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불러온 소나무

[④소나무를 사랑한다면서] 오래된 이름

by 김트리
image.png 울진 행곡리 처진소나무. 출처 : 국가유산포털




조맹견 작, 세한삼우도, 견본수묵 32.2×53.4cm 대만 고궁박물원소장출처 : 대구신문(https://www.idaegu.co.kr)




[③소나무를 사랑한다면서] 개입의 생태계에서 이어짐


소나무는 오래도록 설명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분석하기보다 불렀다. 송(松)이라 적고, 솔이라 불렀다. 때로는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한 벗으로, 때로는 마쓰카제(松風)의 소리로, 때로는 폭풍 앞에 홀로 선 형상으로.

소나무는 치료되어야 할 병목이 아니었고, 관리 목록의 항목도 아니었다.
그 나무는 늘 거기 있었다.
사람보다 먼저 서 있었고, 사람보다 오래 남아 있었다. 인간은 소나무 앞에서 서두르지 않으려 애썼다. 그 나무를 통해 자신의 조급함을 들여다보았다. 겨울이 지나가도록, 바람이 통과하도록, 시간이 한 바퀴 돌도록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이 오래된 태도는 서로 다른 언어로 남아 있다. 중국의 시 속에서, 일본의 하이쿠 속에서, 서양의 숭고론 속에서, 그리고 한국의 노래와 시 속에서.


겨울나무, 소나무


중국 문학에서 소나무(松)는 가장 자주 겨울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설한(雪寒) 속에 서 있고, 풍설(風雪)을 맞고도 잎을 떨구지 않는다. 이 반복은 ‘혹독함을 이겨내는 의지’의 과시라기보다, 혹독함이 지나간 뒤에 비로소 드러나는 잔존(殘存)—끝내 남아 있는 성질—을 알아보려는 미학적 감각에 가깝다. 실제로 중국 고전시에서 소나무는 강인(剛忍)과 청정(淸淨)의 상징으로 꾸준히 호출되며, 사계(四季) 중에서도 ‘세한(歲寒)’의 장면에서 그 의미가 가장 응축된다고 정리된다.

그 감각을 가장 단단하게 붙잡는 문장이 공자(孔子)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다. 겨울은 결함(缺陷)도 병(病)도 아니다. 겨울은 소나무를 단련(鍛鍊)하지 않는다. 다만 무엇이 끝내 남는지를 노출(露出)시키는 시간이다. 소나무의 푸름은 무엇을 이겨낸 결과가 아니다. 계절이 한 바퀴 돌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 끝까지 시들지 않았다는 그 마지막 푸름으로 확인된다.

송대(宋代) 문인 소식(蘇軾)이 남긴 유명한 구절도 이 지점을 생활의 언어로 끌어온다. 흔히 “영가식무육 불가거무송(寧可食無肉 不可居無松)”으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원전으로 널리 확인되는 형태는 “영가식무육 불가거무죽(寧可食無肉 不可居無竹)”이며 뒤에 “무죽령인속(無竹令人俗)” 같은 문장이 이어진다. 다만 여기서 핵심은 ‘송(松)이냐 죽(竹)이냐’의 판별을 넘어서, 송대 문인들이 상록(常綠)의 존재를 풍요(豊饒)의 장식이 아니라 거처(居處)의 조건으로 놓았다는 점이다. 먹을 것이 줄어드는 가난(貧)은 견딜 수 있어도, 푸름이 사라진 공간은 견디기 어렵다. 소식에게 그 푸른 존재는 보호(保護)하거나 관리(管理)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음’만으로 삶을 성립시키는 동반자(同伴者)다.

같은 전통에서 반복되는 세한삼우(歲寒三友)—송(松)·죽(竹)·매(梅)—는 이 ‘남음’의 감각을 하나의 상징 체계로 굳힌 말이다. 연구는 세한삼우가 송대에 장식(裝飾)과 회화(繪畫)의 화목(畫目)으로 정착한 뒤, 남송(南宋) 문인들이 시문(詩文)으로 되받아 쓰며 의미를 두껍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어 원대(元代)에 정치적(政治的)·도덕적(道德的)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충절(忠節)과 절의(節義)의 도상(圖像)으로 강화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니 여기서 겨울은 제거(除去)해야 할 장애가 아니다. 혹독함은 소나무가 ‘살아남아야 할 조건’이 아니라, 소나무가 남아 있음을 설명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중국 문학의 소나무는 치료(治療)되지 않는다. 고쳐지지도, 바뀌지도 않는다. 겨울을 밀어내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계절이 스스로 지나가도록, 제 푸름을 놓지 않은 채 서 있다. 그 “남음(殘)”이란, 무언가를 극복(克服)한 영웅담이 아니라—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 존재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서 본 사람에게, 그 남음이 곧 위로(慰勞)가 된다.


계절의 속도만 남았다


일본으로 건너가면 소나무는 경계에 선다. 바닷가와 마을 사이, 신사와 인간의 세계 사이, 길과 정원의 가장자리. 일본의 소나무는 완성된 풍경이 아니라, 미완의 시간으로 남는다. 에도 시대의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는 이렇게 적었다.

“松風や 軒をめぐりて 秋暮れぬ.”

소나무 바람이 처마를 돌아, 가을이 저문다는 뜻이다. 이 시에서 소나무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대신 소나무를 스쳐 가는 바람의 회전과, 그 회전이 데려오는 계절의 속도만이 남는다. 처마는 인간의 거처이고, 소나무는 그 바깥의 숲이다. 바람은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집”과 “자연”을 한 호흡으로 묶는다. 그래서 이 한 줄은 풍경 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에 닿는 방식이다.

일본 문학에서 ‘松風(마쓰카제)’는 단순히 “바람 소리”가 아니라, 고요·쓸쓸함·그리움이 배어나는 청각적 정서에 가깝다. 노(能) 극 마쓰카제(松風)만 봐도 ‘솔바람’은 사건을 밀어붙이는 힘이 아니라, 오래 남아 있는 마음을 흔드는 배경음으로 작동한다.

이때 중요한 건 “바람”이 아니라 “소리”다. 과학적으로도 바람은 그 자체로 들리기보다, 잎·가지·바늘잎과 부딪히며 난류를 만들 때 소리가 된다. 즉 우리가 듣는 것은 ‘공기’가 아니라 나무가 바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바늘잎을 가진 소나무류가 상대적으로 높은 음색(가늘고 빠른 떨림)을 내기 쉽다는 설명도 여기서 나온다.

그리고 숲 전체의 ‘소리 풍경(soundscape)’에서 바람은 늘 생명의 소리와 함께 기록된다. 비·바람 같은 기상 요인은 어떤 계절에는 소리 풍경을 지배해 새소리 같은 생물음(biophony)을 가리기도 하고, 반대로 그 “가림” 자체가 계절의 국면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바쇼의 시가 소나무를 말하지 않고도 소나무를 남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소나무는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바람이 통과하며, 인간의 시간만이 저물어 간다.

그래서 일본 문학에서 소나무는 성과를 요구받지 않는다. 가지가 비틀려도 흉이 아니고, 비대칭은 교정의 대상이 아니다. 소나무는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통과시키는 것이고, 그 통과가 곧 오래 함께 사는 기술이 된다.

더 나아가, 이런 ‘솔바람’의 청각적 경험이 위로로 작동한다는 연구들도 있다. 자연음(물소리, 새소리, 잎사귀 흔들림 등)은 스트레스 이후 회복 과정에서 생리적 지표(피부전도, 심박변이도 등)의 회복을 돕는 것으로 보고되어 왔다.

즉 “소나무 바람”은 문학적으로는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고, 생태적으로는 숲의 리듬이며, 심리생리학적으로는 회복을 돕는 배경음이 될 수 있다.

결국 이 시에서 소나무는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림”이 아니라, 계절이 지나가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인간은 그 앞에서 뭔가를 하려 들지 않는다. 관리하지 않고, 고치지 않으며, 다만 바람이 한 바퀴 도는 동안 함께 저문다.

서양의 문학과 회화에서 소나무는 종종 홀로 서 있다. 고지대와 절벽 위, 폭풍이 가장 먼저 닿는 자리. 그 나무는 공동체의 보호 속에 있지 않다. 대신 인간의 설명 바깥에 놓여 있다. 낭만주의 시인 William Wordsworth는 자연을 이렇게 불렀다.

“The anchor of my purest thoughts, the nurse, the guide, the guardian of my heart.”

자연은 닻이고, 양육자이며, 인도자다. 그러나 그는 자연을 “해석된 대상”으로 부르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사고를 붙잡는 닻이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의 내면을 떠받친다.

이 지점은 18세기 미학에서 정교하게 다뤄진다.1757년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에서 숭고(sublime)를 “이해를 압도하는 크기와 힘에서 오는 감정”으로 설명했다. 인간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때, 두려움과 경외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후 1790년 임마누엘 칸드( Immanuel Kant)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를 더 급진적으로 해석한다. 자연은 개념으로 포섭되지 않으며, 상상력은 한계를 느낀다. 바로 그 한계의 경험이 숭고다. 설명할 수 없음은 결핍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경계를 자각하게 하는 순간이다.

낭만주의 연구자들은 이 전통을 ‘자연의 타자성(otherness)’로 설명한다. 자연은 인간의 상징 체계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다. 의미를 부여받기 이전에, 먼저 거기 있다. 특히 절벽 위 홀로 선 소나무 같은 이미지는 인간적 척도에서 벗어난 존재를 드러내는 장치로 반복된다. 폭풍에 휘어지고 비대칭으로 자라지만, 그것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규격 바깥에 있는 형상이다.

현대 환경철학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이어진다.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연구들은 자연을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응답을 요구하는 타자”로 본다. 설명이 닿지 않는 자리, 통제되지 않는 상태는 제거해야 할 무질서가 아니라 존중해야 할 독립성이다. 서양의 소나무는 그래서 보호되기보다 통제되지 않는 상태로 존중된다.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 그 설명 불가능성이야말로 숭고의 근거가 된다. 인간의 언어로 다 말할 수 없기에, 그 나무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


한국 문학에서 소나무(松)는 자연의 배경인 동시에 역사(歷史)의 증인(證人)이고, 인간의 고통(苦痛)과 나란히 서서 시간을 견디는 존재다. 이 ‘견딤’은 단순히 강함(强)이나 의지(意志)의 미화가 아니다. 전통 시가와 회화 연구에서 소나무는 절개(節槪)·지조(志操) 같은 도덕적 상징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장생(長生)·탈속(脫俗)·청신성(淸新性)·순일성(純一性) 같은 감각과 태도를 함께 환기하는 표상으로 작동해 왔다고 정리된다. 다시 말해 소나무는 ‘번성(繁盛)’의 상징이라기보다, 흔들리되 사라지지 않는 상태—버팀의 미학—을 오래 축적해온 이미지다.

민중가요로 널리 불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그 전통을 현대사의 감옥(監獄)과 접속시킨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 샛바람에 떨지 마라 /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 살아서 만나리라.” 여기서 소나무는 자연물이 아니라, 억압(抑壓)의 시간을 바깥에서 함께 버티는 동반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노래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투옥된 이들과 가족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며, 절정부의 반복 구절이 ‘양심수(良心囚)의 고결함’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선명하게 형상화한다고 풀이한다. (또 음악적으로는 비극적 정조 속에서 장조(長調) 화성으로 전환되는 대목이 ‘희망과 의지’를 만들며, 바로 그 전환이 “기다림”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돌아옴을 믿는 지속”으로 바꾼다. )

이 지점에서 “소나무는 치료(治療)되지 않는다”는 문장은, 자연보호의 무관심이 아니라 문학적 윤리(倫理)의 선언이 된다. 소나무는 관리(管理)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인간의 시간을 성립시키는 배경이다. 고전에서도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바람·비·눈·서리 속에 “홀로 푸르다”는 물음이 반복되는데, 그것은 소나무를 영웅으로 칭송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쉽게 무너지는 자리에서 끝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비추어보려는 방식이다.

그래서 한국 현대시에서 소나무는 위로(慰勞)이면서 동시에 부끄러움의 환기다. 위로란 “괜찮다”고 말해주는 친절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은 존재가 곁에 있음으로써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을 다시 붙잡게 하는 힘이다. 소나무가 버티는 동안, 인간은 묻게 된다. 나는 얼마나 쉽게 돌아섰는가. 나는 무엇을 견디지 못했는가. 소나무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오래 서 있다. 그리고 그 ‘오래’가—한국 문학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어 온 방식으로—사람을 다시 사람 쪽으로 데려온다.


기다림은 낭비일까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의 문학은 한 가지 태도를 공유한다. 소나무는 급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 나무는 언제나 인간의 바깥에 있었고, 그래서 인간은 그 앞에서 자신의 유한함을 배웠다.

겨울은 제거해야 할 장애가 아니었고, 폭풍은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었다. 소나무는 흔들리고 휘어지면서도 시간을 통과했다. 그 통과가 곧 존재의 방식이었다. 문학이 소나무에게 허락한 것은 단 하나였다. 시간을 빼앗지 않을 자유.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 그 자유를 조정하려 들었을까.
언제부터 소나무의 시간을 우리의 일정과 예산, 계획과 평가의 언어로 환산하기 시작했을까. 기다림을 낭비로, 잔존을 비효율로 읽기 시작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 인용 작가
소식(蘇軾, 1037–1101)
중국 송나라의 문인·시인·관료. ‘소동파’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시·산문·서화에 모두 뛰어난 전형적인 문인으로, 자연을 통제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조건으로 바라봤다. 소나무는 그의 글에서 삶의 배경이자 정신적 지주로 등장한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
에도 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 짧은 시 속에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감각을 겹쳐 놓는 방식으로, 자연을 설명하지 않고 흐르게 두는 미학을 확립했다. 그의 시에서 소나무는 계절과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에 묵묵히 남아 있는 존재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자연을 인간의 도덕과 감각을 형성하는 존재로 보았으며, 자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와 무력함을 중시했다. 그의 시에서 자연(소나무를 포함한 숲과 나무)은 통제 불가능한 숭고의 원천이다.

안치환(1964– )
한국의 민중가요 가수이자 작곡가. 1980~9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서와 결합한 노래들을 통해 자연 이미지를 인간의 역사·고통과 연결해 왔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에서 소나무는 억압의 시대를 말없이 견디며 기다리는 존재로 등장한다.


[⑤소나무를 사랑한다면서]소나무는 숲을 독점하지 않았다로 이어짐


<소나무를 사랑한다면서>

제1부 소나무재선충병 방제라고요?

제2부 미안하다, 소나무야, 하늘소야

제3부 개입의 생태계

제4부 소나무는 설명되기보다 불려왔다

제5부 소나무는 숲을 독점하지 않았다

제6부 손을 떼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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