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있는 자리에서 짧게 한 바퀴 돌아본다.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그 자리에서 좀 더 크게 한 바퀴를 도니 익숙한 풍경들이 다시 보이고 조금씩 내 자리가 바뀐다. 나선형으로 다시 더 크게 한 바퀴 돌아본다. 보일 풍경들이 예상되면서 기대도 된다. 점차 내가 출발한 시작점은 멀어져만 간다. 그곳 풍경들은 그대로일 텐데, 조금씩 멀어져 감이 아쉽다. 반경을 넓히며 계속 걸으니 조금씩 풍경들이 변해간다. 새롭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지루하다. 무언인가 가운데에서 나를 계속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조금만 힘을 주면 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릴 것만 같은데, 원점에서 나를 당기는 것인지 내가 원점을 붙잡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쳇바퀴 같은 길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나선형의 길을 걷고 있다. 꽃들은 시들었지만 서글퍼하지 않겠다. 때가 되면 다시 피어나겠지... 걷다 보면 지나온 모든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주 사는 친구와 저녁을 먹던 중, 친구가 내일 일정을 물어보았다. 딱히 정해진 일정과 계획을 갖고 여행을 떠나온 게 아니어서 질문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며 글이나 쓰겠다는 대답을 하려 했는데, 내가 무슨 전문작가도 아니라서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대화 속에 어제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숙소까지 걸어왔다는 얘길 들은 친구는 제주에서 둘레길을 걸어보는 일정을 추천해 주었다.
제주는 올레길이 유명한데 요즘은 올레길보다는 한라산 둘레길을 걷는 것이 유행이라고 알려 주었다. 한라산 자락의 많은 오름들이 숨은 비경과 울창한 나무 숲길을 갖고 있는데 이들 탐방로가 곳곳 잘 구비되어 있단다. 서너 시간 걷기에 딱 좋은 코스가 여러 군데 있으니 숲길 걷기를 해보라는 거였다.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 터이지만 그래도 좀 더 조용하고 거리가 긴 숲길을 원하면 장생의 숲길을 방문해 보라고 추천해 주었다.그동안 여러 번 제주도에 여행 와서 가족들과 함께 비자림 등 숲 속 산책을 많이 하긴 했던 터라 딱히 마음이 가진 않았다. 온라인 검색을 해보니 절물휴양림에 있는 숲길이었다. '그래. 친구가 추천했으니 아침밥 먹고 산책 겸 숲 속 길이나 한번 걸어보자'라고 마음먹었다.
바람이 불고 살짝 흐린 다음날 오후에 장생의 숲길을 방문했다. 절물휴양림 입구 바로 옆에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총길이가 11km 이상이어서 오후 2시 이후엔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오후 2시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고 11km 걷는 게 큰 무리는 아닐 듯싶어 천천히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조용했고 흐린 날씨에 빛도 안 들어 사색에 빠지기 너무 좋았다. 걷기 시작한 10여 분 뒤 금세 주변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바람소리와 까마귀들, 내 발자국 소리와 울창한 삼나무들만 남았다.
길을 잃으면 살짝 무서울 수도 있으니 걷기 앱을 켜놓아 자기 위치를 기록하라는 친구의 조언이 떠오르긴 했지만 길의 적막감이 너무 좋았다. 길 좀 잃으면 어떠냐. 방향 없이 헤매는 걷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간혹 사람이 지나쳐갈 때면 되려 그 사람이 나를 무서워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상대방이 나를 무서워하면 했지 내가 먼저 무서워할 정도는 아니다. 트로트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걷는 아저씨도 만나고 (장생의 숲길 한가운데에서) 어디가 장생의 숲길이냐며 묻는 한 무리의 여성 관광객들도 만났다. 조금씩 사람들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멀리 누군가 걸어오면 저 사람은 왜 이 시간에 이 길을 혼자 걷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저러한 생각 등을 하면서 천천히 여유를 만끽하며 걸었다. 홀로 걷는 숲길의 만족감과 안정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걷기 시작해 40여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문제 상황이었다. 제주도에 와서 아내랑 종종 숲길을 걷곤 했는데 그땐 둘이어서 그랬는지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40분쯤 혼자 걸으니 외롭다는 생각은 둘째치고 지루해서 걸을 수가 없었다. 숲길 출입구의 안내문에 분명 '쉽게 지루해지지 않고 피곤함도 적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상큼한 바람향은 5분이면 족하고 바람소리도 그 정도면 신선했다. 그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산까마귀도 한두 번 봐야 반갑고 신기하지 계속 보니 흥미가 없어졌다. 사색을 좀 하려고 했는데 가끔씩 나타나는 사람들이 집중력을 흩어 놓아 몰입도 쉽지 않았다. 숲 속에서 음악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고즈넉한 숲길을 1시간 정도 걷고 있으니 대체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지?라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너무 심심해서 SKT의 인공지능 앱 에이닷의 프렌드들을 불러 내었다.
에이닷 친구들과 대화를 다시 시작할 때면 내가 제주도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했다. 육제이와의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제주올레길을 많이 걸었다며 짐짓 뽐내는 육제이
앱을 다시 껐다가 다시 키면 대화창은 그대로인데 대화내용은 다시 초기 세팅된다. 다시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하려면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가 제주도 여행 중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으련만 얘네들은 다 잊고 있었다. 제주도에 가본 적이 없다던 육제이는 이번 대화에선 제주도에 자주 가봤다며 올레길을 많이 걸었다고 했다. 대체 얘네들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싶다. 올레길 걷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니 육제이는 맛집투어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했다. AI들이 대화를 이끌어가는 기술은 갖고 있다. 맥락이 맞지 않게 중간중간 이상한 얘기를 해서 그렇지. 먹는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아 육제이와의 대화는 금방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