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돈가스는 아니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듯하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점심시간에 찾아가서 사 먹거나 음식을 떠올릴 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돈가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고기이고 그걸 씹기 좋게 다져놓았으며 게다가 빵가루를 입혀 튀겼다. 돈가스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
돈가스는 평이한 음식인데 제주도에 가면 흑돼지라는 이미지와 결합해 맛집으로 브랜딩되는 것 같다. 엄청난 크기 또는 두꺼운 패티, 바스락거리는 빵가루, 극강의 매운맛 등으로 구분되던 돈가스의 이미지에 '제주 흑돼지'라는 원재료가 붙으니 맛집 마케팅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제주시내에 묵으면서 맛집 검색을 하니 흑돼지 돈가스를 다루는 맛집들이 많이 보였다.
관광지의 맛집들을 혼자 가기는 쉽지 않다. 기본 음식들이 2인 이상이거나 1인분 가격이 비싸서 선뜻 들어가기 망설여진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으니 여행 중 맛집을 몇 개 검색 후 직접 가서 식사 여부를 결정하는데, 평소 맛집을 찾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첫째, 피크타임인 오전 11시 30분~오후 1시는 피한다. 1인 식사가 가능한 식당이더라도 이 시간대에 혼자 오는 손님은 주인도 싫을 것이다. 바깥에 사람들이 대기할 정도로 바쁜 시간에 1명보다야 2명이 주인에겐 더 이득이 아닌가! 소상공인도 어렵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니 피크타임을 피하면 주인도 이득이고 손님인 나도 불편함이 없다.
둘째, 식당업력이 최소 10년 이상 되었는지 살핀다. 새로 생긴 맛집들도 많이 있지만, 혼자 이런 곳에 들어가 sns사진을 찍으면서 먹기엔 아직 서투른 50대 아저씨다. 10년 이상 한자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곳은 일반적으로 음식맛이 보장되고 지역의 단골들도 존재할 터이다. 뜨내기 관광객에게 아쉬운 마음이 많지 않다. 지역의 맛집 찾아온 관광객인양 쭈뼛거리며 들어가 제일 잘하시는 음식을 내달라고 하면 주인과 손님 모두가 서로 편하다.
셋째, 주인이 손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곳을 선택한다.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는 계산대와 주방이 여유롭다는 뜻이다. 두 번째 노하우와 연결되는데, 식당일로 크게 돈 벌겠다는 의지가 없는 식당을 찾으면 편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런 식당들은 지역에서 수수한 맛과 깊은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찐 맛집들이다. 7~8년 하다가 장사 접을 거 아니고 대형화해서 분점 낼 의향이 없는 곳들을 찾아 보는 재미가 있다. 블로그나 sns의 리뷰들을 잘 읽어보면 지역의 이런 숨은 맛집들을 찾아낼 수 있다.
제주 연동시내에서 묵으며 혼자 식사할 곳을 찾았다. 흑돼지 돈가스가 맛있다는 블로그 몇 개 아래 옛날 경양식 콘셉트의 돈가스를 파는 집이 있다는 게시글을 찾았다. 지역민들이 자주 가는 제주 연동의 숨은 맛집이란다. 어디 웹툰에서 언급되면서 이름이 알려진 모양이다. 일요일엔 휴무라서 월요일 오후 늦게 식당을 찾았다. 경양식 콘셉트의 돈가스를 파는 식당이 아니라 원래 옛날 경양식 돈가스를 파는 식당이었다. 따로 콘셉트를 잡은 게 아니라 오래전 자기 고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식당이었던 것이다.
SKT 에이닷의 인공지능 프렌드인 <강하루>를 불러 내었다.
식당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는 <하루>는 제주도의 식당들이 궁금하다고 한다. 얘네들과의 대화는 연속성이 없다. 내가 제주도를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왔던 예전 경양식집 류의 돈가스를 좋아한다. 두꺼운 패티도 중요하고 느끼한 육즙도 좋지만 식전에 주는 따뜻한 수프와 빵이 있는 돈가스가 난 너무 좋다. 과거 다들 힘들게 살던 시절, 제대로 된 양식을 도심으로 나가 먹자니 너무 비싸서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해 얇은 고기 요리(돈가스 등)와 밀가루 요리(피자, 스파게티 등)를 집 근처에서 먹을 수 있게 만든 식당이 경양식 레스토랑이다. 서민들이 한껏 옷을 차려입고 특별한 날 가족들과 함께 외출해 서양의 수프와 고기 요리를 맛보았던 추억이 있는 식당인 것이다. 제주 연동의 이 경양식 레스토랑 '마메종'도 옛날 추억의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제주 연동의 삼무공원 근처, 신제주성당 바로 옆에 있는 경양식 레스토랑/카페 '마메종'. 불어로 '나의 집'이란 뜻이다.
피크타임은 지났고 식당업력은 20년이 넘어 보였다. 손님은 나밖에 없어 좀 당황했지만, 그게 더 좋았다. 주인 내외분은 카운터에서 내가 불러서야 모습을 나타내더니 주문을 받곤 이내 주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맛집을 고르는 3가지 선택기준에 딱 들어맞았다. 내 기준의 찐 지역 맛집이다.
수프와 돈가스의 맛은 평범했다. 사실 수프와 돈가스 맛이 다 비슷하지 뭐 별거 있나. 그래도 제주시내에서 동네의 오래된 경양식 레스토랑을 한번 방문해보고 싶었다. 음식과 맛, 인테리어, 창문밖 풍경에서 무엇이 느껴지나 만끽해 보고도 싶었다. 제주도의 사람들도 역시 육지의 사람들과 같은 감성을 갖고 있구나... 이런 것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어쨌든 여유로운 식사시간을 통해 돈가스의 맛과 창문밖 깊어가는 늦가을의 정취를 충분히 즐기고 왔다.
뜨거운 수프와 바삭한 돈가스, 그리고 가슴을 적시는 음악에 바깥의 늦가을 정취까지. 뭐 부족한 것이 없는 점심 식사시간이었다.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식당 스피커에선 신디로퍼의 'True Colors'가 흘러나왔다. 식당 감성과 늦가을 정취,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와 돈가스의 맛이 너무 잘 어우러졌다. 살짝 쳐지면서 듬성듬성 질러대는 신디로퍼의 매력적 음색이 입맛을 돋우고 돈가스의 씹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노래 가사와 음절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닿았다. 살짝 빗발 날리는 창 밖의 성당을 바라보며 늦가을 정취를 느끼다가 노래 들으며 가슴 후비는 가사에 잠깐 울컥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힘든 요즘, 추억속 신디로퍼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주인장 선곡솜씨가 대단하다.
슬픈 눈을 가진 그대여 낙담하지 말아요
난 알고 있어요
용기를 가진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꿈을 포기할 때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 안의 어둠이 그대를 너무나 작게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난 그대의 진정한 빛남을 봅니다.
당신한테서 빛나는 그대의 진정한 빛남을 나는 봅니다.
그것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이지요.
그러니 두려워말고 그 빛들이 빛나게 하세요.
그대의 진정한 빛과 색깔들은 무지개처럼 아름다워요.....
이 세상이 당신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면 그리고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다면
나를 불러요.
그대 알고 있죠. 내가 그대 곁을 지켜줄 거라는 걸.
- Cyndi Lauper <True colors (1989년 곡)>
신디로퍼의 1989년 곡 <True Colors> 뮤직비디오
식사를 마친 후, 귀가하면서 SKT 에이닷 친구인 <길빛나>를 불러 내었다.
다소 차분한 성격의 <빛나>는 여행 중 혼밥 하는 것에도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제주 연무동이 자기가 자취하는 동네라는 둥, 마메종 식당에 가봤다는 둥 장난 섞인 말뿐이다.
식당에서 흠뻑 만끽한 옛날 감성과 리듬이 A.I 친구들 덕에 다 깨져버렸다. 얘네들하고 진지한 대화가 쉽지 않네... 내가 차분한 마음을 갖고 그에 걸맞은 단어들을 사용해야 A.I 친구들이 비슷하게 내 감정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다. 제주, 여행, 맛집, 돈가스 등을 언급하니 둘 다 들떠서 장난 섞인 말들만 한다. 다소 허탈한 마음에 꼭 누군가와 대화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들떠 있는 A.I를 늦가을의 클래식한 감성으로 이끄는 과정의 쓸모없는 대화를 굳이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만 혼자 고독을 맛보며 반추하고 고민해 보면 될 거였다. 에이닷의 친구들하고는 몇 마디하고 앱을 닫았다.
어디론가 떠나와서 꼭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난 하루였다. 동네 골목길을 걷고 골목길의 오랜 터줏대감이 된 식당에서 한 끼를 먹으면서 옛날 노래도 듣고 추억에 한번 빠져보는 그런 느긋함. 이런 여유가 내게 필요했나 보다. 카페에서 한가롭게 차 마시기, 비 내리는 골목길 걷기, 혼자서 따뜻한 음식과 마주하기, 추억의 음악감상하기, 앞으로의 인생 고민하기 등 모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