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풍나무(2)물이 들고 나는 숲에서 온 나무
건조한 도시의 보도블록을 떠나 이 나무의 고향으로 가보면, 풍경은 전혀 다르다.
미국풍나무(Liquidambar styraciflua)는 언덕의 건조한 숲이 아니라, 물이 주기적으로 드나드는 저지대의 숲, 이른바 범람원(bottomland hardwood forest)의 나무다. 강이 넘치고, 물이 빠지고, 다시 흙이 쌓이는 곳. 토양은 깊지만 늘 안정적이지 않고, 뿌리는 단단한 암반 대신 느슨한 퇴적층을 붙잡는다.
이 나무는 물의 변덕을 견디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일시적 침수에도 비교적 잘 버티고, 산소가 부족해진 토양에서도 생장을 이어간다. 범람은 숲에 상처를 남긴다. 줄기는 떠밀린 잔해에 긁히고, 뿌리는 퇴적과 침식 사이를 오간다. 그럼에도 범람원이 다시 숨을 고르면, 미국풍나무는 그 자리에 서 있다. 교란 뒤에 서는 나무. 완전한 선구종도, 완전한 극상종도 아닌, 사이의 전략을 택한 종이다.
이 점에서 코르크 능선과 수지의 의미가 다시 읽힌다. 거칠게 두꺼워진 가지 표면은 장식이 아니라, 반복되는 마찰과 충격을 흡수하는 구조다.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점성의 수지는 향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균과 곤충의 침입을 늦추기 위해 존재한다. 범람원의 숲은 겉보기에는 고요하지만, 실제로는 늘 작은 충돌과 감염의 가능성이 스며 있는 공간이다. 미국풍나무의 몸은 그 환경에 맞춰 설계되었다.
풍나무속(Liquidambar)의 분포를 더 넓게 보면, 이 나무는 또 다른 시간을 품고 있다. 오늘날 이 속의 종들은 북미, 중국·대만, 그리고 터키·지중해 일부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화석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 이 속은 북반구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기후가 따뜻했던 신생대 제3기(약 6600만~260만 년 전), 북미와 유라시아의 고위도 지역까지 활엽수림이 이어졌고, 풍나무속 역시 그 숲의 일부였다. 잎과 열매의 화석은 유럽과 동아시아, 북미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제4기 빙하기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기후가 냉각되고 빙상이 확장되자, 온난한 기후에 적응한 숲은 남쪽으로 밀려 내려왔다. 일부 지역에서는 완전히 사라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산맥이나 해안, 비교적 온화한 피난처(refugia)에 남았다. 오늘날 풍나무속의 분포가 북미 동부, 중국·대만, 터키·지중해 일부에 단절(disjunct distribution)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때 이어져 있던 숲이 기후 변화에 의해 잘려 나가고, 서로 떨어진 채 생존한 결과다.
미국풍나무(Liquidambar styraciflua)는 그중 북미 동부에 남은 계통이다. 이 나무는 도시의 조경수로 도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기후 변동을 통과해 살아남아 온 종이다. 그래서 이 나무를 단순히 ‘외래수종’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동시에 사라진 온난 기후의 잔존자(relict)이며, 과거 북반구 숲의 기억을 몸에 간직한 나무다.
범람원 숲에서 이 나무는 오크(참나무류), 물푸레나무 등과 어울린다. 빛을 완전히 독점하지도, 완전히 그늘에 밀려나지도 않는다. 홍수나 벌채처럼 큰 교란이 일어난 뒤에는 빠르게 자라 자리를 확보하지만, 숲이 안정되면 다른 수종들과 균형을 이룬다. 앞서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는 위치. 극단 대신 지속을 택한 전략이다.
도시에서 우리가 보는 미국풍나무는 고요한 가로수처럼 서 있지만, 그 몸에는 물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떨어지는 열매의 크기와 구조, 코르크의 거칠음, 수지의 점성은 모두 그 기억의 연장선이다. 특히 독특한 열매는 범람원 환경에서 유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범람원에서는 멀리 가는 것보다 남는 것이 중요하다. 홍수는 씨앗을 데려가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미국풍나무의 집합과는 충분한 크기와 비교적 높은 밀도, 그리고 거친 가시 표면이 결합된 구조를 지닌다. 젖으면 밀도가 더 높아지고, 바닥에 닿으면 가시가 퇴적물과 잔해에 걸린다. 쉽게 뜨지 않고, 오래 떠 있지도 않는다. 가라앉고, 걸리고, 남는다. 물이 빠진 뒤에도 그 자리에 머물 확률이 커진다.
이 나무는 바람을 타고 멀리 이동하는 종이 아니라, 물이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자라는 종이었다.
그래서 도시의 단지 한가운데 서 있는 미국풍나무를 바라보면,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든다. 아스팔트와 배수관으로 통제된 공간은 범람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이 넘치지 않는 도시에서, 범람원의 전략은 잠시 유보된다. 그럼에도 나무는 자신의 설계를 바꾸지 않는다. 견디도록 만들어진 몸, 반복을 전제로 한 생장, 상처를 관리하는 체계. 그것은 물이 들고 나던 숲에서 길러진 방식이다.
도시에서 이 나무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조경의 선택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넓게 이어져 있던 숲의 기억이 어떻게 잘려 나가고, 옮겨 심겨, 다른 기후와 다른 시간 속에서 다시 서 있는지를 읽는 일이다. 미국풍나무는 새로운 도시의 장식이 아니라, 오래된 물의 시간을 품은 나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다.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요조
닿지 않는 천장에 손을 뻗어보았지
별을, 진짜 별을 손으로 딸 수 있으면 좋을텐데
#용어설명
범람원 (Bottomland hardwood forest) : 강이 넘치고 물이 빠지며 퇴적과 침식이 반복되는 저지대 숲. 미국풍나무의 원래 서식지.
퇴적층 (Alluvial deposits) : 강물이 흙과 모래를 쌓아 만든 느슨한 토양층. 뿌리가 단단한 암반 대신 이 층을 붙잡음.
교란 (Disturbance) : 홍수, 벌채 등 숲의 안정성을 깨뜨리는 사건. 미국풍나무는 교란 뒤 빠르게 자라 자리를 확보.
풍나무속 (Liquidambar genus) : 미국풍나무가 속한 식물 분류군. 북미, 중국·대만, 터키·지중해 일부에 분포.
신생대 제3기 (Paleogene–Neogene, 약 6600만~260만 년 전) : 기후가 따뜻해 활엽수림이 북반구 전역에 퍼졌던 시기. 풍나무속 화석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됨.
제4기 빙하기 (Quaternary glaciation) : 기후 냉각과 빙상 확장으로 숲이 남쪽으로 밀려난 시기. 풍나무속 분포가 단절됨. 제4기 빙하기는 흔히 플라이스토세 빙하기라고도 불리며, 약 258만 년 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질학적으로는 여전히 ‘빙하기’ 상태에 있으며, 지금은 빙기와 빙기 사이의 간빙기(interglacial period)에 해당합니다. 즉, 지구는 여전히 제4기 빙하기 속에 있고, 북극과 남극의 빙상이 존재하는 한 이 빙하기는 끝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단절 분포 (Disjunct distribution) : 한때 이어져 있던 종의 분포가 기후 변화로 잘려 나가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현상.
피난처 (Refugia) : 빙하기에도 비교적 온화해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지역.
잔존자 (Relict species) : 과거 넓게 퍼져 있던 숲의 일부가 사라지고 남은 종. 미국풍나무는 온난 기후의 잔존자.
집합과 (Multiple capsule fruit) : 미국풍나무의 둥근 가시 공 열매. 여러 소과가 모여 형성된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