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면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물리적인 공간에서 같이 지내야 하는 학교는 친구를 사귀기 최적의 환경이었다. 나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함께 있으면 항상 편안하고 즐거운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스물이 넘어 먹고 사는 일에 쫓기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못한 탓에 친구들을 잃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20대에 이미 학창 시절 친구들과 연락이 다 끊기고 말았다. 지금도 물론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은 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친구는 없다. 지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라고 과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후 며칠 뒤 가깝게 지내는 전 직장 동료 한 분이 그 글을 읽고 연락을 했다. “그렇지! 나 따위 하찮은 존재는 친구라고 여기지도 않는 거죠? 나랑은 하나도 안 친하다 이거지?” 라고 놀리듯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명확하게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써서 상처받았다’는 의미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글에 상처받았다는 말에도 놀랐지만 그 보다 그분이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친하게 지내는 타인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어쩌면 내가 친구의 정의를 너무 좁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주로 전 직장 동료들이다. 아무래도 같은 물리적 공간 안에서 업무 중에 벌어지는 각종 험난한 사고들을 함께 헤쳐 나갔기 때문에 전우애 같은 것이 생긴다. 한계까지 몰렸을 때의 모습을 서로가 알고 그 모습 조차 서로가 받아들인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환경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깝다고 느껴진다. 확실히 지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가깝게 지내는 전 직장 동료들을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호칭도 님이나 씨를 꼭 붙여서 예의 바르게 존대한다. 하지만 그 동료의 집에 놀러 가면 냉장고 열어서 아무거나 막 꺼내 먹고 내가 좋아하는 음료가 없으면 왜 안 사놨냐고 면박을 준다. 물론 여전히 님이나 씨 호칭을 붙이고 존대를 하면서 말이다.
친구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다른 타인들 보다 훨씬 더 가깝고 친한 사람. 어른이 되어 사귀는 친구라는 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