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바라는 일이겠지만 나 역시 세상이 나에게 상냥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은 대체적으로 나에게 상냥하지 않다. 오히려 차갑고 무례하고 종종 폭력적이다. 이런 황량한 세상에서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상냥한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아주 좁아도 좋으니 그 안에 들어가면 무조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상냥한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상냥한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도대체 누가 나에게 상냥한 영역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내 쪽에서 먼저 상냥함을 제공하는 수밖에 없다.
친절한 세상을 원한다면 먼저 친절하게 말하고, 예의 바른 세상을 원한다면 먼저 예의 있게 대한다. 내 실수에 관대한 세상을 원한다면 먼저 상대의 실수에 관대해지고, 다정다감한 세상을 원한다면 먼저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어 준다. 관심이 없거나 조금 싫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베푼 상냥함이 모두 다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은 아무 소식이 없거나 가끔 상처로 돌아올 때도 있다. 그런 순간일수록 착하게 사는 건 바보짓이라거나, 좀 더 영리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거나, 어차피 세상은 각자도생이라는 냉소적인 말들에 마음이 끌린다.
하지만 그런 냉소적인 태도는 상냥한 영역을 개척한다는 목표와 정반대되는 결과를 도출한다. 영리하고 이기적으로 타인을 대하면 결국 나에게 영리하고 이기적인 영역을 개척하게 될 뿐이다. 베풀었던 상냥함이 돌아오지 않거나 상처로 돌아와도 원래 세상이 다 이런 거겠거니 하면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나에게 상냥함을 돌려주는 사람을 발굴하면 무조건 잡는다. 그 사람이 내 영역 안에 계속 머무를 마음이 들도록 지금까지 투자했던 것보다 더 많은 상냥함을 살포한다. 섭섭함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이적하지 않도록 상냥함을 넉넉하게 쏟아붓는다. 향후 실적에 따라 더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할 것 같은 분위기도 낸다.
나는 그렇게 어렵게 발굴해 낸 사람들을 모아 상냥한 영역을 개척해 왔다. 그런 식으로 넓지는 않아도 어쨌든 들어가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상냥한 영역을 개척해 냈다. 효율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절대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상냥한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시도 해봤던 방법들 중 유일하게 쓸만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