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태국의 화인 그리고 진씨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치세에 필요한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을 중국인들에게 의존했다.
중국인들은 사탕수수와 후추 채소를 재배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다.
특히 쌀을 도정하여 수출하는 일은 화인이 도맡아 했고 이로 인한 부두건설일, 철도건설, 도로, 교량 건설의 일들을 중국에서 데려온 노동력이 수행했다.
미국에서는 이들 중국 노동력을 꿀리(coolie)라고 호칭하며 철도공사와 광산일에 고용하였다
당시 말레이 반도에는 영국인들이 개발하는 많은 주석광이 있었는데 주석광 인부도 중국인이 담당했고 영국인이 조성한 고무농장의 인부도 중국인이었다.
그리하여 차오프라야 강둑에 조성한 차이나 타운은 인구가 계속 늘어나며 상업지역으로 발전해 갔으며 오늘날 까지도 건재하여 있다.
중국인 사회가 커져가면서 술, 도박, 아편이 이들에 의하여 장악되었고 정부는 아편수입에 관세조차도 붙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돈 있는 중국인들의 탐욕이 있었지 않았나 한다.
중국인들이 시작한 사탕수수와 후추를 재배를 하는 농장은 동향사람을 불러들이는 게 편리해서였는지 차오저우사람이나 그 지역에 많이 살고 있던 다른 방언 군(群)의 하카(客家) 사람들을 대거로 불러들였다.
하기야 말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이 편리하였을 테니까.
나는 근래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허름한 유니폼을 입고 도심 도로공사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중국인들을 많이 보아서 그런지 상상이 간다. 사실 21세기 현재에도 아프리카의 여느 지역에서 육체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목격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라마 4세, 5세에 들어와서는 세금 걷는 일을 민간에게 도급을 주어 시행했는데 세금을 낼 만큼 수익을 올리는 자가 대부분 중국인이었을 테니까 세금을 걷는 자도 중국인이 유리할 것이어서 징세 도급자가 모두 중국인이었다.
왕권의 정부로서는 징세가 주요 수입원이니까 왕권과 중국인은 밀월 관계가 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늘 얘기하지만 정치도 돈이 있어야 하니까.
나중에 현재 태국을 움직이는 경제인들을 얘기하겠지만 그렇게 대단히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태국 화인들인 나의 지인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해 본다.
나의 태국 화인들이 현재 하고 있는 사업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두부공장, 대형 마사지 숍(전통마사지가 아닌), 방직공장, 시장에서 식품점, 게임사업, 통조림공장, 청소기기 제조, 쌀장사, 철강회사, 목재사업, 부동산, 환경사업, 카지노, 대학교수 미생물학, 코랏에서 모우터 판매, 치과의사.
최근에 이주하여온 중국 국적인;
-알루미늄 생산기계제조, 운송업, 건설회사 지사책임자. 무역, 건설, 투자알선 중개인.
위에서 보는 직업군에서 이상하게도 농사를 짓는 사람과 식당업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참고로 한국인 사업가는 대부분 관광과 관계되는 일들을 한다. 하기야 한국인들은 화인과 같은 붙박이 태국 국민은 아니고 한시적 체류자이다. 근래에 들어와서 생계형 사업들을 하는 것이니까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이다.
관광가이드, 식당, 골프장 운영, 인쇄, 술집, 물류 등이다. 식당의 숫자가 적어도 2,3백 개는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한식당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기업 진출은 고려하지 않았다.
다시 첸의 가족으로 돌아가보자.
첸의 18명의 자녀들은 모두 태국어로 가르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지만 어머니가 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첸은 그가 죽기 전까지 집안에서는 차오저우 말만 고집하였기 때문에 자녀들 거의 모두가 차오저우 말을 구사할 수 있다.
물론 막내에서 둘 정도는 위의 형 누나들만큼은 어림도 없지만 가족과의 일상의 대화는 문제없다. 중국으로부터 이주하여온 중국인을 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강력한 정부시책에 따라 첸은 태국 성으로 창 씨 개명을 했다.
퐁피쿤이란 태국성을 갖게 되었고, 이름도 모두 태국식으로 개명을 했다. 사실상 그들의 원래 성인 진 씨는 어디에도 써먹을 데가 없다. 사업을 하는 형제는 혹 중국인과 관계가 있을까 해서 명함에 중국 이름도 병기하여 인쇄를 하기도 하였지만, 하다 보니 중국 이름은 전혀 쓸데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중국이름을 명함에서 빼 버렸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첫째 딸, 셋째 딸 셋째 아들이 중국에서 인테리어 품목들을 수입하는 일이 생겨 뻔질나게 중국을 드나든다.
그러는 바람에 다시 명함에 중국이름을 새겨 넣었다. 첫째 딸은 모두가 '쩨야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한다. 중국어의 누이라는 뜻의 쩨(姐)와 태국어의 '크다'라는 뜻의 '야이'를 조합하여 '큰언니' 또는'큰누나'라는 뜻이다. 막내딸은 '쩨노이'라고 호칭하는데 '노이'란 말은 태국어로 '작다, 또는 조그맣다'라는 뜻이다. 그렇게 말을 재미있게 조합하여 쓰는 문화가 생겨났다.
여러 군데 흩어져 살고 있는 사촌 또는 육촌등의 친척들 간에는 '꼬'와 '이', 그리고 '쩨'라는 호칭이 난무한다. 꼬는 우리의 고모(姑母)이고, 이는 우리의 이모(姨母)다. 그리하여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아주 없애 버리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