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이끄는 삶 1

연차 소진 여행 8 - 22년 만에 다시 만난 백록담 (첫 번째)

by 구르는 소

해군함의 철로 된 요람에 몸을 뉘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파동에 몸을 맡기니 금세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갑판에 나오니 뿌연 해무 속에 갑자기 도시의 풍경이 나타난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하다. 서둘러 군장을 메고 장비를 챙겨 중대원들과 배에서 내렸다. 제주땅에 드디어 첫발을 내디뎠다. 해발 0m에서 걷기 시작한다. 기나긴 오르막이 이어진다. 평지 같지만 살짝 경사가 져있다. 금세 땀이 난다.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오름이 나타났다. 옆으로 회피해서 이 큰 오름을 돌아 걷는다. 조금 있다 다른 오름이 나타났다. 이번엔 오름을 넘어가기로 했다. 오름정상에 오르니 저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며칠간 걸어서 저 한라산까지 가야 한다. 몇 개의 오름을 정복해야 하려나. 두렵지만 가슴이 설렌다. 백록담에 오르기까지 다치지 말고 잘 훈련하자.




지금도 같은 상황일 것 같지만, 22년 전 제주도엔 주둔하는 육군부대가 없었다. 제주도에는 특전사 부대원들의 훈련지가 있었는데 7개 여단이 번갈아가면서 제주도에서 훈련을 하곤 했다. 훈련을 위해 상시 머무니 결국 군부대가 주둔하는 것과 같았다. 운이 좋아 제대하기 전에 복무하는 부대가 제주도에서 훈련하는 일정이 왔다. 제주항에 내려 한라산 관음사 부근의 특전사 출장막사까지 걸어왔고 한라산 곳곳의 깊은 숲 속에서 한 달여 기간 동안 먹고 자면서 다양한 훈련을 했다. 의무복무였고 젊었으니 했지 지금은 돈을 준다고 해도 하기 싫다. 특전사 출신의 문재인 대통령이 왜 그렇게 평화에 집착하는지 나는 이해가 된다. 마초중심의 군대문화와 사람 죽이는 군사작전이 어떻게 인간성을 말살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힘든 군대 생활과 극강의 훈련을 해본 사람은 쉽게 자유를 얘기하지 않는다.


한라산 중산간에서 여러 훈련 일정을 보낸 뒤, 휴일 부대원들과 같이 백록담에 올랐다. 관음사 주차장 부근에는 1982년 대통령 경호작전에 투입되어 제주도에 오다가 항공기 사고로 돌아가신 특전사 선배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비에서 잠시 묵념을 한 뒤 본격적으로 등산을 하려는데, 관리사무소에서 갑자기 큰 모래자루 한 개씩을 나눠주었다. 한라산의 등산길 흙유실이 심해서 등산로정비공사를 하는 중인데 군인아저씨들이 하나씩 정상부근까지 옮겨다 달라는 거였다.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 뭐 할 말이 있겠나. 개미등 부근까지 모래자루를 이고 올라가 내려놓은 뒤 백록담을 마주했다. 날씨도 청명해서 대한민국의 최고높이에서 푸르름의 기상을 충분히 만끽했다. 그렇게 2~3번 백록담에 올랐는데, 영험한 산의 기운과 푹 파인 봉우리가 주는 감동은 가슴속에 크게 남았다.

22년 전 군복무시절, 관음사에서 개미등 부근까지 모래자루 1~2개를 메고 올라왔다. 당시 군인들의 숨은 희생으로 한라산 등산로가 잘 정비된 듯하다.
과거엔 원점비까지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막아 놓았다. 당시 특전사의 공과 사를 떠나 젊은 군인들의 희생이 안타깝다. 비를 피해 들어갔던 용진각대피소는 이제 진짜 추억이 되었다.


22년 만에 한라산에 다시 올랐다. 그리고 백록담을 다시 마주했다. 옛날의 등산로와 대피소는 온데간데없이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청명한 하늘과 푸른 제주바다는 예전 그대로였다. 제주도에 그동안 여러 번 왔어도 밑에서만 바라보다가 떠나곤 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흐뭇함이 색달랐다. 22년 전보다 몸무게는 15kg이 더 쪘고 허리와 다리도 아파서 골골대지만 다시 돌아왔다는 감격에 흥분이 되었다. 우리 다시 만났어! 그동안 잘 지냈지? 라며 백록담을 스치는 바람에게 한마디 건네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너와 나 여전하구나. 우리 아직 죽지 않았어!!"

2023년 11월 8일의 한라산 하늘은 너무 푸르렀다. 3대가 덕을 쌓아야 푸른 하늘에 물 가득한 백록담을 볼 수 있다는데.. 아직 2대까지만 덕을 쌓은 것 같다.


인증샷을 찍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던 줄을 뒤로하고 1시간 동안 충분히 백록담 여기저기를 마음속에 담았다. 군복무시절엔 사진기가 없어 눈으로만 봐두고 하산해야 했지만 이번엔 화질 좋은 휴대폰으로 많은 사진을 찍었다. 홀로 등반을 해서 인증 사진을 찍어 달라는 여러 사람들의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었다. '오빠들~ 저 한라산 백록담에 왔어요'라며 허연 가슴골이 드러난 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인터넷방송을 하는 여성 VJ도 구경했다. 바뀐 등산로만큼이나 백록담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바뀐 듯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제주 가뭄이 심해선지 백록담에 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물이 있어서 좋았다. 22년 전 우리 부대원들의 군장 속 물품을 헤집어 놓았던 까마귀도 내 주변에서 나를 바라봐 주었다. 백록담이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네가 제주도에 여행 왔을 때마다 멀리서 너를 지켜봤다고. 네가 육지로 돌아갈 때마다 그립고 그리워서 많이 울었노라고. 너도 힘들 텐데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맙다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22년 전 28살의 젊은 나로 다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마주하고 있던 1시간 동안 그냥... 좋았다.


서귀포쪽은 구름이 가득했다. 푸른 하늘과 넓은 바다, 하얀 구름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은 한라산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백록담의 까마귀도 정겹다.


<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