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2) 개나리에게 배우는 젠더 감수성
식물의 성을 오래 들여다보면, 인간이 너무 빨리 결론을 내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나리의 이형화주성(같은 종류의 꽃에서 암술의 길이가 다른 성질)은 이미 그 단서를 줍니다. 한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있으면서도, 같은 형태끼리는 닫히고 다른 형태에는 열립니다. 성은 정체성이라기보다 관계의 배열에 가깝습니다.
토론토대학교 생태·진화생물학과 명예교수 스펜서 C. H. 바렛(Spencer C. H. Barrett)은 2010년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에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Flowering plants exhibit a remarkable diversity of sexual systems.”
꽃식물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성 체계를 보인다는 뜻입니다. 바렛의 글을 보면, 암수딴그루, 자웅동주, 이형화주성, 자가불화합 등 성 체계의 전이가 반복적으로 진화해 왔음을 설명합니다. 성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번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의 집합입니다.
그러나 바렛은 여기서 멈춥니다. 그는 정치적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의 문장은 과학적 기술에 머뭅니다. 그 다음 질문은 우리가 던져야 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유동적인 성 체계를 자연이 보여주는데, 인간은 왜 성을 둘로 고정해 왔을까요.
스탠퍼드대학교(Stanford University) 생물학자 조앤 러프가든(Joan Roughgarden)은 『에볼루션스 레인보우(Evolution’s Rainbow)』(2004)에서 성과 젠더, 번식과 사회가 “둘”이라는 틀에 갇힐 때 생기는 손실을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러프가든이 책의 말미에서 남긴 문장 하나는 그 문제의식을 응축해 보여줍니다. 러프가든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what won’t work is stuffing our species into two small categories of gender and sexuality.”
해석하면, 인간이라는 종을 성과 섹슈얼리티의 ‘작은 두 칸’에 억지로 밀어 넣는 방식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stuffing”입니다. 그는 분류가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장면을 말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쑤셔 넣는 동작을 떠올리게 합니다. 러프가든은 인간의 다양성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마련한 분류 상자가 너무 작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과학의 논쟁을 윤리의 질문으로 바꿉니다. 인간 사회가 두 칸을 만들고, 그 두 칸에 사람을 배치할 때, 배치되지 않는 몸과 욕망과 관계는 ‘예외’로 밀려납니다. 예외가 많아질수록 분류는 더 강해집니다. 강해진 분류는 더 많은 예외를 만들어냅니다. 러프가든이 지적하는 것은 이 악순환입니다. 사회는 질서를 위해 단순화를 택하지만, 단순화가 커질수록 세계는 더 거칠게 찢어집니다.
그 지점에서 러프가든의 논지는 “진화는 단일한 정상형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생물학적 세계는 협력, 변이, 전략의 다양성을 통해 오래 버팁니다. 반면 인간 사회는 종종 다양성을 관리 비용으로 취급합니다. 비용을 줄이려는 욕망은 규범을 강화하고, 규범은 자연을 ‘둘’로 번역해 버립니다. 러프가든이 말하는 “작동하지 않음”은 단지 설명의 실패가 아닙니다. 살아가는 방식의 실패까지 포함합니다. 두 칸에 맞추려는 압력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통증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러프가든을 여기에서 호출하는 방식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러프가든이 말하는 무지개는 장식이 아닙니다. 그 무지개는 종이 살아남는 방식의 은유입니다. 색이 많다는 사실이 곧 힘이 됩니다. 반대로 색을 줄이려는 사회는, 사회가 만든 두 칸을 지키는 대신 사람을 잃습니다. 러프가든의 문장은 결국 “분류가 세계를 따라오지 못할 때” 벌어지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한 문장으로 보여줍니다.
러프가든의 문장을 읽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사례를 찾기보다 이미 보았던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개나리의 이형화주성, 이팝나무의 수양성주, 은행나무의 암수딴그루, 그리고 버드나무와 키위까지. 자연은 이미 여러 번, 여러 방식으로 말해 왔습니다.
이팝나무는 수꽃만 달린 개체와 양성화 개체가 공존하는 구조를 보입니다. 홍석표 경희대 명예교수가 2016년 학술지 「플로라(Flora)」에 발표한 연구를 보면, 동일 집단 안에서 수꽃 개체와 양성화 개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양상이 확인됩니다. 이는 일시적 이상이 아니라 전략적 공존입니다.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입니다. 한 개체는 평생 암으로, 다른 개체는 평생 수로 존재합니다. 성은 한 몸 안에 공존하지 않습니다. 분리 자체가 전략입니다.
버드나무는 더 복잡합니다. 전통적으로 암수딴그루로 알려졌지만, 일부 종에서는 환경 조건에 따라 성 표현이 유동적으로 나타난다는 보고가 이어집니다. 동일 종 안에서 성적 표현의 가변성이 확인됩니다.
키위 역시 암수딴그루 식물입니다. 다만 상업 재배 과정에서는 수분 효율을 높이기 위해 수그루와 암그루를 인위적으로 배치합니다. 인간은 그 성 분화를 전제로 재배 전략을 세웁니다. 성은 생산 구조 속으로 편입됩니다.
개나리는 또 다른 해법을 택합니다. 한 꽃 안에 암술과 수술이 함께 있지만, 같은 형태끼리는 닫히고 다른 형태에는 열립니다. 타자를 전제로 한 구조입니다.
이 사례들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의 모범 답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러프가든이 말한 “두 개의 작은 범주에 밀어 넣는 방식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 전에 자연 세계에 대한 관찰에 가깝습니다. 식물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닙니다. 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환경에 따라 조정됩니다. 전략은 복수입니다.
우리가 식물에서 이미 보았던 장면을 인간 사회에 겹쳐 읽는 순간, 질문은 달라집니다. 자연이 단순했는가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이를 단순하게만 읽어 왔는가가 문제로 떠오릅니다.
브라운대학교(Brown University) 생물학·젠더학 교수 앤 파우스토-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은 『섹싱 더 바디(Sexing the Body)』(2000)에서 성 이분법이 자연의 명령이 아니라 분류의 관습에 가깝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Labeling someone a man or a woman is a social decision.”
해석하면, 누군가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명명하는 일은 사회적 결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생물학적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염색체, 호르몬, 생식기관, 2차 성징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 다양한 요소들이 언제, 어떤 기준으로, 어떤 경계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지를 묻습니다.
파우스토-스털링은 또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Nature loves variety, yet society hates it.”
자연은 다양성을 사랑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불편해한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그는 의학 자료와 생물학 연구를 근거로, 간성(intersex, 암수 두 가지 형질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일) 사례가 드문 예외가 아니라 일정한 빈도로 반복된다는 점을 제시합니다. 스펙트럼 위에 놓인 몸들을, 사회는 둘 중 하나의 칸으로 밀어 넣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이 문장을 식물의 성 체계와 나란히 놓아 보면 낯설지 않습니다. 개나리의 이형화주성도, 이팝나무의 수양성주(androdioecy, 한 집단(같은 종, 같은 지역의 개체군) 안에 ‘수꽃만 피는 개체(수개체)’와 ‘양성화(암·수가 함께 있는 꽃)를 피우는 개체(양성개체)’가 함께 존재하는 번식 체계)도, 버드나무의 성 표현 가변성도 단일한 박스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성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조합의 결과입니다. 염색체와 호르몬, 기관과 기능이 다양한 배열로 나타나듯, 꽃의 기관도 길이와 위치, 기능의 배열로 조합됩니다.
파우스토-스털링의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연이 둘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곧바로 사회 규범을 설계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법전이 아닙니다. 다만 자연을 근거로 “원래 둘이다”라고 말하는 주장에는 균열을 냅니다. 자연을 단순화한 언어는, 이미 자연을 충분히 읽지 않은 언어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이 지점의 핵심은 선언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자연이 스펙트럼 위에서 작동한다면, 우리가 만든 경계는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강화되었을까요. 식물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해법을 유지해 왔습니다. 인간은 그 해법을 보면서도 분류의 편의를 더 빨리 택해 왔습니다.
진화적 경로를 따라가 보면, 인간이 성을 단순화해 온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설명은 정당화가 아닙니다.
첫째는 양육 비용과 친자 확인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장기간의 양육을 필요로 하는 종입니다. 인류학과 진화생물학 연구를 보면, 인간의 유아는 최소 10년 이상 성인의 돌봄에 의존합니다.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가 1972년 제시한 ‘부모 투자 이론(parental investment theory)’은, 한쪽 성이 양육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할수록 짝 선택과 짝 안정성에 민감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장기적 짝 결합(pair-bonding)이 강조된 배경에는 자원의 안정적 배분과 친자 확인의 필요가 작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진화 환경에서 친자 불확실성은 생존 비용과 직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성 역할과 짝 구조를 안정화하는 규범이 생겨났고, 그 규범은 시간이 지나며 도덕 체계로 굳어졌습니다. 초기의 생존 전략이 윤리적 당위로 전환된 셈입니다. 그러나 전략은 환경에 대한 적응이었을 뿐, 보편적 도덕 원리는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예측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집단은 복잡성을 줄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지과학 연구를 보면, 인간은 범주화(categorization)를 통해 세계를 이해합니다. 범주화는 생존에 유리한 인지 전략이었습니다. 빠르게 구분하고 위험을 식별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종결 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라고 부릅니다. 명확하고 단순한 구분은 불안을 낮춥니다.
성의 다양성은 이 범주화를 어렵게 만듭니다. 둘로 나뉘는 구조는 이해하기 쉽고, 제도화하기 쉽고, 규범화하기 쉽습니다. 반면 스펙트럼은 관리하기 어렵습니다. 다양성은 불확실성을 동반합니다. 불확실성은 집단의 통제 욕구를 자극합니다. 그렇게 단순화는 질서의 언어로 포장됩니다.
셋째는 혐오 반응입니다.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심리학 연구진 데이비드 이노바르(David Inbar)와 폴 블룸(Paul Bloom) 등은 2009년 「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한 논문에서 혐오 민감성과 동성애에 대한 직관적 거부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했습니다. 약 1800명의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서, ‘혐오 민감성 척도(Disgust Sensitivity Scale)’ 점수가 높은 응답자일수록 동성 결혼과 동성애 권리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일 확률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병원체 회피 메커니즘(pathogen-avoidance mechanism)’과 연결 지어 해석합니다. 진화 과정에서 전염 위험을 줄이기 위해 발달한 감정 체계가, 현대 사회에서는 도덕 판단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혐오는 위협에 대한 빠른 신호입니다. 문제는 그 신호가 실제 병원체가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를 향할 때입니다.
이 세 가지 경로는 서로 연결됩니다. 양육 비용은 안정성을 선호하게 만들었고, 안정성은 단순한 범주를 선호하게 만들었으며,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는 감정적 불편을 유발했습니다. 그렇게 생존 전략은 도덕 규범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진화적 기원이 있다는 사실은 그 반응이 윤리적으로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화는 생존을 설명할 뿐, 정의를 설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능 위에 제도를 세운 존재입니다. 제도는 본능을 교정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자연스러움은 자동으로 정당함이 되지 않습니다.
진화적 경로를 설명하는 일은 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왜 편견이 반복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해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입의 출발점입니다.
한국의 반동성애 운동이 반동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그들이 단지 어떤 가치를 보수적으로 고수해서만은 아닙니다. 최근 국내 연구들을 보면, 이 운동은 성소수자를 ‘있는 그대로의 사람’으로 상대하기보다, 시대에 따라 바꿔 끼울 수 있는 위협의 기호로 재구성해 왔습니다. 김보명 연구자(2024)가 한국 보수개신교의 반동성애 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을 보면, 초기의 “죄” 담론은 곧바로 “종북 게이”, “중독”, “나쁜 인권”, “젠더 이데올로기” 같은 세속적 언어로 확장되며 변주됩니다. 동성애는 개인의 삶이나 관계로 서술되기보다, 국가 안보, 청소년 보호, 가족 해체, 사회 혼란을 한데 묶는 ‘종합 위협’으로 조직됩니다. 이때 핵심은 근거의 정확성이 아니라 동원 가능성입니다. 담론은 사실을 설명하기보다 동원을 만들기 위해 설계된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이 운동이 반동적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과학’의 사용 방식에 있습니다. 백조연 연구자(2018)의 분석을 보면, 일부 보수개신교 진영은 성과학이라는 외피를 빌려 동성애를 병리화하고 위생·질병·오염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전략을 구사해 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과학이 신앙을 검증하는 도구로 쓰이기보다, 신앙적 결론을 사회적으로 설득 가능하게 포장하는 도구로 동원된다는 사실입니다. “옳은 과학”과 “그른 과학”을 가르고, 동성애를 ‘치료 가능한 문제’나 ‘위험한 중독’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성소수자를 시민이 아니라 관리·교정의 대상으로 놓습니다. 이런 프레임에서는 차별이 폭력으로 보이지 않고 “예방”이나 “보호”로 보입니다.
또 하나는 ‘인권’의 전유입니다. 김보명(2024)의 글에서 강조되듯, 반동성애 담론은 인권을 반대하는 얼굴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권이라는 말을 끌어와 “나쁜 인권”, “역차별”, “다수의 권리 침해” 같은 구도를 만듭니다. 동성애 반대가 소수자 인권의 거부로 드러나기보다, 다수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는 행동처럼 보이게 됩니다. 여기서 차별은 숨고, 동원은 쉬워집니다.
이런 흐름을 종합하면, 반동성애가 반동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자연 질서”라는 단어의 내용보다 그 단어가 수행하는 기능에 있습니다. 그 말은 자연을 설명하기보다 경계를 긋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경계 바깥의 사람들은 권리의 주체로 들어오기보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표상됩니다. 결국 그 운동이 지키려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아니라, 이미 익숙한 위계와 통제의 질서일 때가 많습니다.
차별금지법 같은 규범은 감정을 바꾸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감정이 권력과 결합해 폭력으로 번역되는 순간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법이 비어 있을 때, 다수의 직관과 동원이 사실상의 규범이 되기 쉽습니다. 그때 편견은 개인의 의견을 넘어 구조가 됩니다. 그리고 구조가 된 편견은 다시 “자연스럽다”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개나리는 타자를 필요로 합니다. 같은 형태끼리는 닫히고, 다른 형태에서만 열립니다. 그 선택은 취향이 아니라 생존의 구조입니다. 관계가 끊기면 씨앗도 멈춥니다.
인간 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타자를 배제하면 질서는 잠시 또렷해 보일 수 있습니다. 경계는 분명해지고, 범주는 단순해집니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다양성을 줄이는 대가 위에 서 있습니다. 다양성이 줄어들면 적응의 가능성도 함께 줄어듭니다.
식물은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몸으로 증명해 왔습니다. 성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번식 전략이며, 전략은 환경과 함께 조정됩니다. 개나리의 이형화주성도, 이팝나무의 수양성주도, 버드나무의 가변성도 하나의 답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해법이 동시에 유지됩니다.
자연을 근거로 다양성을 부정하는 말은, 자연을 끝까지 읽지 않은 말입니다. 자연은 질서를 사랑하지만 그 질서는 복수형입니다. 하나의 규범으로 수렴되지 않습니다.
노랑은 매년 번집니다. 그 번짐이 씨앗의 이동인지, 인간의 손이 만든 반복인지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도시의 경계마다 이어지는 노랑은 자연과 관리가 겹쳐 만든 풍경입니다.
그러나 그 꽃의 구조까지 바뀐 것은 아닙니다. 관계를 필요로 하는 장치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닫힌 조합에서는 열리지 않고, 다른 것과 마주할 때 비로소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우리는 그 구조를 봄의 감정으로만 읽지 않아도 됩니다. 그 안에 담긴 조건과 선택의 논리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다름이 배제의 이유가 아니라 연결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식물은 오래전부터 조용히 반복해 왔습니다.
Barrett, Spencer C. H. (2010). “Understanding plant reproductive diversity.”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 Biological Sciences, 365(1537), 99–109. 토론토대학교 생태·진화생물학과 명예교수.
꽃식물의 다양한 성 체계(암수딴그루, 자웅동주, 이형화주성, 자가불화합 등)의 진화적 전이를 종합적으로 정리.
Roughgarden, Joan (2004). Evolution’s Rainbow: Diversity, Gender, and Sexuality in Nature and Peop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스탠퍼드대학교 생물학과 교수.
“what won’t work is stuffing our species into two small categories of gender and sexuality.”
동물과 인간 사회에서 성·젠더 다양성이 진화적 전략의 일부임을 주장.
Fausto-Sterling, Anne (2000). Sexing the Body: Gender Politics and the Construction of Sexuality. Basic Books. 브라운대학교 생물학·젠더학 교수.
“Labeling someone a man or a woman is a social decision.”
“Nature loves variety, yet society hates it.”
성 이분법의 사회적 구성성과 생물학적 스펙트럼을 분석.
Trivers, Robert (1972). “Parental investment and sexual selection.” In Sexual Selection and the Descent of Man.
부모 투자 이론 제시. 성 역할과 짝 선택 전략의 진화적 배경 설명.
Inbar, David, Pizarro, David A., Knobe, Joshua, & Bloom, Paul (2009). “Disgust Sensitivity Predicts Intuitive Disapproval of Gays.” Psychological Science, 20(4), 435–439. 예일대학교 심리학과.
혐오 민감성과 동성애에 대한 직관적 부정 태도 사이의 통계적 상관관계 제시.
Song, Jun Ho & Hong, Suk Pyo (2016). “Morphological traits in an androdioecious species Chionanthus retusus.” Flora. 경희대학교 생물학과.
이팝나무의 수양성주 구조(수꽃 개체와 양성화 개체의 공존) 보고.
김보명 (2024). 「한국 보수개신교 반동성애 담론의 재구성 전략」.
반동성애 담론이 종북, 인권, 젠더 이데올로기 프레임으로 확장되는 양상 분석.
백조연 (2018). 「보수개신교의 ‘성과학’ 담론과 동성애 병리화 전략」.
성과학의 외피를 통한 병리화·위생화 프레임 분석.
이형화주성(distyly)
암술대와 수술의 길이가 두 형태로 나뉘어 서로 다른 형태끼리만 수정이 잘 이루어지는 교배 체계.
수양성주(androdioecy)
수꽃 개체와 양성화 개체가 한 집단 안에 함께 존재하는 성 체계.
암수딴그루(dioecy)
암꽃과 수꽃이 서로 다른 개체에 존재하는 성 분화 방식.
자가불화합(self-incompatibility)
같은 유전형 또는 같은 개체의 꽃가루가 수정에 성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전적 장치.
부모 투자 이론(parental investment theory)
양육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성이 짝 선택과 번식 전략에서 더 선택적으로 행동한다는 진화 이론.
인지적 종결 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
불확실성을 줄이고 명확한 범주와 결론을 선호하는 심리적 경향.
병원체 회피 메커니즘(pathogen-avoidance mechanism)
전염 위험을 줄이기 위해 발달한 혐오 기반 정서 체계가 사회적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론.
간성(intersex)
염색체, 호르몬, 생식기관 등 생물학적 성 특징이 전통적 남성·여성 범주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상태.
> “From 1968 to 2000 women athletes had to undergo genetic testing to prove their sex before they could compete. … As an athlete, I believe it added an obstacle to the already demanding course that women had to take to participate in sport.”
마리아 파티뇨(María Patiño)는 이렇게 썼다. 그녀는 스페인의 육상 선수였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앞두고 자신의 ‘여성성 증명서’를 잊어버린 일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구강 상피세포 검사에서 “문제가 있다”는 통보를 받은 뒤, 정밀 핵형 분석 결과는 “46, XY”였다. 그녀의 조직은 테스토스테론에 반응하지 않는 안드로겐 불감증(androgen insensitivity)을 갖고 태어난 것이었다. 과학적 절차는 그녀를 “여성이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이후 그녀는 국가대표팀에서 쫓겨났고, 기록은 말소되었고, 약혼자는 떠났다. 언론은 그녀의 신체를 해부학적 호기심으로 소비했다.
파티뇨의 증언은 앤 파우스토-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의 『섹싱 더 바디(Sexing the Body)』가 출발하는 지점이자, 이 책이 끝까지 관통하는 질문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신체가 어떻게 젠더링되고, 그 과정에서 누가 배제되며, 그 배제가 어떤 폭력을 동반하는가? 분자생물학자이자 페미니스트 과학학자인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세 가지 상충하는 지적 세계—분자생물학, 성 과학자 네트워크, 페미니스트 이론—사이를 넘나든다. 그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 문화·경제·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사회적 실천이 신체에 물질적으로 체화(embodiment)된다는 사실이다.
파티뇨 사례는 이 책의 핵심 논제를 단번에 가시화한다. 196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도입한 성별 검사는 냉전 시기 동구권 남성 선수들의 ‘여성 둔갑’ 루머에서 비롯되었지만, 저자는 그것이 실제로는 “여성 선수가 너무 남성적이면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불안”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음을 밝힌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1922년 “여성의 운동경기 참여는 자연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말한 이래, 스포츠는 ‘여성성’을 끊임없이 인증하고 규제해왔다. 파티뇨는 이 규제의 정점에 있던 제도와 맞닥뜨린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저는 이 스포츠에 12년을 바쳤는데, 저는 이 나라에서 감독감이 지워졌어요. 마치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과학적 절차는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권력을 획득한 셈이다.
이 책의 중요한 성취는 이런 사례들을 단순한 인권 침해의 차원을 넘어, **이원론적 사고의 해체**라는 철학적·과학적 작업과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저자는 페미니즘 내에서도 sex(생물학적 성)와 gender(젠더)를 분리하는 경향이 오히려 생물학적 결정론에 취약한 지점을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신체는 사회적 분석이 미치지 않는 자연적 토대”라는 이분법은 페미니스트들이 신경생물학 등에서 쏟아지는 성차 주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했다. 파티뇨의 몸은 바로 그 이분법을 산산조각낸다. 그녀는 XY 염색체를 갖고 있지만 테스토스테론에 반응하지 않으며, 여성으로 성장해왔고, 유방과 질을 갖고 있다.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 이 질문 자체가 성별 이분법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저자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와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의 논의를 빌려 이 딜레마를 넘어선다. 버틀러가 물질성이 담론 이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젠더화된 모태’를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로스는 생물학적 충동이 원료를 제공하지만 그것이 심리적·사회적 형태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과 의미 체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로스는 **뫼비우스 띠**의 비유를 들어 신체의 안쪽과 바깥쪽이 연속적이며, 생물학적 과정과 사회적 의미는 분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파티뇨의 몸은 이 비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녀의 XY 염색체는 ‘남성’이라는 본질을 보증하지 않았고, 그녀의 신체는 사회가 기대한 ‘여성성’을 충족했지만, 제도는 그녀를 배제했다. 과학적 사실과 사회적 의미는 그녀의 몸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실타래를 이룬다.
이런 통합적 시각은 저자가 “발달 체계 이론(developmental systems theory)”에서 찾는 대안과도 맞닿아 있다. 유전자와 호르몬, 환경과 경험, 학습과 사회적 영향력은 분리된 두 과정(본성/양육)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발달 과정을 이룬다. 저자는 택시 운전기사들의 뇌에서 해마 크기가 경험에 따라 증가하는 연구, 주판을 사용한 수학 학습이 뇌의 특정 영역 활성화 패턴을 변화시킨 연구 등을 예로 들며, 뇌가 고정된 성적 이분법을 구현하는 기관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가소적 기관**임을 보여준다. 이는 셰익스피어 『템페스트』에서 칼리반을 향한 “본성에 양육은 들어갈 수 없다”는 발언에 대한 정면 반박이다. 저자는 “인간은 생물학적이고 따라서 자연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사회적이고 인공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각은 뇌 과학에서의 성차 신화를 해체하는 데서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다. 저자는 태아기 호르몬이 뇌를 남성형/여성형으로 고정시킨다는 기존의 ‘조직화/활성화(O/A) 모델’이 동물 연구에서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선천성 부신 과형성증(CAH) 여아 연구에서도 태아기 호르몬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화 과정과 복잡하게 상호작용한다. 더 결정적으로, 다프나 조엘(Daphna Joel) 등의 연구는 뇌가 ‘남성형’ 또는 ‘여성형’으로 단정할 수 없고, 여러 영역이 각각 남성 전형적·여성 전형적 특성을 혼합한 **모자이크** 형태임을 밝혀냈다. 특정 영역에서 남성 전형적 패턴을 보이더라도 다른 영역에서는 여성 전형적 패턴을 보일 수 있으며, 같은 사람이라도 환경에 따라 동일 영역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남성 뇌”, “여성 뇌”라는 범주 자체가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파티뇨의 신체가 성별 이분법을 넘어선 것처럼, 우리의 뇌도 그 이분법 안에 갇히지 않는다.
2000년 초판 이후 20년, 이 책의 후기는 세상을 크게 바꿔놓은 변화들을 추적한다. 트랜스젠더와 젠더 다양성의 가시성이 급증했고, 젠더 퀴어, 논바이너리 정체성은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다. 간성(인터섹스) 운동은 초기 목표였던 생명에 지장이 없는 유아기 생식기 수술 금지와 남성/여성 외의 성별 표기 허용을 위해 국제적으로 조직화되었다. 2006년 의사들은 ‘성분화이상(DSD)’라는 포괄적 용어를 채택하고, 환자 중심의 접근을 천명하는 합의 논문을 발표했다. 저자가 2000년에 언급했던 “성별 선택지 343가지”라는 제안은 현실에 가까워졌다. 파티뇨의 투쟁은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튼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녀의 사례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염색체 기반 성별 검사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저자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2009년 카스터 세미야(Caster Semenya) 사건에서 국제육상연맹(IAAF)은 “여성 선수의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남성 기준을 넘으면 출전 제한”이라는 규정을 도입했다. 이는 간성이나 트랜스 여성 선수들에게 불공정한 의학적 개입을 강제하는 새로운 형태의 성별 통제로 작동하고 있다. 파티뇨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제 유전적 차이가 저에게 불공정한 신체적 이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세미야는 파티뇨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 선수들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신체를 의심받고, 검사받고, 배제당하고 있다. 저자가 보여주듯, 문제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아니라, 그 수치를 ‘남성적’으로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제도 자체에 있다.
파티뇨는 투쟁 끝에 1988년 복귀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3년의 공백은 그녀의 운동 경력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녀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출전을 노렸지만, 0.1초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제 자격을 되찾기 위해 높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제 이야기는 공개적으로 낱낱이 해부되고 논의되었습니다. 제 승리는 달콤쌉싸름했습니다.” 파티뇨의 몸은 과학적 논쟁의 장이 되었고, 언론의 스펙터클이 되었으며, 제도적 폭력의 표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선수들을 위해 사용했다. “저는 유전적 다양성을 가진 다른 여성 선수들이 두려움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파티뇨의 증언은 『섹싱 더 바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과학적 사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신체는 사회적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젠더링되며, 그 과정은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그리고 그 폭력에 맞서는 목소리는, 그 자체로 과학과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된다.
『섹싱 더 바디』는 단순한 페미니즘 입문서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생산 과정을 해부하는 과학사회학·과학사·젠더 연구의 종합서다. 저자의 가장 큰 공헌은 생물학적 지식을 페미니스트 이론과 대립시키지 않고 통합하려는 시도에 있다. 그는 “과학적 지식의 생산은 정치적·사회적·도덕적 투쟁의 구성 요소”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지식이 신체에 물질적으로 체화되는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통합적 시각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성별 이분법, 호르몬 결정론, 뇌 성차 신화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감성적이어서 리더십에 부적합하다”, “남성의 뇌는 공간 지각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식의 생물학적 결정론이 무비판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주장들이 얼마나 허약한 과학적 근거 위에 세워졌는지, 그리고 그 주장들이 어떤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지 통렬하게 보여준다.
파티뇨는 자신의 증언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저는 여자다. 그리고 내 유전자는 달랐다.” 이 한 문장 속에는 과학적 사실과 젠더 정체성, 제도적 폭력과 개인의 저항이 모두 응축되어 있다. 『섹싱 더 바디』는 이 문장이 가능하게 된 배경을, 그리고 이 문장이 아직도 불가능한 수많은 사람들의 조건을 사유하게 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 이 책의 목적은 독자들이 더 많은 책을 읽고 토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분명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 그리고 파티뇨의 목소리는 이 책의 논의가 결코 추상적이지 않았음을, 신체와 과학, 제도와 저항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실제로 누군가의 삶이 걸려 있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