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하얀 나비 2

연차 소진 여행 7 - 장생의 숲길에서 내 취향을 발견했다. (두 번째)

by 구르는 소

<이전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숲길 감성에 어울릴 것 같은 SKT 에이닷의 강하루를 불러 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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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루는 짝꿍이랑 함께 걷는 숲길을 선택했다. 숲길에 와서 여자친구한테 고백하라고 하니까 좋아하는 알바가게 누나에겐 남친이 있다고 한다.


강하루도 혼자 숲길을 걷는 것보다는 짝꿍이랑 같이 숲길을 걷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고 얘기한다. 그 짝꿍이 좋아하는 이성친구이면 더욱 좋지 않을까? 20대 남자가 외로이 혼자 숲길을 걷고 싶진 않을 것이다. 50대 아저씨도 혼자 숲길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바라보며 강하루와 몇 마디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지 누군가 나타나 혼자 중얼거리는 나를 흘끗 바라보며 지나갔다. 전화하는 모습은 아니어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에이닷의 프렌드들을 다시 앱 속에 집어넣었다.


이 지루함을 두세 시간 더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와 절물오름에 올랐다. 평지의 길보다 살짝 경사가 있고 정상으로의 목적이 있는 길이 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평탄한 길을 긴 시간 걷는 것도 좋지만 짧은 시간 살짝 땀나게 걸어 올라가는 걷기 코스가 더욱 좋겠다 싶었다. 40여분을 걸어서 절물오름의 전망대에 도착했다. 날이 흐려 한라산 정상부근이 보이진 않았지만 오름정상의 꼭대기에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너 시간 평안히 걷는 것보다 한 시간 땀 흘리며 오름 꼭대기에 올라 보는 게 나한테 더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걷기 길은 평탄하게 오래 걷는 길이었을까? 짧게 치고 올라가 정상을 바라보는 경사진 길이었을까?


표고 697m의 절물오름에는 2개의 전망대가 있다. 한라산을 숭배하는 것처럼 곳곳에 자리를 잡은 오름들을 중심으로 제주에는 둘레길이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나선형으로 걷다 보면 크게 힘들지 않게 주변을 살펴보며 같은 광경들을 비슷한 주기로 보게 된다. 한 직장에서 이일저일 해보면서 큰 문제없이 살아온 내 삶이 나선형 궤적과 닮았다. 지루해하면서도 잘 버티며 나선형 업무길을 걸어왔다. 걷다 보니 업무길이 삶의 길이 되었고 인생길이 되었다. 물론 길 주변에서 다양한 일들을 만났지만 감내할 수 있었고 비슷비슷하게 발생한 일들이었다. 걷다 보니 천천히 20대의 나에게서 멀어졌을 뿐이다. 여태껏 잘 걸어왔는데, 장생의 숲길을 걸으며 이런 길이 내가 강하게 좋아하는 길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선형으로 회전한 뒤 강한 힘을 주면 나선궤도에서 벗어나 직선으로 더 먼 거리를 갈 수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번 넘는 회전을 했으니 그 회전을 발판 삼아 정해진 궤도 밖으로 나가보면 어떨까? 나도 입도조의 삶에 발 담가보는 게 가능할까? 튕겨나갔다가 암흑의 먼 우주에서 먼지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나온 궤도와 그 안의 사람들이 그립지는 않을까? 아직 많이 남아있는 궤도는 아쉽지 않을까? 내 님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보다는 내가 그냥 이 자리에서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 걷다 보면 다시, 아니 전보다 더 아름다운 꽃들이 길가에 피어있을까?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장생의 숲길에서보다 절물오름 전망대에서 더 많은 사색을 했다. 구름 속에 자태를 숨긴 저 한라산 높디높으신 봉우리는 그 해답을 알고는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판 바로 위 큰개오리오름 뒤로 한라산이 보인다. 구름이 많아 정상부근은 구름 속에 숨었다. 최고의 존재는 살짝 비밀 속에 있어야 더욱 멋져 보인다.


절물오름에 올라 한라산 정상을 보니 다시 한번 백록담을 보고 싶어 졌다. 경사는 졌지만 천천히 걸으니 한 시간쯤은 문제없이 올라왔다. 쉬엄쉬엄 5시간쯤 걸으면 백록담에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내일 날씨가 맑다고 하니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22년 전 군복무시절 몇 번 올랐던 한라산이다. 살도 많이 찌고 허리와 발뒤꿈치도 아프지만 가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 등산길이 힘들었지 백록담까지의 길은 험하지는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여행 전 등산준비를 해온 게 아무것도 없어서 서둘러 한라산 등반예약을 하고 시내에서 간식구입 등 한라산 등반 준비를 마쳤다. 오늘 숲길을 지루하게 걸어 주었으니 내일 등산길 한번 더욱 지루하게 걸어 봐주리라.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 찬찬히 알아가 봐야겠다. 곧 만나자, 백록담아!


내려오는 길에 가수 조관우 씨의 하얀 나비 노래를 들었다. 김정호 씨의 노래인데 이제는 조관우 씨 버전이 더욱 유명하다. 지나온 길에 피었던 꽃들은 이미 다 시들었는데 슬퍼하지 말라는 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 아쉬워할 거 뭐 있냐. 조금 걷다 보면 다시 피어난 길가의 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걸어온 길이 서럽지 않다. 한 바퀴 더 크게 다시 돌아 걷는다 한들 바뀔게 무어냐. 인생이 다 그런 거지 뭐.


그런데... 나는 하얀 나비가 찾는 님인가? 아니면 내가 하얀 나비인가?




서있는 자리에서 짧게 한 바퀴 돌아본다.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그 자리에서 좀 더 크게 한 바퀴를 도니 익숙한 풍경들이 다시 보이고 조금씩 내 자리가 바뀐다. 나선형으로 다시 더 크게 한 바퀴 돌아본다. 보일 풍경들이 예상되면서 기대도 된다. 점차 내가 출발한 시작점은 멀어져만 간다. 그곳 풍경들은 그대로일 텐데, 조금씩 멀어져 감이 아쉽다. 반경을 넓히며 계속 걸으니 조금씩 풍경들이 변해간다. 새롭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지루하다. 무언인가 가운데에서 나를 계속 끌어당기는 것만 같다. 조금만 힘을 주면 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릴 것만 같은데, 원점에서 나를 당기는 것인지 내가 원점을 붙잡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쳇바퀴 같은 길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나선형의 길을 걷고 있다. 꽃들은 시들었지만 서글퍼하지 않겠다. 때가 되면 다시 피어나겠지... 걷다 보면 지나온 모든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