구조를 이용해 기대며 자라는 형태. 완전한 교목도, 완전한 덩굴식물도 아닌 중간 전략의 식물 형태.
인모(鱗毛)
잎 표면에 붙은 비늘 모양의 미세한 털. 보리수나무속 식물의 특징으로 빛 반사, 증산 억제, 염분 완충 등의 기능을 한다.
트리코움(trichome)
식물의 잎이나 줄기 표면에 형성되는 미세한 털 구조의 총칭.
질소고정
공기 중 질소(N₂)를 식물이 이용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과정. 보리밥나무는 뿌리혹에서 방선균과 공생해 질소를 확보한다.
방선균(Frankia)
질소고정을 하는 토양 미생물. 보리수나무과 식물의 뿌리혹에서 공생하며 질소를 공급한다.
개척종(pioneer species)
척박한 환경에 먼저 정착해 토양 조건을 개선하고 이후 다른 식물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드는 식물.
종자산포(seed dispersal)
열매를 먹은 동물이나 바람, 물 등을 통해 씨앗이 다른 장소로 퍼지는 과정.
볼레낭
제주어로 보리수나무류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 ‘볼레(보리)’와 ‘낭(나무)’이 결합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