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환경
우린 가끔 무기력해질 때가 있다. 언제나 문제는 그 빈도와 지속시간이다. 자주, 그리고 오래 무기력을 경험하게 되면, 무기력은 점점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어떠한 조치가 없다면, 무기력은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면서 우울이 되고 더 깊숙히 가라앉게 되면, 우울증이 된다.
무력감의 표면은 이렇게 드러난다.
흥미나 의욕을 잃는다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진다
만성적으로 피로하다
기억력이 떨어진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인생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자주 멍을 때린다
표정이 없어진다
미하엘 엔데의 작품 [모모]에도 이와 관련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는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해. 허나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지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지. 한 마디로 몹시 지루한게야. 허나 이런 증상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게 마련이란다. <중략>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단다. 그 지경까지 이르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없어. 회복할 길이 없는 게야. 그 사람은 공허한 잿빛 얼굴을 하고 바삐 돌아다니게 되지. 회색 신사와 똑같아진다나. 그래, 그들 중의 하나가 되지. 그 병의 이름은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란다.” p. 328
이 작품에서는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라고 표현했지만, 내용이 무기력증 증상과 비슷해보인다. [모모]에서 나온 내용처럼 정말 그 병은 ‘회복할 길’이 없는 걸까? 그 길을 찾기 전에 알아보자. 우리가 왜 무기력에 빠지는지.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생각이 만들어지고, 그 생각이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만든다. 비옥한 땅(environment)에서 좋은 열매(thought)가 열리는 법이다. 자신이 뿌리 내린 토양인 자신의 땅(환경)을 살펴 보아야한다. 양분이 없는 땅에 심겨진 식물은 곧 ‘무기력하게’ 시들고만다. 다행히(?) 우리는 식물이 아니므로,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다. 땅을 옮기든지, 땅을 다시 가꾸든지.
각자 처한 환경은 다르다. 단,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환경은 물리적인 환경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 내면세계가 규정하는 이 세계의 모습도 환경이다.
무기력을 양산하는 환경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다음의 세 가지 환경(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주체가 될 수 없는 일에는 적극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 안에 ‘나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일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일과 나의 ‘합’ 문제다. 적성은 누구나 다른 법이니까. 합이 맞지 않는 그 일을 함으로써, 적극성이 떨어지면 몰입도가 낮아진다. 지루해지고 하기 싫어진다. 점점 의욕과 의미를 잃어버린다. 속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환경의 변화든 나의 의지와 생각의 변화든,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을 때 무기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대상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가 아닌, ‘할거야’로 의식적으로 바꾸는 연습과 반복이 필요할 뿐이다. 의식의 힘으로도 어렵다면 이제 움직여야할 때인 것이고.
우린 살아가면서 간혹 실패한다. 아니, 티가 나지 않을지언정 크고 작은 실패를 할 수밖에 없다. 실패 자체가 좋을 수는 없지만, 우린 실패를 통해 배운다. 하지만 그 실패가 불허된 환경이라면? 조장된다면? 또는 그렇다 믿는다면? 그러면 실패가 주는 교훈에 집중할 수 없다. ‘왜 실패했지?’란 질문은 실패의 본질보다 자아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한 자책은 의욕을 상실케 만든다.
그 반대의 환경이 되어야 한다.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계속 스스로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실패 뒷면에 있는 배움에 더 초점을 둔다면, 계속 실패해도 더 나아갈 뿐이다. 실패의 반복이 무기력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실패의 인정이 무기력을 만드는 것이니까.
실패란 없을 수 없고, 그렇기에 결국 실패란 것은 없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다.
의미의 결핍도 문제가 되지만, 과한 의미부여 또한 문제가 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더욱 그러한 모양새다. 나이에 대한 의미부여(몇살 까지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이 되어야 하고 등), 성별에 대한 의미부여(여자는 이래야하고, 남자는 저래야하고), 관계에 대한 의미부여(좋은 관계는 이래야 하고 나쁜 관계는 이런 것이고)가 많다. 특히, 대중매체, SNS가 그러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갈수록 그것들을 소비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의 변화도 이유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의미부여 자체라기 보다 ‘정해진 의미’가 문제가 된다. 부모 세대로 부터 혹은 사회가 부여해준 의미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 그것은 다양성을 배제시킨다. 내가 느끼고 깨달은 의미가 아닐 때 우린 무기력을 느낀다. 안타까운 것은 윗세대와 사회가 요구한 ‘진정한 의미’는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의미의 진정한 생산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 그러한 살아있는 자각이 사라지고 정해진 의미에 벗어났을 때 우울해진다. 회색빛이 되며, 무기력해진다.
위의 세 가지가 우리의 존재를 열심히 갉아 먹는 애벌레가 된다.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잎은 광합성할 여유조차 갖지 못한채, 뜯어 먹혀버린다. 결국 앙상한 빈가지만 남아 누군가의 그늘도 되어주지 못한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스스로 살아갈 에너지를 만들기에도 버겁다. 무기력은 이유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요즘들어, 무기력을 더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끝이 않나는 코로나의 여파 때문일수도 있고, 급변하는 사회의 속도 혹은 관계의 사이버화 등이 이유일 수 있다. 사회는 계속 빠르게 발전하고 편리해지는데, 왜 갈수록 더 행복과는 멀어지는 기분인 걸까? 왜 계속 새로운 과제가 부여되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서, 기름만 있다고 영원히 가동되진 않는다. 사람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무기력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휴식이라고 한다. 바로 ‘쉼’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각자만의 방식으로 각자가 지금 ‘이 시기’에 필요한 쉼들을 찾길 바란다. 그 쉼이란 누군가의 목소리로 찾을 수 없다. 자신이 무기력해진 이유를 찾으면, 내 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필요한 쉼에 대해 알려줄 것이다. 여행을 떠나든, 새로운 일을 하든, 취미를 갖든, 가족들과 식사를 하든, 무엇을 만들든 각자가 가진 방식으로, 너무도 다양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