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차이나 타운의 고아 우 씨
진씨네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우(吳) 씨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도 역시 차오저우 청하이(靑海)가 고향이다. 우는 청하이에서 부모가 없는 고아로 친척집에서 자랐다.
그가 왜 고아가 되었는지는 나도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얹혀살고 있는 친척집도 너무 가난하여 그를 계속 거둘 수가 없어 산터우 항에서 태국으로 떠나는 또 다른 친척집 일행에 끼워 넣어 같이 가도록 주선을 했다.
1940년대의 광둥 성은 사실상 일본군대의 치하에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그 잔혹한 태평천국의 난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지역이어서 누구나가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고 있었다. 우는 나이가 열 살이나 되었지만 부족한 영양 때문이었던지 아주 작은 몸집이어서 뱃삯을 감면받았다. 그가 따라온 먼 친척벌 되는 가족도 끼니에서 자유로운 형편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우는 눈치가 있어 따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끼니를 얻어먹었다. 고향사람들은 우를 보면 우선 밥부터 주었다. 우는 영민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라 눈치가 뻔해서 되도록 짐이 안 되도록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축이 싸놓은 배설물을 줍는 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마른 배설물은 땔감으로 팔 수 있거나 끼니에 대한 보답으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몸집이 너무 작아 누가 일을 좀 시키려 해도 안쓰러워 시킬 일이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인지, 일 년이나 되었는지 우는 산터우로 가는 배를 무조건 올라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짐은 베개 하나가 전부였다. 길바닥이든지, 남의 집 처마밑이든지 누워서 자려고 하면 가장 불편한 것이 머리 두기다. 머리만 편하게 두면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베개를 가지고 다녔다. 우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의 형편은 하나도 나아진 게 없는 똑같은 가난 만이 있었다. 그렇게 거의 걸식으로 만 살았어도 세월은 가고 우의 몸집도 꽤 커져 잘하면 태국으로 돌아가면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을까 싶어 다시 배를 탔다.
태국이 고향 청하이보다는 그래도 백번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허드렛일로 끼니를 벌기에는 이제는 어엿한 상업지역으로 발전되어있는 방콕의 차이나 타운이 그래도 기회가 많아 거기에 주저앉아 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어느 날 시장에서 아낙네가 좌판을 차려놓고 팔고 있는 야채 팟풍 (空心菜; morning glory)이 눈에 들어왔다. 늘 먹고 있는 야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게 잘 팔릴까? 하고 저만치 서서 관찰을 하는데 한 자루가 금세 팔려 버렸다. 그리고 또 한 자루도 금세 팔렸다.
아낙네가 우를 보고 묻는다. "왜 그렇게 서서 보고만 있어? 한단에 5 전이야. 살래?"
우가 당황해서 답한다. "5 전이요? 비싼데요." "비싸다고? 이거 채취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물속에 들어가서 베어 오는 거야." "그런데 아주머니. 그거 채취하는 데가 어디인데요?" 아주머니가 우의 행색을 훑어본다. 남루한 행색의 소년인데 자기가 쓰고 있는 고향말을 쓴다. "어디서 왔어? 차오저우 말을 쓰는데" "청하이에서 왔는데요" "아이고! 고향사람이구먼." 중국에서 온 지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고향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도움을 주려고 한다.
우가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고향사람들이 끼니를 거두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는 아주머니한테 여러 정보를 알아가지고 박풍 채취에 나섰다. 물가에 자라거나 물속에 자라거나 하는 수생식물 팟붕은 부지런하기만 하면 서식지는 어디서든지 찾을 수 있다. 우는 하루종일 물속을 드나들며 좋은 품질의 팟붕을 채취해 단을 엮었다. 단을 예쁘게 엮은 것을 짊어지고 타이인들이 사는 마을로 가서 팔았다. 그런대로 돈을 벌었다.
팟붕을 공급하다 보니 시장에 대하여 이것저것 알게 되었고 무엇을 팔면 돈이 되는 가에 조금씩 눈을 떠갔다. 우는 무엇이든지 팔았다. 타이 마을의 고객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중국상인들한테 값싸게 사가지고 등짐으로 가져다가 판다. 그러다가 수레를 하나 장만하고 수레를 끌고 다녔다. 그리고 타이마을의 조그만 소매 가게들에게 납품을 하기 시작했다. 개인 고객에 소매로 파는 것은 이윤은 더 많이 난다 해도 이윤은 적지만 가게에 도매로 납품하는 것은 물량이 크니까 결국 전체 이윤은 더 크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요구된다. 우는 수레뿐만이 아니고 자전거도 장만했다. 그러나 자꾸 걸리는 것이 그의 까막눈 신세이다. 학교라고는 가 본 적이 없는 우는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니 무슨 더 좋은 일을 해 보려고 해도 막혀 버리기가 일쑤였다. 태국말 습득도 다른 사람보다 뒤졌다.
우는 일단 독학으로 글자 공부를 시작했다. 또한 타이어도 독학으로 공부했다.
낮에는 무엇이든지 팔고 밤에는 읽고 쓰는 법을 익히며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갔다.
장래에 대한 자각도 생겼다. 언젠가는 장가도 들어야 하고 아이도 낳고 하면 가족이 생기는 것인데 그러려면 번듯한 집과 안정된 돈벌이도 만들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는 열심히 노력한 만큼 돈도 벌린다라는 생각을 철저히 믿고 있다. 중국인 화인 사회, 특히 차이나 타운의 차오저우 출신의 사회에서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 인정을 받으면 누구나가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신용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신용이 있는 자에게는 값을 싸게 줄 것이고 까다롭지 않게 사줄 것이고 외상으로도 줄 것이다. 자금이 달리면 돈도 꾸어 준다.
고아로 자란 우는 어릴 때 너무 못 먹고 자라 신체가 그렇게 크지 않고 가냘프게 생겨 주위의 고향사람들로부터 동정심 같은 도움을 좀 더 받아서 인지 성품이 좋아서 인지 나이 이십에 성가(成家)를 했다. 집도 사고 장가도 들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적극 차오저우 출신의 처녀를 소개하여 장가를 들었는데 식구가 있다는 것은 노동력이 생겼다는 말과 같아 돈을 버는데 훨씬 유리하게 된다는 말이다. 훨씬 이란 말보다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둘이서 무엇이든 팔았다. 지금도 태국은 종교적인 이유가 있어서였겠지만 툭하면 금주령이 내린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날에는 술 거래가 안된다.
그리고 평소에도 술을 파는 시간을 정해놓고 있다. 금주령이 있는 시간에 술이 먹고 싶은 타이인들이 술이 먹고 싶을 때 우의 집으로 가서 문 앞에서 특별한 사인을 보내면 작은 창이 열리는데 거기에 술값을 얹어 놓으면 조금 있다가 그 자리에 술이 놓인다. 대화할 일도 없다.
그런 장사는 우의 부인의 몫이다. 우의 부인은 태국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완벽한 타이말을 할 수 있어 아직도 타이어에 어눌한 우를 돕는다. 그녀는 딸 둘을 낳고 연이어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는 고향사람이 하는 고물상에 무슨 물건을 팔러 갔는데 그 사람이 우를 불러 세웠다. "여보게 , 저기 저 철제 물건 좀 보게나, 저게 무엇인지 아는가?"
우는 그 사람이 가리키는 녹이 슨 고철 덩어리로 다가가서 살펴보았는데 무슨 용도의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래쪽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 곳이 있는데 아무래도 불을 지펴 넣는 아궁이 같았다. 그렇다면 아궁이 위에 붙어있는 철제 통은 솥이 되어야 한다. '그래 저 철상자에 물을 넣고 밑에서 불을 때는 그런 기계네.'
"모르겠네요. 이게 뭔지. 물을 끓일 수도 있겠는 데요. 보일러 같기도 하고요."
"비싸게 안 받을 테니 가져가봐. 혹시 알아? 좋은데 쓸데가 있는지. 잘 연구해 보라고."
너무 싼값을 부르는 것은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우는 일단 집에 가져다 놓자 하고 수레에 싣고 왔다. 무엇에 쓸 것인지는 차차 연구해 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는 그 철재 고물이 평생의 사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가 이런저런 물건을 납품하는 타이인 잡화점에서 깡통 통조림을 보았다. 가겟집 주인이 우를 보고 하는 말,
"그 깡통이 요새 안 들어와요. 그것 좀 구해다 줄 수 있어요?" "이게 뭔데요"
우는 깡통 통조림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는데 알아보지 못할 글자로 쓰여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영어로 쓰여졌던 것이다. 깡통은 납작하고 동그란 조그만 철제 통인데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무슨 육고기 그림 같았다. "이게 무슨 고기 같은데요?" "아, 그거요? 소고기예요. 그게 모자라니까 알아봐서 좀 가져오세요" "그런데 이걸 얼마에 팔아요?" "한 개에 5 바트에 팔아요" "예? 그렇게나 비싸요?" "그게 수입품이라 그래요. 뭐 영국이라든가?" 우는 그 깡통에 매혹이 되었다.
그걸 만들어 보리라 생각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며 공부를 했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고물상에서 가져다 논 그 철제 고물이 쓰임새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가 본 깡통이 바로 콘비프(corned beef)였다. 소고기를 염장하여 깡통에 넣어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게 한 음식이다.
우는 만사 걷어 치고 고물 기계를 재 조립하고 콘비프 생산 공정을 만들어 나갔다. 콘비프 생산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당시에는 값이 싼 소고기를 사다가 기름 부위는 발라내고 살코기를 네모각형으로 잘라 데쳐 익힌 후 깡통에 넣고 소금물을 부어 밀봉을 하면 끝난다.
물론 가스를 빼어 진공으로 만드는 공정과 밀봉이 끝난 제품을 냉각시키는 공정이 더 있지만 어떤 제조공정보다 간단하다. 현대식 생산공정은 전부 자동화되어 있고 살균과 레토르트등의 위생처리등이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하지만 당시에는 좋은 제관의 함석 깡통만 값싸게 공급받을 수만 있으면 문제 될 게 별로 없었다. 여러 번의 실험 생산후에 수입품과 별로 다르지 않은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깡통둘레를 감아 붙여야 할 제품설명서와 그림을 인쇄소와 상의하여 제작하였다. 물론 제조원인 제작자 이름이 들어가야 하니 상호도 정해야 했다
여러 사람들과 상호를 무엇으로 할까 하고 상의를 했는데 우가 만드는 콘비프가 서양 음식이니까 서양식으로 짖는 것이 좋다고 하여 스탠더드(Standard)라고 지었다. 사실 우는 스탠더드라는 말이 무슨 뜻인 줄도 모른다. 생선 통조림으로 콘비프는 팔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만드는 것이 문제다. 많이 팔리면 많이 만들어야 하고 많이 만들려면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우 씨는 가족 이외에 어느 한 사람도 돈을 주고 쓰지 않는다.
죽으나 사나 우 씨와 부인 두 사람이 만드는 양이 전부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들어갈 나이면 그다음부터는 일꾼이다. 아이들 일은 주로 배달하는 일인데 가까운 거리는 저학년 사내아이들 몫이고 먼 거리는 고학년 딸아이들 몫이다. 여자애들은 자전거로 배달하는데 둘째 와타나는 자전거 타기 선수다. 언니보다 덩치도 크거니와 힘도 좋아 자전거에 싣는 양도 언니의 두 배는 된다. 그리고 속도도 쏜살같고 절대 넘어지거나 하는 사고도 안 낸다. 언니 덴꾸아는 공장 일이거나 배달 일이거나 정말 싫어한다. 툭하면 하기 싫다고 심술을 내어 밥도 안 먹으며 시위를 하곤 했는데 결국 엄마랑 타협을 보았다.
"그럼 너는 집안일을 해. 청소도 하고 밥도 지어" 그 후로 뗀꾸아는 집안일 전담이 되었다.
우가 외부 사람을 안 쓰는 이유는 급여 주는 것이 아까운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 콘비프 만드는 비밀이 새어 나가면 큰 일이라는 생각이다. 콘비프는 값도 비싸고 소고기를 안 먹는 힌두성향 불교도들이 많아 그 시장이 크지를 않아 경쟁자가 생기면 끝장이다. 와타나는 그것이 불만이다. "콘비프 말고도 통조림으로 만들 것이 얼마나 많은데 시장도 크지 않는 콘비프만 고집할 게 뭐 예요. 보세요. 태국 사람들은 점점 소고기 안 먹어요. 돼지고기 통조림도 있고 생선도 있어요." "모르는 소리 말아라. 그거 만드는 사람은 쌔고 쌨다. 후발로 시작해서 경쟁이 되겠느냐? 콘비프는 우리만 만드는데 이거라도 잘 지켜야지. 그리고 물량이 많아지면 사람 쓸 일도 생각해야 하고 시설도 늘려야 해. 그리고 공장도 크게 지어야 하고. 우린 그럴 돈이 없는 건 너도 알잖아" "돈이야 빌리면 되지요" "누가 빌려 줘?" "은행에서 빌리면 돼요" "은행에서 담보도 안 잡고 돈을 빌려 주겠어? 그리고 그 이자는?"
뗀꾸아는 간호대학으로 진학하고 간호원이 되었다.
와따나는 공장일에 전념하며 정규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2년제 영어전문학교에 들어갔다.
앞으로는 수출 만이 살 길이며 그러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신념이 투철했다.
와타나는 아버지의 고집을 꺾고 차오저우식 돼지고기 요리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대박 까지는 미치지 못했지만 매출이 열 배는 늘었다.
소매 잡화상에 몇 상자씩 직접 배달하던 판매방식이 바뀌어 도매상에 일괄 납품 하는 것으로 하여 배달하는 번거로움도 없어졌다.
남동생 둘은 공장 직원이 되어 생산에 참여하고 와타나는 판매에만 집중했다. 50을 갓 넘은 아버지는 조기 은퇴하기로 타협을 보았고 어머니는 집안일만 했다. 실상 아버지 우 씨는 건강에 문제가 많아 현장일은 사실상 어려웠다. 어릴 때 너무 못 먹고 고생을 한 탓이리라.
아버지의 사업 터전이었던 차이나타운과는 40킬로나 떨어진 방콕 외곽, 방나(Bangna)로 옮겨 이층 집이 달린 꽤 넓은 공장을 갖게 되었다.
와타나는 통조림의 추세가 육고기 시대는 지나갔다고 판단했다.
콘비프도, 차오저우식 돼지고기도 더 이상 안 되는 사업이다라는 것을 간파하고 생선 통조림으로 방향을 바뀠다.
일본에서 정어리(sardine) 통조림이 엄청 수입하여 들어오면서 시장을 점령했다. 뿐만 아니라 참치 통조림도 들어오는데 이제는 태국의 대기업이 손을 대고 현지 생산을 하고 있다.
참치는 와타나네와 같은 소형 공장에서는 어림없는 품목이다. 참치통조림의 원료인 다랑어나 가다랑어는 태국에서 잡히질 않는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수입하여야 하는데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고 공장도 완벽한 자동화 시설로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태국에서 청어목인 정어리는 안 잡히지만 크기가 정어리처럼 작고 맛이 좋은 같은 청어목의 전갱이 쁠라투(빠투)가 잡힌다.
시장에서 와타나는 사딘이 아닌 쁠라투 통조림을 이미 보았다. 쁠라투라는 태국말 대신 사딘(sardine)이라고 생선 이름을 붙여놓았지만 그것은 쁠라투가 확실했다. 그리고 영어로는 인디언 매카렐(india mackerel)로 표기했다. 일본인들이 개입한 것이 분명했다. 와타나는 '바로 저것이야' 쁠라투는 맛도 좋을뿐더러 값도 싸서 태국인들 누구나가 좋아하는 생선이다. 크기가 작은놈이라면 훨씬 싸게 구입할 수 있으니 통조림에 제격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방콕만의 동쪽 날개가 되는 촌부리로부터 라이용까지의 긴 해안에 쪽배 어선들이 쁠라투를 잡는다.
앙실라, 방센, 시라차, 람차방, 파타야로 가는 길목에 와타나 공장이 있는 방나가 있다.
어쨌든 방 나지 역은 비교적 어부 또는 지역 수산물 협동조합에 접근하는데 불리한 지역은 아니다. 싱싱한 원재료를 값싸게 사는 일과 제품을 판매하는 일이 와타나의 일이고 큰 남동생은 생산을 맡고 작은 남동생은 관리를 맡아 각자 분명한 업무 분담이 조직되었다.
공장일은 동네에서 모집한 가정주부가 대부분인 여자 수십 명이 일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스리랑카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와타나로서는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되었다. 스리랑카는 섬나라이니까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수산자원이 풍족할 것이어서 주민들은 생선이든지 갑각류 등의 해산물은 지천의 먹거리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많은 생선 통조림을 수입하고 있다. 와타나가 만난 스리랑카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을 때 와타나도 저으기 놀랐다. 그가 요청하는 물량이 상상을 초월하는 양이다.
"정말 그런 물량이 필요해요? 믿기 어려운데요." "내가 말한 물량은 아주 적게 잡은 물량입니다. 값만 좀 더 내려 주면 그 배로도 늘어날 거예요. 이번에는 처음 거래이니까 155ml짜리 작은 캔, 20 피트 컨테이너 다섯 개부터 시작합시다. LC를 받고 30일 내에 선적 가능하죠?" 와타나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잠깐만." 와타나는 부지런히 계산을 해 보았다. 원재료 확보, 제관 확보, 공장인원 확보, 그리고 자금, 아무것도 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이런 거래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가보자'
"30일이 아니라, 45일로 하죠. 저도 처음 거래라 준비할 게 있어서요."
스리랑카와는 그렇게 거래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와타나는 어렵고 어려운 전투에 들어갔다. 원재료 확보와 자금이 가장 어려운 난제이다.
해안의 크고 작은 수산물 창고를 누비고 다녔고 서해안의 폐차부리, 후아인도 훌텄다.
나중에는 다섯 컨테이너가 별게 아닌 물량이 되었지만 와타나의 생선 통조림 수출 사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