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짓돈

by 여운

할머니는 언젠가, 당신이 조금씩 모아 온 돈이라며 내게 현금을 건네주셨다. 혹시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 대신 모아두었다가 써달라는 말과 함께였다. 갓 결혼을 하고 학생 신분을 벗어나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그 몇십만 원을 일단 통장에 넣어두었다. 그 이후로 할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조금씩 맡기신 돈은 어느새 500만 원 정도가 되어 있었다. 나는 할머니께 잘 저금해 두었으니 필요하실 때 언제든 말씀해 달라고 했고, 할머니는 당신은 딱히 쓸 데가 없다며 나중에 병원에 가게 될 때 쓰라고 하셨다. 그때의 나는 그 말씀이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져 철없이 그저 흘려들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힘든 일을 겪고 있던 날이었다. 할머니께서 다급하게 전화를 하셔서는 맡겨둔 돈을 전부 지금 당장 보내달라고 하셨다. 무슨 일이냐고 여쭸더니 큰삼촌에게 일이 생겼다고 하셨다. 나는 일단 바로 보내드리겠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할머니가 조용히 하신 말씀이 있다. “너도 나중에 아들 키워보면 알 거다.” 아마도 삼촌에게 급히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겼고, 당신 방에서 동전까지 찾아가며 애쓰는 아들을 보며 정작 당신을 위해 모아두었던 쌈짓돈까지 보태주고 싶으셨던 거겠지. 마음이 쓰였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돈을 돌려드리는 것뿐이었다. 가끔은 생각해 본다. 그 돈을 돌려드리지 않고 내가 계속 맡고 있었다면, 할머니께서 요양원에 가시게 되었을 때 나는 그때와는 달랐을까.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할머니께서는 손녀인 나에게 기대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주부양자는 큰삼촌이라는 이유로 내가 나서는 건 문제가 될 거라 합리화하며, 비겁하게 한 발 물러서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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