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나무(2) 아왜나무 첫번째 이야기
제주 숲에서는 초여름이면 흰 꽃이 크게 퍼지는 나무가 있습니다. 잎 위로 수백 개의 작은 꽃이 모여 둥근 꽃차례를 만들고, 멀리서 보면 마치 흰 구름이 가지마다 내려앉은 것처럼 보입니다.
가을이 되면 그 자리에 열매가 달립니다. 처음에는 선명한 붉은색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어두워지고 결국 검게 익습니다. 한 가지 위에서 붉은 열매와 검은 열매가 함께 보이기도 합니다. 붉게 달린 열매가 가지 끝에 모여 있는 모습은 작은 산호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예부터 ‘산호수(珊瑚樹)’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제주에서는 꽤 익숙한 풍경입니다.
이 나무가 아왜나무(Viburnum awabuki, 비버넘 아와부키)입니다.
아왜나무의 분류는 조금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식물 문헌에서는 오랫동안 이 나무를 향기가막살나무(Viburnum odoratissimum)의 변종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계통 연구와 국제 식물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아왜나무를 독립된 종(Viburnum awabuki)으로 보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이름만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변종으로 볼 때는 넓은 종 안에서 나타나는 지역적 차이로 이해되지만, 독립종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동아시아 난대 지역에서 이 나무가 나름의 진화 경로를 걸어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아왜나무의 분포도 그런 해석과 잘 맞습니다. 이 나무는 한반도 남부와 제주, 일본 중·남부와 류큐 열도, 대만으로 이어지는 난대 지역에서 자랍니다. 지도 위에서 보면 그 분포가 하나의 기후대를 따라 길게 이어집니다. 겨울이 비교적 온화하고 습도가 높으며 바닷바람이 잦은 곳입니다.
아왜나무는 바로 그 난대 기후대에서 분화해 자리 잡은 가막살나무입니다.
이 나무를 생태적으로 읽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잎입니다.
한국에 자라는 가막살나무속(Viburnum) 식물들은 대부분 낙엽 관목입니다. 가막살나무(Viburnum dilatatum)나 덜꿩나무(Viburnum erosum)는 가을이면 잎이 붉게 물들고 겨울에는 가지가 드러납니다. 잎은 비교적 얇고 가장자리에 작은 톱니가 있습니다.
아왜나무는 그 가운데서 조금 다른 방향에 서 있습니다. 잎은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는 상록이고, 가장자리는 거의 물결 없이 매끈합니다. 두껍고 광택이 강합니다. 같은 속의 다른 종들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바로 드러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모양의 차이가 아닙니다. 가막살나무속을 대상으로 한 계통 연구에서는 잎의 형태가 기후와 함께 반복적으로 바뀌어 왔다는 결과가 보고됩니다. 열대와 난대 지역의 종들은 상록성이 많고 잎이 두껍고 전연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온대로 갈수록 낙엽성이 늘어나고 잎은 더 얇아지며 톱니가 발달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아왜나무의 잎은 바로 그 남쪽 계통의 특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윤기를 종종 조경 취향으로 이해합니다. 울타리에 어울리는 단정한 광택, 겨울에도 푸른 잎. 그러나 식물의 시간 속에서 보면 그 광택은 장식이 아니라 기후의 흔적입니다. 따뜻하고 습한 난대 환경 속에서 유지되어 온 잎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 잎은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잎을 뒤집어 보면 잎맥이 갈라지는 부분에 작은 털이나 주머니 같은 구조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식물학에서는 이를 도마티아(domatia)라고 부릅니다.
도마티아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포식성 응애 같은 작은 절지동물이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응애들은 식물의 잎을 갉아먹는 해충을 잡아먹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작은 동맹군을 불러들이는 방식입니다.
국내 연구에서도 가막살나무속 식물 가운데 아왜나무에서 이러한 도마티아 구조가 발달하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습니다. 같은 연구에서는 꽃이 아닌 곳에서 꿀을 분비해 곤충을 불러들이는 화외밀선(花外蜜腺)도 관찰된다고 기록됩니다.
그래서 아왜나무의 잎은 단순히 두껍고 질긴 잎이 아닙니다. 겉에서는 매끈하고 단단한 표면을 만들고, 뒤쪽에서는 작은 포식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합니다. 매끈한 잎의 반대편에는 보이지 않는 협력자들의 방이 있습니다.
이 나무의 흥미로운 특징은 가지에서도 나타납니다.
나무의 가지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아래로 처집니다. 자신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고, 잎과 눈, 바람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활엽수는 이런 기울어짐을 다시 바로잡는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가지가 아래로 처지면 윗부분에 장력목(張力木, tension wood)이라는 특수한 목재 조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조직은 수축하는 힘을 만들어 가지를 위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시간이 지나면 처졌던 가지가 다시 올라가는 이유입니다.
침엽수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이 나타납니다. 이들 나무는 기울어진 줄기나 가지의 아래쪽에 압축목(壓縮木, compression wood)을 만들어 아래에서 밀어 올립니다. 활엽수는 위에서 당기고, 침엽수는 아래에서 받쳐 올리는 셈입니다.
그런데 아왜나무의 가지에서는 이 전형적인 활엽수의 반응과 조금 다른 모습이 관찰됩니다.
목재 해부학적 연구를 보면, 아왜나무는 가지가 처졌을 때 윗부분에서 강하게 당겨 올리기보다 아래쪽 목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쪽으로 반응합니다. 리그닌 같은 목질 성분의 조성이 달라지면서 아래쪽 목부의 강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지를 적극적으로 들어 올리기보다, 기울어진 상태를 안정시키는 쪽에 가까운 반응입니다.
그래서 많은 나무가 가지를 다시 세우려고 한다면, 아왜나무는 그 상태를 버틸 수 있도록 구조를 조정하는 나무에 가깝습니다.
나무에게 근육은 없습니다. 그러나 목재 조직은 때때로 근육처럼 행동합니다. 어느 쪽을 더 단단하게 만들지, 어느 쪽을 더 많이 자라게 할지를 조정하면서 가지의 자세를 조금씩 바꾸기 때문입니다.
아왜나무의 가지는 그래서 곧게 서기보다 휘어진 채 균형을 찾습니다.
이 전략은 이 나무의 삶의 장소와도 잘 어울립니다. 아왜나무는 숲 깊숙한 곳보다 숲 가장자리나 해안 숲에서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람이 계속 가지를 밀어내는 환경입니다. 그곳에서는 완전히 곧은 가지보다, 약간 휘어진 채 안정된 가지가 더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왜나무의 가지는 때로 이렇게 보입니다. 바람을 이기려는 나무라기보다, 바람 속에서 균형을 찾는 나무처럼.
아왜나무는 제주 숲에서 흔히 보이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나무는 단순한 상록수가 아닙니다.
난대 기후에서 분화한 가막살나무이며, 두꺼운 잎으로 기후를 기억하는 식물입니다. 그 잎의 뒷면에는 작은 포식자들이 머무는 방이 있고, 때로는 곤충을 불러들이는 꿀샘도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작은 동맹군을 불러들이는 방식입니다.
가지 또한 바람에 맞서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많은 나무가 기울어진 가지를 다시 세우려고 할 때, 아왜나무는 그 상태를 버틸 수 있도록 목재의 성질을 바꿉니다. 바람을 이기기보다 바람 속에서 균형을 찾는 전략입니다.
그래서 아왜나무는 이렇게 보입니다. 제주 숲 가장자리에서, 바람 속에서도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처럼.
아왜나무
아왜나무(Viburnum awabuki, 비버넘 아와부키)는 제주와 한반도 남부, 일본, 대만 등 난대 지역에 분포하는 상록 가막살나무다.
산호수(珊瑚樹)
붉게 달린 열매가 산호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막살나무속
가막살나무속(Viburnum, 비버넘)은 전 세계에 약 160여 종이 분포하는 관목·소교목 속이다.
도마티아
도마티아(domatia)는 잎맥 사이에 형성되는 작은 주머니나 털 구조로, 포식성 응애 등의 서식처가 된다.
화외밀선
화외밀선(花外蜜腺, extrafloral nectary)은 꽃이 아닌 곳에서 꿀을 분비하는 구조로, 곤충을 유인해 식물을 보호하는 간접 방어 전략이다.
반응목
반응목(Reaction wood)은 나무가 기울어졌을 때 자세를 조정하기 위해 형성하는 특수한 목재 조직이다.
장력목
장력목(張力木, tension wood)은 활엽수에서 형성되는 반응목으로 줄기를 위쪽으로 당겨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한다.
압축목
압축목(壓縮木, compression wood)은 침엽수에서 형성되는 반응목으로 아래쪽에서 줄기를 밀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가막살나무속 계통수 >
가막살나무속 Viburnum (비버넘)
│
├─ 난대 상록 계통
│ │
│ ├─ 향기가막살나무
│ │ Viburnum odoratissimum
│ │
│ └─ 아왜나무
│ Viburnum awabuki
│
├─ 온대 낙엽 계통
│ │
│ ├─ 가막살나무
│ │ Viburnum dilatatum
│ │
│ ├─ 덜꿩나무
│ │ Viburnum erosum
│ │
│ └─ 산가막살나무
│ Viburnum wrightii
│
└─ 한랭·북방 계통
│
└─ 백당나무
Viburnum opulus var. sargent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