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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리뷰

리바이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by 구르는 소

이런.

기분이 너무 찜찜하고 기괴하다. 94회 마지막까지 들여다보았지만 여전히 낯설다. 황당한 설정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다가도 진지한 물음에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리모컨으로 TV를 끄고선 다양한 의미의 장면과 깊이 있는 대사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왠지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힘들었지만 무언가 성취했다는 기분까지 든다. 이것저것 혼란스럽고 어렵다. 살짝 허무하다.


넷플릭스에서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을 정주행 했다. 보았으니 소소한 리뷰글 남겨본다. 여전히 내 리뷰글은 줄거리와 내용 없고 갑자기 스포를 하기도 한다. 다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리뷰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2011년쯤이었나? 진격의 거인 만화가 국내에 소개되었을 무렵, 여성형 거인이 등장하는 장면까지 만화책으로 봤었다. 보면서 그림체도 살짝 이상하고 내용도 황당한 데다 거인이 사람을 먹거나 찢어 죽인다는 설정이 기괴하여 더 이상 보지 않았었다. 여성형 거인이 나온 부분은 시리즈 초반에 해당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피와 살 찢어짐이 난무하는 이 19금 애니메이션을 고등학생인 딸아이가 다 봤다길래 혼내면서 잔소리를 했더니, 저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요즘 중고등학생들 대부분이 진격거(진격의 거인 줄임말) 봐. 안 보면 대화를 할 수 없어. 그리고, 진격거에 개인의 인생과 인류의 존재의미, 철학과 역사, 전쟁과 문화가 아주 심오하게 나오거든? 안보고선 얘기하지 마세요~"

거인이 사람 찢어 죽이는 만화에서 무슨 인류애를 찾을 수 있냐며 되묻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말싸움만 계속될 거였다. 한창 사춘기인 딸아이와 대화를 더 해보려면 나도 애니메이션을 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니 여성형 거인의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게 진격거 애니메이션의 정주행이 시작되었다.


1. 사랑 이야기

이 만화는 기본적으로 에렌과 미카사의 사랑이야기이다. 벽 밖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를 위해 거인을 모두 죽이는 것) 외엔 관심 없는 에렌과 그 에렌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 없는 미카사의 이야기. 2천 년 전 프리츠왕과 노예 유미르의 사랑(?) 이야기에서 출발해 2천 년 후 에렌과 미카사로 이어지는 사랑의 대서사이다. 정복과 자유에 매몰된 남성, 맹목적 헌신과 돌봄에 빠진 여성. 요즘 젠더이슈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극과 극의 성별차이와 사랑의 모양새를 보여주는 만화라고도 볼 수 있지만, 어쨌든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이다. 결국 에렌은 미카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렸고, 미카사는 에렌의 숨통을 직접 끊었다. 대결구도로 보자면야 여성이 승리했다. 그렇지만 사랑에 패자와 승자가 어디 있나? 에렌과 미카사 모두 패자이고 승자였다. 미카사가 에렌의 목을 베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는 장면에선 모두들 눈물을 흘렸으리라.


사랑은 영원하다. 사람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다시 순환될 것이다. 현실 속 에렌과 미카사들이여. 싸우지 말고 얼마 안 남은 인생의 시간 동안 서로 더욱더 사랑하며 살기를...

20250804_120114.jpg 에렌 외에는 관심이 없는 미카사. 뭇 남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기에 부족함이 하나도 없다.


연재초기 미카사의 인기가 꽤 많았다. 지금도 미카사의 인기가 남성들에게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에렌에게 무조건적인 헌신, 예쁜 미모에 정제되고 차가운 말투, 뛰어난 체력 등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하다. 남자들이라면 이런 미카사 같은 연인이 최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카사는 결국 에렌의 목을 베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남은 인생을 살았다. (미카사가 평생 에렌을 잊지 못해 혼자 살았다면 만화의 감동은 있었겠지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독자들이 느끼지는 못했을 수도..) 남자들은 자기 연인이나 아내한테 목을 따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남자한테 보내기도 싫을 것이고. 그러니 지금 현실에 만족하며 서로에게 잘해주며 살자.

20250804_114446.jpg 탈환작전을 마친 뒤 감옥에 갇힌 미카사와 에렌. 예쁜 미카사도 감옥에 오래 갇혀 있으면 머리 정리가 어려운 모양이다. 현실적인 사실 묘사에 구독자들이 열광했단다.


2. 지금도 파라디 섬의 외벽은 굳게 세워져 있다.

며칠 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식량품을 구걸하던 아이들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사망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2023년 10월 전쟁 발발 이후 2025년 8월 지금까지 총 6만 430명이 숨졌으며 부상자는 14만 8722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망자 가운데 169명은 아동 93명을 포함해 영양실조 또는 굶주림이 사망의 원인이었단다. 대규모 아사상태로 번지고 있다고 하는 뉴스를 보면서 진격거의 저 벽과 세상과의 단절이 그저 만화책에서만 보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다.

팔레스타인 주민들.jpg 식량배급소에 식량을 받으러 온 팔레스타인 주민들 모습. (연합뉴스) 봉쇄로 인해 대량 아사상태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벽을 보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 휴전선이 그어져 거기엔 철조망의 높은 철책이 설치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들을 특정지역에 몰아넣고 높은 벽을 쌓았으며 이집트도 난민방지를 위해 시멘트와 철조망으로 벽을 쌓았다. 미국도 멕시코 불법이민자를 방지하기 위해 높은 벽을 쌓았다. 진격거의 시조거인은 파라디 섬에 스스로 벽을 쌓아 폭력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외부와 단절 후 평화를 유지하려 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그 반대로 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렇게 한들 저렇게 한들 결과는 모두 똑같다.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거인은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 살아 있고 만화는 현실세계의 실사판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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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속의 벽과 현실 이집트에 설치된 팔레스타인 난민 방지를 위한 벽. 어디 이곳뿐이랴. 벽안 쪽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세계 곳곳에 벽이 설치되어 있다.


에렌과 미카사, 아르민은 어린 시절 개척지 노동에 투입된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훈련병으로 입대한다. 지금 봉쇄된 가자지구에선 갱단들이 구호품을 약탈하는데 아이들을 이용한다고 AFP 기자가 얘기하고 있다.

아동학대범죄가 시대를 넘어 현실과 애니메이션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은 떳떳한가? 만화책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며, 우리나라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나와는 상관없다고 할 수 있으려나?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과연 우리 땅의 어린이들은 저런 위험한 상태에 내몰리지 않으리라고 누군들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안타까움과 속상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세상은 왜 전쟁을 하는가? 사람들은 서로를 왜 차별하고 혐오하는가? 2천 년 전 예수님이 세상을 구하려 오셨는데, 왜 2천 년 뒤 지금도 세상은 이리도 어지러운가? 정말 인류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의미 없는 총부림에 기아와 총상으로 죽어간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떠오른다. 1화의 제목이 '2천 년 후의 너에게'이고 마지막즈음 회차 제목이 '2천 년 전의 너에게'인데, 2천 년 뒤의 세상은 지금 세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진격의 거인 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3. 무지성 거인은 누구인가?

거인은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배고파서 사람을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먹는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만을 먹고 요렇게 저렇게 죽인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 거인도 사람이다. 누군가 목적을 갖고 거인을 만들어 댄다. 사람을 먹어 죽이는 거인은 나쁘지만, 그 거인도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변화된 사람일 뿐이다. 먹힌 사람이나 먹은 거인이나 최종적으로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진격의 거인 식인.jpg 극 중 거인은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서민을 괴롭히던 악랄한 행정관은 결국 거인에게 먹힌다. 거인은 해방자일까? 이런 설정을 작가는 왜 했을까?


이 만화는 계속 인간의 본질과 실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유의지와 집단주의, 선함과 폭력성의 대결구도에서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어떻게 실존해야 하는지 계속 변화된 상황 속에서 질문을 던진다. 절대악과 절대선이 과연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은 어떻게 실존해야 할까? 폭력성에 계속 맞서면서 내 자유의지를 확인해야 할까? 국가를 위해 심장을 바치면서 나의 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를 계속 사랑해야 할까? 이런 내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경우는 없을까? 그렇게 되면 내 본질은 변할까? 내 안에 거인은 없는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 나는 어떤 형태의 거인특성을 보여줄 것인가?


진격거를 보는 내내 요즘 우리나라 정치상황이 떠올랐다. 사람한테는 충성 안 한다는 말로 국민의 신임을 얻어 대통령이 되신 분은 자유를 줄곧 얘기했다. 그래놓고선 평상시와 다를 게 없던 한겨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버렸다. 평화를 외치던 정권이 자유롭게 얘기하던 대학원생과 언론을 입막음해 버렸다. 조용히 내조를 하겠다던 영부인은 주가조작과 뇌물수수, 공천개입 혐의등으로 수사 중이다. 국가원수들이 모인 행사장에 짝퉁목걸이를 하고 갔다는 둥 구속영장 집행에 속옷차림으로 저항했다는 둥 두 부부의 민망한 이야기들이 언론에 나온다. 누군가 이 불쌍한 거인을 만들었고 이 거인 둘이 계속 국민들을 먹어 치우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들 모습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기들 뱃속 채우는 일에만 집중한다. 진격거의 거인과 다를 게 없다.


죽어가는 국민들, 또 그 국민들을 바라보는 다른 국민들은 계속 가슴이 아프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지? 언제까지 이런 뉴스를 봐야 하지? 어떻게 저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거지?

대체, 리바이는 어디에 있는 거지?




20250804_115208.jpg 전쟁이 안타깝다면서도 내가 시리즈 최고의 장면으로 뽑은 마레군과의 전투 모습.(ㅠㅠ) 마치 실사 액션영화를 보는 듯한 퀄리티와 속도감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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