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없다(1) 나무와 이웃이 될 순 없을까
미국 작가 셸 실버스타인(1933~1999)이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
소년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너무 행복해하며 속삭였다. "소년아, 여기 와서 놀렴." 소년이 말했다. "나는 이제 어른이라 노는 게 재미없어. 나는 배를 만들어서 멀리 떠나고 싶어. 나에게 배를 줄 수 있어?" 그녀가 말했다. "내 몸통을 잘라 배를 만들어 그리고 멀리까지 항해하렴. 그럼 나는 행복할 거야." 그러자 소년은 그녀의 몸통을 잘라 배를 만들었고, 그녀는 행복했다.
유명한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에 나오는 이 장면은 “감동”으로 읽히기 쉽지만, 젠더의 렌즈를 씌우는 순간 구조가 선명해진다. 이 이야기에서 나무는 ‘그녀(she)’이고, 소년은 성장하는 주체다. 관계는 대칭적 교환이 아니라 요구–헌납의 연쇄로 굴러간다. 소년의 말은 거의 늘 “원한다”에 가깝고, 나무의 대답은 늘 “그럼 나는 행복할 거야”로 귀결된다. 나무의 행복은 스스로의 삶을 확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축소—열매, 가지, 몸통, 끝내는 그루터기—로 표현된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예술·아동문학 비평에서는 이 작품을 “무조건적 사랑”의 찬가가 아니라, 착취적 관계를 미화하는 서사로 읽어야 한다는 강한 문제제기가 반복되어 왔다.
이 구조는 젠더 코드와 맞물릴 때 더 날카로워진다. ‘그녀’로 호명되는 나무는 전형적인 모성적 여성성(양육·보호·헌신)을 구현하고, 소년은 그 헌신을 성장의 자원으로 전유한다. 일부 페미니즘 연구는 이 서사가 “사랑”의 이름으로 여성에게 요구되어 온 자기희생의 규범—경계(boundary) 없는 돌봄, 소진을 미덕으로 바꾸는 윤리—을 아동 독자에게 ‘아름다운 관계’로 제시할 위험을 지적한다. 나무의 침묵과 ‘행복’은 강함이 아니라 규범화된 복종의 표정일 수 있다.
동시에 이 텍스트는 생태의 관점에서 더 불편해진다. 소년은 나무를 “함께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존재”로 대한다. 먹고(열매), 놀고(그늘), 돈을 벌고(사과를 팔고), 집을 짓고(가지), 떠나고(몸통으로 배), 마침내 돌아와 기대는(그루터기) 순서. 이것은 자연을 상호의존적 생명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전환되는 자원으로 보는 세계관—‘자연은 여기 있고, 인간은 가져간다’—의 축약판이다. 한 환경저널리즘 글은 이 동화가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강화할 수 있고, 이런 분리된 자연관이 오늘의 기후위기적 현실과 이어진다고 비판적으로 짚는다.
여기서 젠더와 생태는 따로가 아니라 겹쳐진다. 에코페미니즘이 오래 강조해 온 것처럼, 자연과 여성은 종종 같은 문법으로 대상화된다—돌보고, 내어주고, 침묵하고, 소진되는 존재로. 그래서 이 동화의 문제는 “나무가 너무 착하다”는 감상적 차원이 아니라, “착함”이라는 이름으로 착취의 질서를 자연화한다는 데 있다. 나무는 ‘죽임을 당해도 행복해하는’ 존재로 설정되고, 독자는 그 질서를 슬픔과 감동의 미학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나무와 숲을 대하는 태도의 저변에는 이런 신화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나무는 주어야 하고, 인간은 성장해야 한다.”
“소진은 사랑의 증거다.”
“비워질수록 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의 도시 가로수와 숲에서 벌어지는 일—과도한 가지치기, “위험목”과 “수종갱신”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제거—는 바로 이 오래된 서사가 행정 언어로 번역된 결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문장은, 자꾸만 우리의 폭력을 선의의 표정으로 바꿔 준다. 그래서 이 동화는 질문을 바꿔 읽어야 한다. 나무는 정말 행복했을까? 아니면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해버린 것일까.
숲을 ‘목재 수확의 공간’으로만 보는 시각의 가장 큰 문제는, 숲을 나무(목재)라는 한 가지 산출물로 환원해 버린다는 데 있다. 숲은 원래 목재 생산만을 위해 존재하는 시설이 아니라, 수원함양(水源涵養)·재해방지(災害防止)·탄소 저장(炭素貯藏)·생물다양성(生物多樣性)·휴양(休養) 같은 기능이 동시에 중첩되는 생태계다. 국가 지표 설명에서도 숲가꾸기(어린나무가꾸기·솎아베기 등)가 “목재 생산”을 넘어 “다양한 기능 최적화”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밝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여전히 숲이 ‘수확의 논리’로만 조직되기 쉽다. 특히 ‘미래목’이라는 말이 자주 놓치는 것은, 숲의 미래가 큰 나무 몇 그루의 직경 성장으로만 측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숲에는 떨기나무·덩굴·초본층, 고사목(枯死木)과 낙엽층, 토양 미생물과 균근 네트워크, 그 위에 기대 사는 곤충과 조류, 포유류가 함께 얽혀 있다. 숲을 “큰 나무만 남기는 공간”으로 만들수록, 숲의 구조적 복잡성(層位構造)과 서식지 다양성이 줄어들고, 그 결과로 생물다양성과 생태계 기능이 흔들린다는 점은 산림생태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더 중요한 건 탄소(炭素)다. 숲을 솎아베기 하면 탄소 저장량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여러 연구를 종합해 보면 솎아베기 이후 숲의 탄소 저장량은 줄어든다. 남은 나무들이 더 빨리 자라면서 시간이 지나 일부 회복될 수 있다는 연구도 있지만, 그 회복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완전히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문제는 여기서 숲을 탄소 하나의 기준으로만 판단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숲은 탄소 저장만 하는 곳이 아니다. 토양을 지키고, 물을 머금고, 수많은 생물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한 기능을 높이려고 하면 다른 기능이 약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무를 베어 성장 속도를 높이면 탄소 저장은 줄어들 수 있고, 숲의 구조가 단순해지면서 생물다양성도 함께 줄어들 수 있다.
그래서 숲의 관리는 한 가지 기준으로 “최적의 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탄소, 물, 토양, 생물다양성 같은 여러 기능 사이에서 무엇을 우선할지 살피고, 그 숲의 위치와 조건에 맞게 균형을 찾는 일에 가깝다.
또 하나의 함정은 ‘면적’이다. 국내의 숲가꾸기 면적은 매년 크게 잡히지만, 지표 설명 자체가 “연면적” 개념(조림 이후 반복적으로 여러 차례 사업이 들어가는 면적의 합)이라고 밝힌다. 즉, ‘해마다 수십만 ha’라는 숫자만으로 숲 전체가 동일한 강도로 관리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고, 반대로 정책은 숫자 달성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숲을 목재 생산의 공정처럼 보면, 숲은 곧 “관리 대상의 면적”으로 환원되고, 생태계가 가진 장소성(場所性)과 미세서식지의 복잡성은 뒤로 밀린다.
마지막으로 ‘수확 이후’가 남는다. 숲을 베어내는 일은 흔히 “목재 생산”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나무는 자원이고 그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그 목재가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를 따라가 보면 이 설명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최근 10여 년 사이 한국에서 빠르게 커진 분야가 바이오매스, 다시 말해 땔감 산업이다. 대부분의 수확된 목재가 우드펠릿(wood pellet)이나 우드칩(wood chip) 형태로 가공되어 발전소에서 태워 전기를 생산하는 데 쓰인다는 뜻이다. 과거 우리 숲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던 땔감 이용은 에너지 효율과 탄소 배출 문제 등으로 한동안 사라졌던 방식이다. 그런데 최근 다시 급증한 데에는 정부 정책의 영향이 크다. 발전소가 이를 재생에너지로 분류해 왔고, 그에 따른 정책 지원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목재가 건축 자재나 가구 같은 장수명(長壽命) 제품으로 남기보다 연료로 빠르게 소모되는 구조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국제 환경단체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우드펠릿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해 왔고, 그 공급망이 동남아와 북미 지역의 산림 훼손과 연결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나무를 베어 펠릿으로 압축한 뒤 수천 킬로미터를 운송해 발전소에서 태우는 방식이 과연 기후와 숲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이어진다. ‘미이용 산림바이오매스’라는 이름으로 벌채 부산물이나 숲의 목재를 에너지로 활용하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관련 시장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 제도가 지역 숲에서 추가적인 벌채 압력을 만들 수 있고, 숲의 장기적인 지속가능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이러한 정책은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실제 신재생에너지의 기술 개발과 재정 투입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된다.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숲을 베어야 한다는 명분은 대개 “목재를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말로 설명된다. 그러나 그 목재가 오래 쓰이는 자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태워져 사라지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기술의 발전까지 지연시킨다면 그 수확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원을 활용한다는 설명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일부 이해집단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대로 두었을 때 더 오래 남을 숲마저 더 빠르게 소모하도록 만드는 구조에 가깝다.
결국 “숲=목재 수확 공간”이라는 시각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하다. 숲을 한 가지 산출물로 좁히는 순간 우리는 숲을 생명의 집이 아니라 원료 창고로 다루게 된다. 그때부터 ‘미래목’은 미래를 여는 말이 아니라 숲의 현재를 지우는 말이 될 수 있다. 숲은 큰 나무만의 세계가 아니다. 숲은 크지 않은 것들, 초본과 덩굴, 곤충과 균근, 낙엽과 토양까지 포함한 전체로서만 숲이며, 그 전체가 무너질 때 목재 생산조차 지속될 수 없다.
1913년 발표된 Joyce Kilmer의 시 「Trees」는 종종 순진한 자연 찬가로만 읽힌다.
“I think that I shall never see
A poem lovely as a tree.”
“나는 나무만큼 사랑스러운 시를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첫 행은 단순한 겸손의 수사가 아니다.
킬머는 시를 쓰는 인간의 언어를 스스로 한계 안에 가둔다. 나무는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존재다.
시의 중반부는 더 아름답다.
“A tree whose hungry mouth is prest
Against the earth’s sweet flowing breast.”
“땅의 달콤히 흐르는 젖가슴에 굶주린 입을 대고 있는 나무.”
여기서 나무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굶주린 입(hungry mouth)’을 가진 능동적 생명체다. 뿌리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흙과 맞닿아 양분을 탐색하는 기관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식물생태학 연구는 이 이미지를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뒷받침한다. 균근 네트워크(mycorrhizal networks)를 통해 나무들은 탄소와 질소를 교환하고, 화학 신호를 통해 병해충 위협을 경고하며, 그늘진 개체에 자원을 보내는 상호작용을 한다는 연구들이 축적됐다. 이른바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다. 이는 나무를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망 속 존재로 재해석하게 만들었다.
킬머의 시는 이 과학을 예견했다기보다,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나무는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땅과 맺는 관계 속에서 생존한다는 감각.
시의 마지막은 더 결정적이다.
“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
But only God can make a tree.”
“시는 나 같은 바보가 만들지만, 오직 신만이 나무를 만든다.”
이 문장은 흔히 신앙 고백으로 해석되지만, 문학 연구에서는 이를 인간 창작물의 한계를 인정하는 선언으로 읽는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 수 있지만, 생명 그 자체를 만들 수는 없다. 나무는 인간의 기술이나 서사보다 앞선다. 인간은 묘사할 수 있을 뿐, 창조할 수는 없다.
이 지점은 오늘날 환경철학과도 이어진다. 20세기 후반 이후 ‘비인간 중심주의’(post-anthropocentrism)는 인간을 생태계의 중심에서 내려놓으려는 사유를 전개해 왔다. 나무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독립적 주체성(agency)을 가진 존재로 논의된다. 일부 연구는 식물의 반응성과 신호 전달 체계를 근거로 “식물적 행위성”이라는 개념까지 제시한다.
킬머의 시는 바로 이 전환의 문턱에 서 있다.
그는 나무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객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언어를 낮추고, 나무를 높인다.
그런데 우리가 반복해 온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신화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무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소모될수록 아름답다고 말한다. 킬머가 언어를 낮추며 나무를 신의 영역에 올려놓았던 자리에서, 우리는 나무를 ‘자원’의 목록으로 끌어내린다.
이 대비는 우연이 아니다.
근대 이후 산업 사회는 나무를 목재, 연료, 펄프, 바이오매스라는 이름으로 재분류해 왔다. 언어는 분류의 도구가 되었고, 분류는 소유의 전제가 되었다. 생명은 점차 ‘단위’와 ‘톤’과 ‘입목축적’이라는 수치로 환산되었다.
킬머의 「Trees」는 그래서 단순한 감상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생명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다.
나무는 시보다 먼저 존재한다.
나무는 인간의 설명보다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무는 더 이상 ‘아낌없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감히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나무와 숲이 ‘생명(生命)’이라는 리얼리티(實在)를 뿌옇게 만드는 것은, 때로는 신화이고 때로는 언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숲을 숲 그 자체로 보기보다, 숲에 덧씌워진 표상(表象)—말과 이미지, 숫자와 제도—을 통해 먼저 본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숲은 종종 리얼리티가 아니라 시뮬레이션(模擬)에 가깝다.
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매개된 자연(mediated nature)’을 말해 왔다. 텔레비전·다큐멘터리·관광지의 연출·도시의 조경처럼, 우리는 자연을 직접 겪기보다 재현된 자연과 시뮬레이션된 자연을 소비하며 그 경험이 다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규정한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자연은 더 쉽게 “좋은 화면”과 “관리 가능한 풍경”으로 변한다. 숲이 생태계가 아니라 콘텐츠가 되는 순간, 나무는 생명체가 아니라 장면의 소품이 된다.
분업화된 세계에서 인간은 식생(植生)과 떨어져 사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이 말은 감상이 아니라 조건이다. 숲과 멀어질수록 우리는 직접 경험 대신 언어에 의존한다. ‘숲가꾸기’, ‘미래목’, ‘위험목’, ‘수종갱신’ 같은 말들이 숲을 이해하는 렌즈가 된다. 그런데 렌즈는 늘 어떤 것을 선명하게 하면서 다른 것을 지운다. 숲을 ‘기능(機能)’으로만 번역하는 언어는 숲을 관계망이 아니라 항목(項目)으로 바꾼다.
이때 함께 작동하는 것이 기준선 이동 증후군(基準線移動症候群, shifting baseline syndrome)이다. 자연과 멀어진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숲을 기억할 기회가 줄어들고, 결국 “지금 보이는 숲”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나무가 적어진 상태가 표준이 되고, 다양성이 줄어든 숲도 익숙해진다. 손실은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더 잘 보이지 않는다. 연구는 이런 기준선의 이동이 생태계 훼손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키우고, “이 정도면 괜찮다”는 감각을 강화한다고 경고한다.
여기에 ‘자연 결핍(nature deficit)’ 논의가 겹친다. 자연 경험이 줄어들수록 감각은 둔해지고, 자연을 알아보는 능력—생태 문해력(生態文解力)—이 약해지며, 결과적으로 자연과의 관계는 더 쉽게 추상화된다고 지적되어 왔다. “자연 결핍 장애”는 의학적 병명은 아니지만, 자연 접촉이 스트레스 회복과 주의 회복 등과 연관된다는 연구들이 축적되면서(특히 공중보건·환경심리 분야에서) ‘직접 접촉의 상실’이 개인과 사회의 인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논의가 확장됐다.
숲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는 숫자다. 탄소(炭素) 저장량, 흡수량, 임분축적, 경제성, 효율, 단가…. 이런 지표는 필요하다. 하지만 지표가 목적이 되면 숲은 생명이 아니라 계량 가능한 서비스로 바뀐다. ‘생태계 서비스(ecosystem services)’라는 개념은 자연의 가치를 보이게 했지만, 동시에 자연을 시장과 교환의 언어로 끌고 들어오며 자연의 상품화(商品化)를 촉진할 수 있다는 비판도 강하게 제기돼 왔다. 자연은 ‘존재’가 아니라 ‘혜택’으로만 읽히기 시작하고, 숲은 집이 아니라 공급원(供給源)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신화와 언어라는 렌즈를 다시 들여다보려고 한다. 이용 대상으로의 나무, 지식을 채우기 위한 식물, 감시받지 않는 권력처럼 작동하는 전문가(자처) 집단의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만들어낸 관리의 상식들. 무엇이 숲을 숲이 아닌 것으로 바꾸었는지 함께 고민해 보려고 한다. 지금,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나무와 숲을—콘텐츠도, 지표도, 사업도 아닌—그 자체로 바라보는 연습을 나누려고 한다. 나무와 이웃이 될 수는 없는지, 그래서 존중하고 배려하고 쉬게 할 수는 없는지 모색해 가려고 한다.
친구 혜자가 키 큰 가죽나무의 쓸모없음을 흉보자 장자(莊子)는 이렇게 말한다.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면서 그늘 아래 유유히 누워 자는 건 어떤가. 그러면 나무는 도끼에 베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아무에게도 해를 입을 염려가 없을 것이네. 쓰일 데가 없으니 또 무슨 괴로움이 있겠는가.”(소요호침와기하 불요근부 물무해자 무소가용 안소곤고재 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 物无害者. 无所可用, 安所困苦哉.)
나는 이 말을 “무용(無用)의 역설”로만 읽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숲을 시뮬레이션에서 꺼내는 방법이다. 쓰임의 눈금으로 보지 말고, 함께 있는 시간으로 보라는 것. 나무를 가치평가의 대상으로 부르지 말고, 그늘 아래 잠시 머무르는 이웃으로 불러 보라는 것. 숲의 리얼리티는 거기에 있다—설명 이전의 생명, 숫자 이전의 관계, 관리 이전의 공존.
#용어 정리
■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착취 구조가 동일한 권력 논리에서 비롯된다는 비판 이론.
자연을 ‘돌보고 소진되는 존재’로 규정하는 문화적 서사를 문제 삼는다.
■ 생태계 서비스(Ecosystem Services)
숲과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혜택(탄소 저장, 수자원 공급, 재해 완화 등)을 경제적·정책적 언어로 번역한 개념.
장점: 자연의 가치를 보이게 함.
비판: 자연을 상품·서비스로 환원할 위험.
■ 균근 네트워크(Mycorrhizal Networks)
나무 뿌리와 균류가 공생하며 형성하는 지하 연결망.
탄소·질소·신호물질 교환이 가능하다는 연구들이 축적됨.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는 표현으로 대중화.
■ 식물의 행위성(Plant Agency)
식물이 단순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환경 자극에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능동적 존재라는 철학·생태학적 논의.
■ 기준선 이동 증후군(Shifting Baseline Syndrome)
세대가 바뀔수록 과거의 생태 상태를 기억하지 못해, 훼손된 환경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
■ 자연 결핍(Nature Deficit)
현대인이 자연 접촉에서 멀어지며 감각·주의력·정서에 영향을 받는다는 논의(의학적 진단명은 아님).
■ 비인간 중심주의(Post-anthropocentrism)
인간을 생태계의 중심에서 내려놓고 비인간 존재의 주체성과 관계성을 재평가하는 철학적 흐름.
■ 무용(無用)의 철학
쓸모없음이 오히려 존재를 보호한다는 사유.
장자 철학의 핵심 개념.
# 작가·작품 정리
■ The Giving Tree
저자: Shel Silverstein
1964년 출간된 그림책
나무(여성 대명사)와 소년의 일방적 헌신 관계
비평에서는 착취 미화·모성 신화 재생산 논쟁 존재
■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가창: 안치환
민주화운동 시기 민중가요
소나무 = 억압의 시간 속에서 버티는 존재
■‘소요유(逍遙遊)’ 편
저자: 장자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사유
“쓰일 데가 없으니 괴로움도 없다”
■ Trees
저자: Joyce Kilmer
1913년 발표
인간 언어의 한계를 고백
나무를 신적 창조물로 위치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