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모양 잎과 가시 공 아래서

미국풍나무(1) 도시에서 미국풍나무를 만난다는 것

by 김트리
https://dengarden.com/gardening/sweet-gum-or-liquidambar-styraciflua-an-ornamental-tree-in-bc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잎은 별처럼 보인다. 다섯 갈래로 또렷이 갈라진 잎은 멀리서 보면 단풍과 닮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전혀 다른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풍나무가 동아시아에 와서 ‘풍(楓)’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이유는 단순하다. 잎이 단풍나무를 닮았기 때문이다. 가을빛이 분명하고, 잎의 갈래도 익숙하다. 오래전부터 ‘풍(楓)’이라는 한자에 저장돼 있던 이미지와 정확히 겹친다.


잎만 보고 붙은 이름, '바람'


미국풍나무의 학명은 리퀴담바르 스티라시플루아(Liquidambar styraciflua)이다. 속명 Liquidambar는 라틴어 liquidus(액체)와 아랍어 anbar(호박, 수지)에서 유래했다. ‘흐르는 나무 기름’이라는 뜻이다. 종소명 styraciflua 역시 ‘스타이락스(styrax)처럼 흐른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학명이 가리키는 중심에는 잎이 아니라 수지가 있다.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점성의 물질, 스스로를 봉합하고 지키는 체계가 이 나무의 정체성을 먼저 규정한다.

생존 전략도 단풍나무와는 다르다. 단풍나무가 가벼운 날개 달린 씨앗을 바람에 실어 멀리 보내는 나무라면, 미국풍나무는 떨어뜨리는 나무다. 가시가 돋은 둥근 열매는 공처럼 생겼지만 튀지 않는다. 단단하고 무겁다. 누군가 밟으면 마른 소리를 낸다. 시각보다 촉각과 청각으로 먼저 인식되는 나무. 미국풍나무는 그렇게 도시의 감각을 건드린다.

굳이 ‘열매’라고 한 것은, 이 둥근 공이 씨앗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십 개의 작은 소과가 모여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 열매는 떨어지고, 굴러가다 멈춘다. 바람보다는 중력, 비행보다는 반복에 가까운 방식이다.

서울 서대문구 한 아파트 정원의 미국풍나무 코르크 능선 가지. 김트리

이 개성 넘치는 둥근 열매와 코르크 능선 줄기를 보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잎과는 다른 성질이 드러난다. 어린 가지에는 매끈함 대신 불규칙한 코르크질 능선이 발달한다. 겉보기에는 화살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둘 다 코르크형성층이 만든 주피(periderm, 나무의 줄기나 뿌리가 굵어질 때 기존의 표피를 대신해 나타나는 보호 조직으로 주피를 포함한 형성층 바깥 조직을 모두 통틀어 수피, 즉 나무껍질이라고 함) 조직이 과발달한 경우다. 그러나 화살나무가 코르크를 특정 방향으로 정렬해 ‘날개’처럼 돌출시킨다면, 미국풍나무는 코르크를 표면 전체로 퍼뜨려 거친 능선을 만든다. 장식처럼 돋보이기보다, 완충재처럼 몸을 감싼다.

형성층 바깥에서 만들어지는 이 두꺼운 보호층은 반복되는 기계적 충격과 온도 변화를 흡수한다. 바람에 흔들릴 때 응력을 분산시키고, 미세한 상처가 안쪽 조직으로 깊어지는 것을 막는다. 매끈한 성장을 강조하는 나무가 아니라, 견딤을 설계한 나무다.

줄기에 상처가 나면 점성의 수지가 배어 나온다. 이 수지는 상처 부위를 물리적으로 덮어 수분 손실을 줄이고, 페놀성 화합물과 테르펜류를 통해 곤충과 병원균의 침입을 억제한다. 화려한 가을빛과 달리, 몸의 깊은 곳에서는 조용히 위기를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도시에서 두 겹으로 보인다. 멀리서는 단풍을 닮은 풍경이지만, 가까이 가면 물성이 드러난다. 잎은 얇고 과감히 버려지지만, 가지와 줄기는 두껍고 단단하다. 보여주는 조직과 지키는 조직이 분리돼 있다. 우리는 잎을 보고 나무를 기억하지만, 나무는 상처에 대비해 자신을 설계한다.




가을의 끝에 바닥에 남은 가시 공을 보며


미국풍나무가 한국의 아파트 단지와 정원에 자리 잡은 경로도 이 이중성 속에 있다. 도시 개발이 가속되던 시기, 조경은 취향이기 이전에 공정이었다. 수종은 규격과 단가, 관리 가능성의 언어 속에서 선택되었다. 조달 체계에 편입된 수종 목록과 표준 규격은 시장의 기준이 되었고, 미국풍나무 역시 낙엽교목의 하나로 그 목록 안에 자리 잡았다. 빠른 생장, 비교적 안정된 수형, 그리고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를 분명하게 연출하는 능력. 단지는 가을이 오면 한 번 ‘바뀌어’ 보이기를 원했고, 이 나무는 그 요구에 응답했다. 숲을 심은 것이 아니라, 장면을 설계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이 나무는 완전히 순응적이지 않다. 떨어지는 열매는 계획된 선을 벗어나 굴러가고, 코르크질 가지는 매끈한 이미지에 작은 균열을 남긴다. 학명이 말하듯, 이 나무의 중심에는 잎이 아니라 수지가 있고, 색이 아니라 방어가 있다. 단풍을 닮았지만 단풍이 아니며, ‘풍(楓)’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바람에 기대지 않는다.

가을의 끝, 몇 개의 가시 공이 아직 바닥에 남아 있다. 그 단단한 잔여는 이 나무가 도시에서 남기는 서명 같다. 미국풍나무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닮음으로 읽고 무엇을 전략으로 읽지 못하는지 돌아보는 일이다. 잎은 단풍을 닮았지만, 삶의 방식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가까이 다가갈 때에만 보인다.

https://mainichi.jp/english/articles/20211109/p2a/00m/0na/017000c?utm_source=chatgpt.com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Herbsttag)

Herr: es ist Zeit.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용어설명

수지 (Resin) : 나무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점성 물질. 수분 손실을 막고 곤충·병원균 침입을 억제하는 방어 체계.

소과 (Capsulelet) : 미국풍나무 열매를 이루는 작은 단위. 수십 개가 모여 둥근 가시 공 형태의 집합과실을 형성.

코르크질 능선 (Cork Ridge) : 어린 가지 표면에 발달하는 불규칙한 코르크 조직. 충격·온도 변화 완충 역할.

코르크형성층 (Cork Cambium) : 줄기 바깥쪽에서 코르크 조직을 만드는 형성층. 보호층을 형성해 외부 자극에 대응.

주피 (Periderm) : 코르크형성층이 만든 외부 보호조직. 나무의 껍질 일부로, 상처와 환경 변화에 대한 방어막.

페놀성 화합물 & 테르펜류 : 수지 속에 포함된 화학 성분. 항균·방충 효과를 내어 나무를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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